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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한 포털사이트에 이색적인 실시간 검색어가 올라왔다. 올해 70년을 맞이한 '제주 4.3'이었다. 정확히는 '제주 4.3 사건'이라고 검색되고 있었다. 씁쓸했다. 문재인 대통령조차 추모제에 참석해 '제주 4.3'이라고 이야기하는 마당에 '사건'이라고 불리는 것이 맞는 것일까.

올해는 '제주 4.3' 70년을 맞이해 정명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노동자와 지역시민사회단체는 지난 3월 31일 제주시청에서 '4.3민중항쟁 70주년 정신계승 범국민대회'를 개최해 '백비'에 이름을 새기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들이 선택한 단어는 '4.3 민중항쟁'이었다.

기자는 지난 3월 말 4.3 동광리를 찾았다. 동광리는 정부기관의 수탈에 맞서 저항한 곳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 <지슬>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해방 전 일제에 대한 마지막 저항거점이었다. '이재수의 난'으로 기록된 역사 속 인물 이재수가 동광리 사람이었다.

4.3길은 찾는 이들을 안내해주고 있다.
▲ 큰넓궤로 가는 길 4.3길은 찾는 이들을 안내해주고 있다.
ⓒ 정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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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를 피해 '궤'로 도망쳤다"

기자가 찾아간 동광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을에는 4.3 당시 생존자가 살고 있었고, 불타버린 집터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정부기관에서는 4.3길을 만들어 당시 학살현장을 안내하고 있었고, 학살지로 향하는 길목마다 빨강과 흰색 띠가 사람들을 맞이했다.

1948년 겨울, 군인 등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해안선 5km 이상 구역은 적성 구역으로 간주하고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다. 동광리 무등리왓 마을은 제주 4.3의 첫 학살지다.

당시 11살이었던 홍춘호 할머니는 1948년 겨울,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마을 뒷산에 있는 큰넓궤로 숨어들었다. '궤'는 제주방언으로 '바위와 바위 사이의 공간'을 뜻한다. 아주 좁은 동굴 같은 곳이다. 화산지대인 제주도에는 곳곳에 '궤'가 많았다. '큰넓궤'는 지슬의 촬영지이기도 한 '도엣궤'와 연결되어 있다. 도망친 주민들은 40여 일 가까이 이곳에서 삶을 이어갔다.

"앞이 하나도 안 보여서 억쇄에 불을 붙여 그 불씨로 궤를 찾아 들어갔다. 먹을 것도 하나도 못 챙겨 왔다. 당시 아버지들은 해가 지면 밖으로 나가 조를 구해왔고, 맷돌에 갈아 헝겊에 싸서 범벅을 만들어 먹었다. 물은 돌에서 떨어지는 물을 빨아 마셨다. 여자들은 아버지들이 다니며 가시넝쿨에 해진 옷을 수선했고, 할아버지들은 신을 만들었다."

홍춘호 할머니가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 “토벌대를 피해 ‘궤’로 도망쳤다” 홍춘호 할머니가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 정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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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호 할머니가 전하는 당시 삶은 치열했다. 햇볕 한줌 들어오지 않는 궤에서의 삶은 11살 아이가 버티기에는 너무도 힘들었지만,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했다.

"짐승사는 것보다 못했다. 아버지한테 밤하늘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는데, 나가면 죽는다고 해 나갈 수도 없었다. 그래도 마을에 있을 때는 오늘 하루를 어찌살까 걱정했는데, 궤에 있으면 죽는 걱정은 덜했다."

하지만 '궤'에서의 삶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마을 사람 중 일부가 토벌대에 붙잡혔고, 협박에 의해 '궤'의 위치가 발각되었다. 궤에 남은 마을 사람들은 불을 피워 토벌대의 접근을 차단했고, 토벌대는 궤의 입구를 돌로 막고 잠시 후퇴했다.

"당시 궤의 위치를 알려준 사람들이 군인들이 가고 난 뒤 궤로 돌아와 돌을 치우고 '여기 있으면 다 죽는다, 나오라'고 했다. 몇몇은 '여기서 죽으면 까마귀밥은 안 되니 안 나가겠다'고 했고, 우리는 산으로 도망갔다."

당시 궤에서 나와 영실로 도망간 이들은 발자국 때문에 토벌대에 발각되어 다 잡혔다. 홍 할머니에 의하면, 토벌대는 잡은 마을 사람들을 대여섯 명씩 줄로 묶은 다음 정방폭포에서 떨어뜨려 수장시켰다.

그해의 겨울은 유독 추웠다. 산으로 도망친 이들도 모두 다 살아남지 못했다. 홍 할머니 동생들도 산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동백꽃은 제주4.3을 대표하는 꽃이 되었다. 모가지도 전부 떨어져도 또 다시 꽃을 피워내는 동백꽃은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불러오고 있다.
▲ 궤에 주변에 놓인 동백꽃 동백꽃은 제주4.3을 대표하는 꽃이 되었다. 모가지도 전부 떨어져도 또 다시 꽃을 피워내는 동백꽃은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불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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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는 인간의 자존감을 지키는 마지막 피난처"

큰넓궤까지 가는 길은 정비되어 있었다. 4월 3일이 다가와서인지 궤로 향하는 이들을 종종 마주칠 수 있었다.

