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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그대에게> 저자 정재찬 교수님과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에 2001학번으로 갓 입학한 무렵, 1학년 전공 필수 과목으로 '국문학 개론'을 수강했는데 그때 그 강의를 맡으신 분이 정재찬 교수님이셨다.

교수님 역시 서울대 국어교육과 출신이시긴 했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청주교대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터라 강의가 있는 날마다 매주 충북에서 상경하셨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도 교수님 특유의 유머와 열정으로 3시간짜리 수업을 늘 알차게 채워주신 덕에 매 금요일 늦은 오후가 제법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같이 수업을 듣던 동기들 중에는 나름 팬도 생길 정도였다.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말씀하신 내용 중 일부는 곧잘 수강생들 간에 온·오프라인상 얘깃거리로 화제가 되는 경우도 많았고, 교수님을 서울대 국교과가 낳은 3대 천재 중 하나라며 치켜세우는 이도 있었다.

으레 대학생이 됐으니 서술식 시험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1학년 첫 중간고사 때, 고3 때도 쉬이 보지 못했던 단답형 주관식 문제로 불의타(不意打)를 맞았을 때조차 교수님의 출제방식을 힐난하기보다 교수님의 진정성과 숨은 뜻을 헤아리려 노력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정재찬 교수님은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멘토, 누군가에게는 우상, 누군가에게는 영웅이었다.

잃었던 추억력을 소환한 책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의 표지입니다.
▲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 표지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의 표지입니다.
ⓒ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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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벌써 16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렇게 '그 당시'를 '잊은' 내가 동기들 페이스북을 통해 작년 즈음 이 책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이 페이스북을 한다는 사실도 그 당시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문득 대학교 1학년, 시(詩)를 즐겨 읽고 심지어 시를 쓰기까지도 했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이제는 휴면 상태가 되어 광활한 인터넷 바다 속에 폐허처럼 잠긴 범선이 되어버렸지만, 당시 서울대 국어교육과 학생들은 Daum 카페 <국어사랑>에서 꽤 "문학적으로" 서로의 생각을 소통했다.

그 중 익명 게시판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누군가에게 드러내놓기가 계면쩍은 비밀을 은밀하게 형상화하는 장소로 유명했고, 게시판 '문학 창작 발표실'은 이름 그대로 소위 문학소년·소녀임을 자처하고 싶은 이들이 -엉성하게나마- 문학적 기법들을 깜냥껏 활용해 닉네임을 걸고 작품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특히 '문학 창작 발표실'의 주 장르는 시였다. 그 중에는 그저 아마추어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작시(作詩) 수준이 상당했던 선배나 동년배도 있었다.

한때는 시시(詩詩)했던 대학 시절

책 내용 중 저자 소개 부분입니다
▲ 저자 정재찬 교수님 책 내용 중 저자 소개 부분입니다
ⓒ 이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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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나도 그러한 문화에 열렬히 참여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종종 수작(秀作)을 발표하는 이들에게 때로는 경탄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시샘을 내기도 했으며, 어떻게든 내 작품으로 뭇 사람들에게 칭찬 한번 받아보려 그들을 비롯한 유명 시인의 시들까지 흉내 내고 재활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일조차도 한껏 감정적으로 과장하여 죄다 시로 만들어내려 용을 썼었고, 제법 진지한 자세로 시에 관한 이론서까지 탐독했던 시절이었다. 대학 입학 전까진 입시 공부만 하느라 '시답잖게' 살아온 날들을 보상이라도 받으려 했던 것일까. 지금 돌이켜보니 신기할 정도로 나의 이성과 감정이 나와 접촉하는 세상만물을 뭐든 '기승전 - 詩'로 받아들이던 때였다. 나름의 보상이라면 보상이었을까.

치기어린 습작들을 잘 추스르고 달랬던 덕분인지 본교 대학신문사가 주최하는 <대학 문학상> 공모에서 4년 뒤 대상도 수상했다. 서울대학교가 개교 60주년 기념차 그간 <대학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모아 2005년 말 출간한 책들 중에서 <그 해 여름 안에서의 이별>이란 시집이 있는데 당시 내가 대상을 받은 시 제목과 동명이다. 본의 아니게 자찬을 늘어놓게 되었는데, 요는 그렇게 삶이 곧 문학이고 시가 곧 내 삶이었던 적이 있었다는 얘기다.

