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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고향집 옥상 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당시 호주살이를 한 지 좀 되어서 이렇게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는 것도 참 별일이었지요.
▲ 눈이 소복한 산수동 자택 옥상 이른 아침,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고향집 옥상 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당시 호주살이를 한 지 좀 되어서 이렇게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는 것도 참 별일이었지요.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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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려 했다. 우리 모녀는 서로에게 쿨했으면 쿨했지, 이 마당에 결코 눈물바람을 할 타입들은 아니다. 그래서 더 외면하려 했다. 코끝이 쌔-하게 매워지는 이런 순간들을 말이다.

사실 엄마의 목소리는 아침에 내게 국을 퍼주실 때부터 잠겨 있었다. 필시 간밤에 우셨던 모양이다. 엄마 목소리가 떨릴 때마다 내 눈물샘의 둑은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웠다. 하늘을 쳐다보며 가까스로 눈물을 틀어막고 공항행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버스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엄마는 "온나" 하시며  당신의 앙상한 두 팔을 벌리신다. 내가 어릴 적 나를 크게 혼내신 다음에 하시는 것과 꼭 같았다. 그 시절 눈물콧물 범벅을 해 엄마 가슴에 폭 안기면 고장난 수도꼭지 마냥 울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키가 내 가슴께인 엄마가 내 품에 꼭 맞는다. 결국 그날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목놓아 울어버렸다. 지난해 12월 이른 아침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의 공기는 찼지만 우리의 눈가는 뜨거운 온천물처럼 넘실거렸다.

엄마는 대뜸, "이 가시나가 집에 있는 한 달 동안 내색도 없더니, 왜 인자 그르냐" 하셨고 나는 엄마의 입가와 눈가가 아빠 차에서부터 움찔움찔했다며 엄마를 탓했다.

내가 버스를 타자마자 문은 바로 등 뒤에서 닫혔다. 피곤한 표정의 검표원 언니가 표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내 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창문의 성에를 옷자락으로 닦자 어슴푸레 창밖이 보인다.

그러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여기저기로 돌리는 작은 중년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였다. 맹세컨대 그날만큼 엄마가 작고 야위어 보인 적이 없었다. 그 추운날 내 뒤치다꺼리하느라 옷도 잘 챙겨입지 못하고 나온 엄마. 그저 내가 안겨준 던킨 도넛 봉지만 품에 꼭 끼고 있었다.

이런 적이 벌써 세 번째다. 도대체 자식이란 존재는 얼마나 더 이기적일 수 있는 걸까.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둑이 터지듯 흐르는 눈물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추억 여행을 가는 듯한 여고생 무리가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묻고 소리를 죽인 채 잠시 그렇게 있어야 했다.

여행작가 박민우는 이 순간을 '앞으로를 위한 편리한 죄책감'이라고 한 듯하다. 실은 나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집을 오래 떠나 있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나도 그 점만은 공감한다. 이렇게 아주 조금 울고 나서 눈의 눈물이 마를 때 즈음이면 과연 나는 더 집 생각을 하기는 할까. 그렇게 이 불효자가 탄 공항행 우등 버스는 유유히 고속도로로 올랐다.

칼바람이 불던 작년 12월, 광주 광천고속버스터미널에서.


태그:#여행, #남미, #여행기, #가족, #뷸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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