현재 큰넓궤와 지슬의 촬영지인 도엣궤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열쇠로 잠귄 큰넓게와 도엣궤의 출입구는 어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저기 들어가면 숨이 턱턱 막힌다.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탁하다. 들어갈 때도 기어서 들어가야 한다. 나오고 나서도 속이 울렁거린다."

기자와 함께한 일행 중 한 명은 재작년에 큰넓궤를 들어가 본 경험을 전하며 궤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내심 기뻐했다. 그는 당시 일행이 30여 명 정도였다고 했다. 4.3 당시 이곳에 숨은 이들은 100여 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에도 좁고 숨 막히는 곳이었을 테다. 그럼에도 당시 마을 사람들은 궤에 들어가 숨는 것을 선택했다.

현재 큰넓궤와 도엣궤모두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한사람 정도 들어갈 정도의 입구이다.
▲ 출입이 금지된 궤 현재 큰넓궤와 도엣궤모두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한사람 정도 들어갈 정도의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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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왜 '궤'를 선택했을까.

우리를 안내한 김국상씨는 "궤는 인간의 자존감을 지키는 마지막 피난처"라고 말했다.

당시 제주도는 해방 이후에도 일제가 의도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해방 후 대거 유입된 인구로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에 더해 미군정에 의해 복귀한 경찰과 공무원들이 도민들을 대상으로 공출을 했고, 이에 응하지 않을 시 폭력도 불사했다.

삼밧구 마을 주민들도 궤로 도망쳤지만 이후 다 붙잡혀 정방폭포에서 묶여서 수장되었다
▲ 삼밧구마을은 어디갔나 삼밧구 마을 주민들도 궤로 도망쳤지만 이후 다 붙잡혀 정방폭포에서 묶여서 수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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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상씨의 할아버지도 공출로 인해 모든 것을 빼앗겼다.

"당시 할아버지는 일본 항구에서 일하며 모은 돈과 물자를 갖고 해방 후 제주도로 돌아왔지만 밀수품으로 모두 빼앗겼다. 당시 할아버지가 경찰에 항의하자 경찰은 '여기서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알아라'고 협박했다."

동광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동광리에서는 공출에 저항하며 경찰을 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최소한 궤에 들어가 숨어 있으면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물론 말도 안 되는 공출에 고통받지 않을 수는 있었다.

당시 살고자 하는 이들 중에는 도망친 이도 있었고, 토벌대에 협력한 이도 있었다. 각각 극단적인 상황이었지만, 이 상황 속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제주도에서 만난 어느 한 도민은 자신의 집안 내에 토벌대에 협력한 이와 토벌대에 죽은 이가 함께 있었다고 전했다. 최소한 궤에 있으면 이런 비극 또한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궤'는 4.3의 희생자들이 내일을 살고자 했던 피난처였다. 동시에 최소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인간적인 선택'이었다.

궤에는 여전히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 궤 입구에 놓여진 토기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 궤의 입구에서 발견되는 토기들 궤에는 여전히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 궤 입구에 놓여진 토기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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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울려 퍼진 "제폭구민 조국통일"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벌어진 일을 이야기한다. 1948년 4월 3일,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부를 주축으로 새별오름에 봉화가 오르고 도내 전역에서 350명의 무장 자위대가 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했다. 그날을 기준으로 '제주 4.3'이 되었다.

김국상씨는 당시 새별오름에 봉화가 오를 때 남로당이 외친 말은 '제폭구민 조국통일'이었다라고 전했다. 제폭구민은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함'이다. 폭력으로부터 국민을 구하고 조국을 통일한다는 말이다.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일제 잔재의 공출에 저항한 당시 시대상황과 맞아 떨어진다.

70년이 흘렀다. 세상은 확실히 많이 변했다. 제주도에는 경찰이 4.3항쟁 70주년 기념 현수막을 걸었고, 전국노동자대회를 찾은 정보과 형사는 제주 4.3의 상징이 된 동백꽃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숙제는 남아있다. 자유한국당은 4.3을 사태로 명명하고 무장폭동으로 시작되었다고 이념대결에 나섰다. 4.3은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누구는 사건이라 하고, 또 누구는 항쟁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폭동이라 한다.

이승만은 제주 4.3의 학살단체 중 하나였던 서북청년단을 찾아 '사상이 건전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고 독려했고, 당시 경무부장을 맡은 조병욱도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가해자를 명명백백 밝히지 못한 까닭에 제주 4.3은 피해자가 아닌 희생자만을 남겼다. 지난 2014년에는 해방 후 반공세력 척결이라는 목적 아래 설립된 서북청년단이 다시 나타났다. 서울 도심에서는 이념 갈등을 조장하며 '멸공'을 외쳐대고 있다.

제주4.3의 이름을 찾기위한 운동이 본격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이들은 4.3민중항쟁으로 명명했다.
▲ 제주4.3 정명하자 제주4.3의 이름을 찾기위한 운동이 본격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이들은 4.3민중항쟁으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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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상씨는 "화해는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할 때 하는 것이다. 당시 깊이 연루된 이들의 자손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을 볼 때 제주도민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겠냐. 제주도민들은 이념적으로 투철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조국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주 4.3을 한마디로 말해 달라는 요청에 고민 끝에 말을 전했다.

"4.3은 겨울이 아니라 봄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고목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또 새로운 삶을 위해 세상에 꽃을 피워야 한다. 마치 지금과 같이 봄이 오는 것처럼."

덧붙이는 글 | 민플러스에 중복게재됩니다.



태그:#4.3, #제주4.3, #제주 4.3, #지슬, #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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