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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인 내 나이가 어느새 74세에 접어들었다. 아내는 70세로 고희를 맞는다. 옛날로 치면 딱 '자연사(自然死)' 연령이다. 하지만 현대의 기준으로 치면 75세 이전은 전기 노인이고, 75세에서 85세까지는 중기 노인이고, 85세 이후부터 후기 노인으로 분류된다.

 김형석 지음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김형석 지음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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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65세에 정년퇴임을 하면서 "내가 원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버림받은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갑자기 '이제부터 나도 늙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상념에 사로잡혔다"고 회고했다.

당시 그는 '길게 잡아 85세까지 산다면 앞으로 20년의 시간이 남았는데... 어찌 살아야 하지?'라고 자문했단다. 올해 100세를 눈앞에 둔 김형석 교수는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2018)라는 책을 내놓아 세간의 시선을 끌었다. '100세 철학자'로서 대표 산문집을 낸 그에게 이제부터는 남은 세월이 아니라, 남은 시간이라는 긴박감이 찾아들기 시작한 게 아닐까.

김형석 교수는 정년을 맞이하면서 "버림받은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고 했지만, 장 아메리(J. Amery)는 <늙어감에 대하여>(김희상 옮김, 2014)에서 정년은 당사자에게 현재의 잔고만 확인시켜주는 '사회적 연령'이랬다. 그는 늙어감의 잔인성을 이렇게 말한다.

"본인은 자신이 여전히 가능성을 가졌다고 믿지만, 사회는 그를 보고 그리는 그림에서 그런 가능성 자체를 지워버린다. 본인은 자신의 독자적 판단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아, 이제 나는 잠재력이 없는 피조물이구나' 하고 여긴다. 그리고 이런 타인의 시각은 당사자의 내면에 갈수록 분명하게 아로새겨진다. 아무도 그에게 '앞으로 뭐 할래요' 하고 묻지 않는다. 모두 냉철하고 확고한 태도로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걸 이미 했잖아!' 하고 등을 돌린다. 타인은 이미 결산을 내리고 현재의 잔고만 확인시켜준다는 점을 당사자는 쓰라리게 경험한다." (100쪽)


늙어가면서 그 누구도 이런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외가 없는 가혹함이다. 다만 문화적 차이로 우리 사회는 이런 감정이 그리 노골적으로 전달되지 않을 뿐이다.

나이 들면서 달라진 것

정년 후 나는 3년간 대학원에서 강의 하나를 맡아서 가르쳤는데, 젊은 교수나 시간강사들이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걸 이미 다 했잖아!' 하고 되묻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조심스러웠다. 이미 정년까지 한 사람이 기득권의 혜택을 너무 챙기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때만 해도 두 강좌까지 할 수 있었지만, 나는 한 강좌만 하는 거로 명예교수의 체면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년과 함께 뒤돌아보지 않고 스스로 강의를 딱 끊어버리는 단호한 교수에 비하면 뭔가 나 자신이 좀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석좌교수로 대접받는 주제도 아니면서.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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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정년 후에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는 시간을 훨씬 많이 향유하고 있어, 아직 나이듦에 따른 비참함은 얼마간 유예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유예기간이 언제까지일지 나도 모르겠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를 번역한 김희상은 '옮긴 이의 말'에서 존엄으로 빛나는 삶, 늙어서 품위 있는 삶을 원한다면 정신을 갈고 닦을 노릇이라 했다.

늙어 가면서도 정신 줄을 놓지 않고 계속 갈고 닦는 삶은 고상하지만 쉽지 않다. 내면적으로 치열한 노력이 필요할 게다. 늙어 가면 누구나 몸은 추하고 허약해진다. 그것은 자연의 순리다. 몸은 껍데기고 정신은 알맹이라지만, 몸과 정신은 둘이면서 하나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不二)이다.

집사람의 당부이기도 하지만, 나는 정년 후 매일 샤워를 하고, 속옷을 젊을 때보다 더 자주 갈아입는다. 나이 들수록 거처하는 방이나 몸에서 늙은이 냄새를 풍기기 십상이다. 내 딴에는 노력을 한다고 해도 가끔 집사람에게 지적을 받는다. 하여 외출할 때는 가볍게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그게 늙은이의 예의인지도 모른다.

정년 직전에 일본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호텔 커피숍에서 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고운 할머니가 혼자 조용히 책 읽는 모습을 봤는데, 참 인상 깊었다. 그분은 청아하고 단정한 모습처럼 아마 마음도 단정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나 마음도 문제가 된다. 몸은 보이는 현실이지만, 정신(영혼)은 보이지 않는 형이상의 개념이다. 나이 들어 누구나 정신의 노쇠는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늙으면 누구나 장담할 수 없는 게 치매다.

