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 (경북대 교정)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 (경북대 교정)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경북대학교 정문으로 진입하여 150m가량 들어서면 도로 오른쪽의 넓은 잔디밭 한복판에 특이한 모습으로 서 있는 조형물 하나와 만나게 된다. '장윤덕(張胤德, 1872.7.6.∼1907.9.16.) 의사 순국 기념비'이다. 장윤덕 의사는 순국 이후 60년이 지난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애국지사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비 앞으로 다가서니 왼쪽에 안내판이 서 있다.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
소재지 : 대구시 북구 산격동 1370
건립 일자 : 1956년 1월 1일
규모 : 부지 10평, 높이 3m

이강년


이강년은 185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아버지 이기태와 어머니 의령남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재직했는데 1884년 일본에 기댄 급진 개혁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낙향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동학군에 가담하여 일본군 및 탐관오리들과 싸웠고, 1895년과 1907년에는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강년은 민긍호 등과 합세하여 제천에서 적 500명을 죽이는 등 크게 활약했지만 1908년 청풍 까치산 전투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했다.

장윤덕 의사는 경북 예천 출신으로 1907년 4월 서울에 상경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매국적신(賣國賊臣)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밀고로 실패하고 고향에 피신해 있던 중 같은 해 7월에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7년 9월에는 이강년(李康年) 의병장 휘하 의병장으로 풍기, 봉화, 문경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9월 16일 상주읍을 습격하여 일경과 교전하다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하며 항거하다가 당일 상주 함창 구향리 뒷산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밀고로 실패했다'와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했다'라는 부분이 특별히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신돌석(申乭石, 1878.11.3∼1908.11.18.) 의병장이 배신자들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비극이 저절로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광수는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라고 강변했다. 배신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늘 궤변의 논리를 갖춘 채 당당하게 살아간다. 이익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고, 지역 공동체를 배신하고, 벗을 배신하고, 속으로는 자신의 양심을 배신하는 저급한 인간들이 없는 세상은 언제 오려나!

이강년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기념관으로, 경북 문경 가은읍 대야로 1683(완장리 96)에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곧장 동상이 나타난다.
▲ 이강년 기념관 이강년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기념관으로, 경북 문경 가은읍 대야로 1683(완장리 96)에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곧장 동상이 나타난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안내판을 읽었으니 지금부터는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을 읽는다. 비문은 배학보가 짓고 최원봉이 글씨를 썼다. 많은 빗돌의 글들이 흔히 그렇듯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도 내용을 파악하기가 아주 어렵다. 아니, 사실은 거의 해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조금 전에 읽은 안내판이 별도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 안내판을 따로 세워둔 관리인의 정성이 고맙다.

기념비의 비문을 사진으로 찍어 컴퓨터에 집어넣는다. 글자를 확대해서 읽어보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면 그냥 스쳐지나갈 비문의 내용도 잘 알게 된다. 특히 기념비 앞까지 찾아갔지만 비문은 읽어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던 분들에게 선열의 사상과 업적을 소개하는 보람도 느낄 수 있다.

읽기 어려운 빗돌의 문장을 독자들에게 정성껏 소개

필자는 임진왜란, 경술국치 등 어려운 시기에 목숨을 바쳐 나라와 겨레를 위해 싸웠던 선열들의 빗돌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일반 독자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옮겨 적는 일을 많이 해왔다. 선열들의 위대한 삶을 추념하는 필자 나름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윤덕 의사는 "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의거하여 강도 너희 놈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붙잡혔으니 오직 죽음을 바랄 뿐이며, 너희 놈들과는 아무 말도 하기 싫다"라고 적을 꾸짖으며 스스로 혀를 깨물어 말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의사는 그렇게 함으로써 일제의 취조를 거부했고 동지들을 지켜냈으며, 마침내 목숨을 잃는 순국의 길을 갔다. 어찌 필자가 비문을 옮겨적는 정도의 노고를 귀찮아하랴!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배달의 슬기로운 기백이 타오르는 이 푸른 언덕에 겨레와 강토를 굽어보는 높고 큰 봉우리가 있으니 이가 곧 의병대장 장윤덕 의사이시다.