잃어버린 자화상

부끄럽게도 대학 졸업 이후 약 10년간은 정말 교수님의 이 책 제목마냥, 난 "시를 잊은" 채 지냈다.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꾸역꾸역 그렇게 10년 넘게 밥벌이에 몰두하는 동안 예전의 난 무의식 저편 어딘가에 "추억처럼" 남겨졌고 잊혀졌다. 낭만은 남만도 못한 것이 됐고 사랑은 사람에 치였으며 허우룩한 시간들은 물샐 틈 없이 바빠졌다.

종종 즐기던 정신적 도락(道樂)은 점차 형이하학적으로 변해 이젠 식도락(食道樂)만 남았다. 이렇게 마냥 심신이 굳어가는 것인가 한탄하다가도 이내 쏟아지는 현실 속 과제들에 파묻혀 잠깐 내뱉은 한숨조차 한줌 재가 되기 십상이었다. 인간의 무늬를 잃은 삶이었다.

그러던 내게 이 책이 말을 걸어왔다. 마치 정재찬 교수님이 "시를 잊은 제자에게..."라고 읊조려 주시듯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조금은 "추억처럼" 다시 사람다워지고 싶어서 틈날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한 챕터씩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뭉개져서 흉해지고, 그래서 미워졌던 자화상을 다시 그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화상 복원하기 프로젝트

책 내용 중에서 일부를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 책 내용 중 책 내용 중에서 일부를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 이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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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되고 싶어 마늘과 쑥을 먹으며 100일을 시간을 버텨내던 단군 신화의 곰처럼, 나도 일주일 내외의 기간 동안 이 책을 자양분 삼아 '다시 사람 되기' 연습을 해나갔다. 그저 기분 탓일까.

아니면 정말 효능이 있었던 걸까. 뭐가 진짜인지는 몰라도 이 책의 끝을 향해가는 동안 난 -조금이나마- 점점 10여 년의 진짜 내가 다시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챕터 12개, 299페이지를 달리는 동안, 이 책은 독자에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여러 '무늬'들을 문제제기하고 나름의 탐색을 하도록 도와준다.

가난과 풍요에서부터 사무침과 떨쳐냄, 비참과 영광, ...... , 속(俗)과 성(聖), 사랑과 사랑, ...... , 미(美)의 추구와 진(眞)의 존재, 선(善)과 악(惡), ...... , 소통과 명상, 활(活)과 할(喝∇)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종류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얘깃거리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무늬를 탐구, 즉 셀프 인문학(人紋學)을 진지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책 속의 시들은 독자에게 촉매이고 기폭제일 뿐이다. 어두워서 몰랐던 우리의 미주알고주알을 밝혀주는 기습 조명탄이다.

사소한 걸 위대하게

비록 책을 통한 간접적인 해후였지만 15년 만에 다시 만난 교수님은 그렇잖아도 훌륭했던 강의력이 한층 더 강력해지셨다. 본래도 종횡무진 동분서주하며 뻔하고 지루한 주제를 재미나게 변주시키고 확장하는 데 일가견이 있으셨음에도, 고속화된 네트워크 시대에 걸맞게 교수님의 능력 역시 한층 더 넓고 다양한 차원으로 승화된 듯했다.

독자에게 소개하려는 시의 소재나 주제의식 차원에서 티끌만한 연계성이 있고, 그 연계성이 유의미한 해석을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영화든, 클래식이든, 대중가요든, 회화든, 소설이든, 심지어 역사든 과학이든 철학이든, 한술 더 해 일상의 '욕지거리'든 간에 거침없고 막힘없이 강의의 도구 내용으로 활용됐다(문득 1학년 수업 때 운(韻)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엽기 가수'로 유명해진 싸이의 '새'를 언급하셨던 일이 생각난다. 당신이 직접 랩까지 하셨다면 아마도 그때 그 수업이 더 극적이었을 텐데).