그래서 거울에 먼지가 끼지 않게 하듯 정신을 갈고 닦을 일이다. 100세를 살아온 김형석 교수는 공부하는 삶을 강조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각자 나름의 취미생활과 가벼운 운동을 할 것을 권한다. 그는 아직도 글을 쓰고, 초청 강의에 응한다. 아마 그분에게는 그런 활동이 장수 비결이자 삶의 활력이 아닌가 싶다.

나이 들면 늘그막에 누구나 자기 삶을 되돌아본다. 잘한 일보다는 후회스러운 일들이 더 가슴에 응어리져 남기 쉽다. 게다가 여생을 어떻게 살고 마무리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막막하다. 그렇다고 부평초처럼 그냥 되는 대로 살 수도 없는 게 노년의 삶이다.

나 스스로 삶을 되돌아보면, 나는 60세 회갑이 지나면서 정신을 차리고 살고자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다. 사실 그 전까지는 내 앞가림하고, 가족들 건사하기에 급급한 삶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대학에서 정년퇴직할 무렵이 되니, 이제 정해진 일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자유를 향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년을 맞이하니 왠지 허전하고 나이듦에 따른 상실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이제야말로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을 때다.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는 삶

 나이 들어 다른 사람의 삶에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고, 그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삶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나이 들어 다른 사람의 삶에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고, 그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삶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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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우 교수는 <대승기신론통석>(2006)에서 '자리적(自利的) 삶과 이타적 삶'을 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일도 모두 성공적으로 마쳤고 직업생활에서도 은퇴를 한 노인은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중략) 이제 그 노인이 할 수 있고 또 살아야 하는 삶은 다른 사람의 삶에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고 혼자서도 살 수 있는 삶, 그리고 그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삶입니다. 이 자리적(自利的) 삶은,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자리행(自利行)과 마찬가지로 지관문(止觀門) 수행이 실현하고자 하는 삶이며, 차라리 지관문 수행 그 자체입니다." (246~247쪽)

노년에 여가활동을 즐긴답시고 부산하게 나다니는 삶, 겉으로 활기차게 보일지 몰라도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인 피해를 주기 십상이다. 나이 들어 다른 사람의 삶에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고, 그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삶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런 자리적(自利的) 삶의 전형으로 이홍우 교수는 불교에서 말하는 '지관문'(止觀門) 수행을 든다. 멈춤(적정)과 살핌(통찰)을 병행하는 불교수행이다. 지관문 수행을 두고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했다. 이것은 불교수행의 핵심이자 최정상의 수행경지를 의미한다.

위에서 기신론을 해석하기 위해 자리적 삶의 전형으로 '지관문' 수행을 말했지만, 이것은 자리적 삶의 본보기 혹은 그 진수로 예를 들기 위함이었을 게다. 중요한 것은 삶의 형식으로서의 수행 혹은 자리행의 과정이다. 노년의 삶은 그 자체가 자리행(自利行)으로서 수행(공부)하는 과정일 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그런 삶의 향기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런저런 모습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삶의 과정에서 수행과 공부는 본래 그 끝이 없다. 하지만 나이 들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본인에게는 그게 자리적 삶이라 할지라도, 욕심내면 추하게 보일 수 있다. 스스로 노욕(老欲)을 항상 경계할 일이다.

정년 후에 내가 책을 더 많이 구입하는 걸 보고, 집사람이 나의 책 욕심을 나무란다. 하여 요즘은 신간 외에는 웬만하면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본다. 늙어서 책도 싸놓으면 짐이 된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 자유시간이 많아지면서 도서관 이용을 훨씬 자주 한다. 정년 후에도 6개월간 대학 도서관에서 무한정 도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보통 공공도서관에서 2주간 3권 정도를 대출을 해주는 것에 비하면, 명예교수의 혜택을 단단히 보고 있다. 어쩌다 도서관에서 아는 직원을 만나면 차라도 한 잔하고 가라고 권하지만 사양한다. 나이가 들면 인사조로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공연히 방해나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는 걸 재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늘그막에 간접적으로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경계해야 할 터. 하여 <금강경>에서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것"(應無所住 而生其心)을 진즉에 가르치고 있다. 노년에 나이가 들면서 자리적 삶의 향기가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어든다면 그게 지복(至福)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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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구미(고아 평촌)에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대구대)로 지나고 있음. 정년후에 주로 독서, 글쓰기, 산책을 즐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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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