자, 호, 을사조약


: 옛날에는 이름을 소중히 여겨 임금이나 스승, 직계 어른 외에는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본명 대신 다른 이름을 지어서 불렀는데, 그 이름을 자(字)라 했다. 자는 집안 어른 등이 지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자가 생기면 성인으로 대우를 받았다.

: 자와 다른 호(號)도 있었는데, 호는 본명 대신 가볍게 부르는 이름으로 본인이 짓거나 벗들이 지어주었다.

을사조약 :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다. 이 조약이 맺어진 것은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이 이등박문에게 크게 협조한 결과로, 그래서 이 다섯 사람을 '을사5적'이라 부른다.

1905년에 맺어진 이 조약이 국가 사이의 통상적인 조약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강제로(勒) 체결된 것이므로 을사늑약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견해도 있다. 늑(勒)은 '강제로 무엇을 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을사늑약에는 조약이 애당초 원인 무효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서기 1872년 7월 예천읍에서 탄생하니 자는 원숙(元淑)이요 호는 성암(惺菴)이다. 일찍이 한학을 닦아 예천군 수서기(首書記)의 관직에 있을 때 저 망국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검은 구름은 하늘을 뒤덮고 도적의 발길이 삼천리를 짓밟으며 가슴에 품은 의분의 칼은 갈수록 서슬이 푸르렀다.

서기 1907년 4월 서울에 올라가 침략자의 우두머리와 매국역도의 주륙을 꾀하였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한의 칼날은 더욱 원수를 노려 늦춤이 없더니 7월에 격문을 사방에 뿌려 삼백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풍기 분파소를 쳐부수었으며 봉화의 소굴을 불태우고 문경, 용궁, 예천 등지로 피의 항쟁을 계속하던 중 특히 문경땅 갈벌 싸움에서는 이강년, 민긍호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왜적의 수비대와 경찰대를 섬멸시켜 민족의 의기를 천추에 떨쳤다.

이어 의사는 대구 수비대를 무찌르고자 의진을 이끌고 쳐들어 가다가 (9월 16일) 상주에서 대구 수비대와 격돌, 격전 끝에 총상을 입고 마침내 왜적에게 잡힌 몸이 되어 갖은 악형을 당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앞니로 혀를 끊어 맵고 곧은 절개를 지켰으니 이것이 곧 배달의 기백이요 화랑의 일이다.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 빗돌 바로 앞에 해설문이 새겨진 표석이 서 있다.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 빗돌 바로 앞에 해설문이 새겨진 표석이 서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아, 아, 원통하여라. 왜적의 모진 손길은 드디어 의사를 총살형에 처하였으니 서기 1907년 9월 16일 35세의 젊은 별은 상주군 함창 땅에 떨어져 잠자던 겨레의 횃불이 되었도다.

조국이 광복된 지 스무 해 되는 오늘 나라의 기둥 될 준재들이 모인 이곳 경북대학교 뜰에 드높이 돌을 세우고 의로운 사적을 새겨 이 땅의 젊은이 학도들에게 길이 전하니 후진들은 명심할지이다."

기념비의 비문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다시는 망국에 이르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배우고 받들어 나라의 당당한 주인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기념비 좌우의 잔디밭에는 젊은 대학생들이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듯한 모습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젊은이들이 오늘 저렇듯 화사하게 햇볕을 쬐고 있는 것은 모두 '젊은 별'들이 '땅에 떨어져' '겨레의 횃불이 되어준' 덕분이다.

예천에 있는 묘소도 한번 참배하리

이제 기념비 앞에 허리 숙여 절을 올리면서 '언젠가는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산147-1에 있는 장윤덕 의사의 묘소도 한번 찾아보리라' 하고 다짐한다. 지도에서 검색을 해보니 의사의 묘소는 수계리 158 소재 보문사에서 500m가량 남쪽에 있다.


태그:#장윤덕, #이강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