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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가 18년 주석한 천장암 찾아가기

경허선사
 경허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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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대종사 열반 10주기 추모제가 끝나고 금동원 화백과 함께 옹산스님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견성암의 비구니 스님들이 먼저 와 옹산스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옹산스님이 비구니 스님들에게 금동원 화백을 소개한다. 그러자 비구니 스님들이 금화백에게 간단한 그림과 사인을 부탁한다. 금동원 화백은 9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부탁을 들어준다. 무자(無字) 원두막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이 가지는 의미를 간단히 소개한다.

무자 원두막은 마음을 비운 집을 말하고, 집 위의 까치는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사다. 해와 달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집 앞의 강아지는 타고 다니는 자가용이다. 시바신을 태우고 다니는 동물이 황소 난디(Nandi)인 것처럼. 옹산스님은 필자에게 자신의 저서 두 권을 준다. 하나는 고희기념 문집 <잔설 위의 기러기 발자국>(2013)이고, 다른 하나는 만공선사의 항일활동을 조명한 <만공>(2017)이다. 이들 책을 통해 옹산스님이 경허선사와 만공선사 선양사업을 지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경허대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탑
 경허대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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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산스님은 2012년 천장암에 '경허대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탑'을 건립했다. 그리고 천장암 주석 당시 경허선사의 법문과 일화를 정리한 책 <작은 방에서 도인 나다>(2012)을 발간했다. 그 후 천장암의 중심건물인 인법당을 원형대로 보수하였다. 2017년에는 경허기념관인 성우당을 준공하고, 경허선사의 진영을 모셨다. 현재는 성우당 맞은편에 염궁선원(念窮禪院)을 짓고 있다고 한다. 2018년에는 독고개에서 천장암에 이르는 길에 '경허만공 오도의 길', 최인호의 구도소설 <길 없는 길>을 기리는 표지석을 세웠다.

옹산스님은 현재 천장암의 조실이다. 그는 천장암의 변화를 보여주겠다며, 천장암엘 한 번 가보자고 제안한다. 그 동안 말로만 듣고 가보지 못한 곳이라서 흔쾌히 동행하기로 한다. 스님은 자신의 아반테 승용차를 손수 운전해 천장암으로 향한다. 예산과 서산의 경계를 이루는 독고개(해미고개)를 넘어 '깨달음의 길(경허만공 오도의 길)' 초입에 차를 잠깐 세운다. 최근에 세운 두 개의 표지석을 보기 위해서다.

해미고개(독고개) 표지석
 해미고개(독고개)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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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정혜사에서 해미고개까지가 4㎞, 해미고개에서 천장암까지 다시 4㎞다. '최인호 문학의 금자탑' 표지석에는 '<길 없는 길>의 무대-천장암'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최인호가 연암산 천장암과 경허선사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 천장암이 한국문학사의 명소가 되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통해 천장암이 제비바위(燕巖) 아래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면 연장이 고개가 나온다.

경허선사 18년 주석처 천장암 살펴보기

천장암 가는 길
 천장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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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이 고개는 해미면과 고북면을 경계 짓는 고개다. 앞쪽으로 서해 바다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연암산 줄기가 보인다. 연암산은 해발 441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이 산 중턱에 천장암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절로 가는 길이 정말 가파르고 위험하다. 겨울이면 차량 운행이 불가능할 것 같다. 옹산스님은 늘 오는 길이라 그런지 아주 여유 있게 운전을 한다. 절 입구에 도착하니 '수월선사 기념비'와 '최인호 문학의 금자탑' 표지석이 보인다.

그리고 절 쪽으로 최근에 지어진 경허기념관이 보인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천장암을 자세히 살펴본다. 천장암의 중심건물은 천장암이라는 편액이 붙은 인법당이다. 천장암은 하늘을 품고 있는 암자라는 뜻이고, 인법당은 법을 이끄는 당우라는 뜻이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법당이 있고, 오른쪽에 부엌과 두 개의 방이 있다.

원성문: 경허스님방
 원성문: 경허스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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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방 중 원성문(圓成門)이라는 편액이 걸린 한쪽짜리 여닫이문이 있는 방이 경허스님의 방이다. 방의 크기는 130×230㎝로, 겨우 몸 하나 눕힐 수 있는 작은 면적이다. 성우스님이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은 34세 되는 1879년 11월 동학사에서다. 사하촌에 사는 이진사가 하는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는 지혜의 눈을 떴다고 한다. 성우는 1880년 동학사를 떠나 이곳 천장암으로 수도처를 옮긴다.