문화의 각 분파에서, 학문의 각 분파, 나아가 생활 풍속 차원의 요소들까지, 이 땅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인간 '존재'의 이모저모를 밝히는 데 쓰인 셈이다.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평상시에 별 것 아니라 생각했던 우리 인간의 소소한 감정 하나하나들이 이렇게나 많은 의미들을 파생시킬 수 있는 것이었나 새삼 놀라게 된다.

어차피 도려낼 수 없는 거라면 품고 가라

책은 챕터별로 다양한 주제의식을 다루는 듯 보이지만, 그 뿌리에 뿌리를 추론하며 읽어 가면 근원점이라 할 만한 쟁점 하나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인간이 엄연한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소외감, 즉 '존재론적 소외감'이다.

곁에 누군가가 아무리 많아도,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제 아무리 전도유망한 사람도, 살다보면 누구나 - 불현듯, 막 - 본인이 무엇인가로부터 유리(遊離)되었다는 걸 느낄 때가 반드시 한번 이상 있다(라캉은 이걸 거울 단계 이론으로 설명하겠지만). 저자는 이를 섣불리 해부하려하지도, 해결하려 들지도 않는다.

다만 동서고금의 숱한 타자들을 불러오고 그들의 얘기를 곁들여주며 "너만 그런 건 아냐"라며 위로를 해줄 뿐이다. 그리고 그 끝에 살짝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때" 하고 제언을 해줄 따름이다. 그렇게 독자 한 명 한 명에게 본인만의 소외감과 조금 친해져보길 권유한다.

친해지면 덜 무섭고, 더욱 친해지면 내 것처럼 여길 수 있다. 어차피 도려낼 수 없는 거라면 품고 가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소외감이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심상이라면 도려내지 말고 품고 가는 게 어떠하냐는 식이다.

시시비비를 초월한 시비 걸기

물론 책 속에 밝히 정재찬 교수님의 견해를 추종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동의하는 바는 동의하는 바대로, 공감가지 않는 바는 그것대로, 조금은 까탈스럽게 선별해도 좋다. 아니 오히려 정 교수님은 독자가 그렇게 까다롭게 굴기를 더 바랄지도 모른다.

저자 역시 마지막 챕터 첫 장에서 "뻔한 시에 시비"를 걸어달라고 독자들에게 부탁한다. 시 해석과 시 감상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시시비비를 초월한 딴죽 걸기다. 교수란 이유로, 작가란 이유로, 이 땅위의 수많은 독자들은 그렇게 책 저자들의 권위에 짓눌려 자신의 취향과 소신을 '잊고 지낸'다. 권위에 의존하는 독서는 뻔하다. 권위에 굴종하는 독서도 뻔하다.

16년 전을 돌이켜보니 원래 교수님 강의 스타일도 그랬다. 이색적이었고 도발적이었다. 요즘 시쳇말로 아재 나이 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아재스럽지 않으셨고, 꼰대스러운 면모는 1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당신이 강의하시던 중 가끔씩 우리에게 질문도 하셨는데, 우리가 당최 아는 게 적어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차마 어린 대학생들에게 대놓고 질책하시질 못해 '벽과의 대화'를 시도하셨을까. 그만큼 의중을 밝히는 데 방식이 기발했던 분이었다.

이 책 안에서도 교수님의 뜻이 전후좌우 사방팔방 파격의 옷을 입고 넘실댄다. 우리는 그 춤사위에 한껏 유쾌하게 장단만 맞춰도 책을 읽은 보람은 차고도 남는다. 그러나 기왕 장단을 맞춰본 김에 그 기세를 타서 한번 나만의 리듬까지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누가 알까.

시를 잊고 지내느라 덩달아 잊었던 삶의 의욕이 되살아날지. 또, 그렇게 "새로운 리듬 속에 헛 믿음이 바"뀌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해봐야 안다. GD의 가사에 나온 말따나 "동네 양아치처럼"까지는 아니어도, 일단 한번 해보자. 내 삶의 괴로움에 "괜히 시비 걸어"!


시를 잊은 그대에게 -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정재찬 지음, 휴머니스트(2015)


태그:#시를잊은그대에게, #정재찬, #서평, #책소개, #책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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