그리고 천장암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서 용맹정진한다. 1년 반쯤 지난 1881년 6월 콧구멍 없는 소에 대한 의문이 풀리며 활연대오해 오도송을 불렀다. 콧구멍 없는 소에서 자유자재 무애행을 보았고, 작은 공간에서 삼천대천세계를 보았음을 표현한 게송이다. 그러니 태평가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득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忽聞人語無鼻孔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頓覺三千是我家
유월에 연암산 아랫길에서                  六月燕巖山下路
야인처럼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野人無事太平歌


인법당
 인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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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천장암 법당 안은 금동보살 두기와 석조보살 두기가 안치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금동보살 두기는 석가모니불과 관음보살로 보이고, 석조보살 두기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로 보인다. 불상 양쪽으로는 경허선사와 만공선사 진영이 걸려 있다. 그리고 벽에는 신중도와 칠성도 등이 걸려 있다. 이들은 19세기말 작품으로 추정된다.

법당 앞에는 문화재자료인 칠층석탑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오층석탑으로도 보인다. 양식과 시대를 정확히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천장암에서 앞을 내다보면 정면으로 산이 보이는데, 그것이 삼준산(489m)이다. 천장암의 당우로는 요사채와 산신각이 더 있다. 천장암은 스님들의 수도처이자 안거선원이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절의 대중화를 위해 템플스테이를 운영한 적도 있다고 한다.  

기행으로 알려진 만년의 자취를 찾아

공주 마곡사
 공주 마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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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는 깨달음을 얻은 후 20년 가까이 제자를 기르는데 몰두했다. 이때 키워낸 스님이 수월, 혜월, 만공이다. 그리고 삼남의 절을 돌며 선방을 만들고 선풍을 드날렸다. 그거 거쳐간 영남의 절이 부산 범어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밀양 표충사, 대구 동화사 등이다. 호남의 절로는 순천 송광사, 지리산 주변의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 곡성의 태안사 등이 있다. 호서의 절로는 동학사, 마곡사, 개심사, 부석사 등이 있다.

경허선사는 1904년 천장암으로 다시 돌아왔고, 만공에게 법을 전한 후 북쪽으로 떠난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며 화업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산천을 주유하며 자연을 즐긴다. 이때 쓴 시문이 <금강산 유람가>로 남아 있다. 금강산 다음 행선지는 안변 석왕사다. 그곳에서는 오백나한 개금불사의 증명법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후 행적이 묘연하다.

경허 성우 인장
 경허 성우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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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수월과 만공스님에 의해 행적이 확인되었는데, 함경도 강계군 종남면 한정동에 잠깐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는 갑산군 도화리로 들어가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스님으로 불법을 가르친 게 아니고, 훈장으로 아이들에게 글을 깨우쳐주려고 했던 것이다. '봄볕이 없는 곳에 꽃이 피지 않는다(春光無處不開花)'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허는, 나라 잃은 암흑 세상에 한줄기 빛을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했다.

경허선사는 1912년 4월 25일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함경도에서 활동하는데 도움을 준 유생 김탁(金鐸)을 통해 열반송이 전해진다. 김탁은 1913년 자신을 찾아온 만공스님에게 경허선사의 열반송과 유품을 전해준다.

마음 달 홀로 둥글어               心月孤圓
그 빛이 삼라만상을 삼켰어라.  光呑萬像
빛과 경계가 함께 사라지니      光境俱忘
또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復是何物


<경허집>과 연구서 출간 이야기

경허집
 경허집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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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집>은 경허선사의 법어를 모은 문집이다. 만해 한용운이 쓴 서문에 따르면, <경허집> 발간은 만공선사가 주관했다. 1935년 경허선사의 원고를 수집한 만공은 만해에게 책의 발간을 부탁했다. 그러나 경허선사가 북녘에서 보내며 쓴 만년의 글까지 수집하자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1942년에야 책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1943년 보급을 위해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것을 선학원본이라고 한다.

선학원본에는 만해가 쓴 서문과 약력이 앞부분에 나온다. 본문은 법어(法語), 서문(序文), 기문(記文), 서간(書簡), 행장(行狀), 영찬(影讚), 시(詩), 가(歌) 순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오기 전인 1931년 한암선사가 쓴 <경허집>이 나온 바 있다. 그리고 1938년 김태흡 스님이 불교잡지 <비판>에 '인간 경허평전'을 연재하기도 했다.

경허화상 법필(法筆)
 경허화상 법필(法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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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는 이상하 번역으로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 번역본 <경허집 鏡虛集?이 나왔다. <한국불교전서>(동국대학교출판부 간행) 제11책 <경허집 鏡虛集>을 저본으로, 선학원본 <경허집 鏡虛集>(1943년)을 대조본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2017년 10월 13일에는 경허탄신 168주년을 기념해서 경허연구소가 5권의 경허 연구서를 출간했다. 연구서는 <인간 경허 연구> <경허 선시 연구><경허 선시 감상><경허성우 중도불이 선사상 연구>(상, 하)로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서는 원문과 번역 그리고 해설까지 실어 대중성과 전문성을 겸비하고 있다.


태그:#경허선사, #천장암, #경허대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탑, #원성문, #《경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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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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