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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과 임진강, 염하와 예성강까지의 물길을 표시했다. 바로 조강.
▲ 강화지도 한강과 임진강, 염하와 예성강까지의 물길을 표시했다. 바로 조강.
ⓒ 강화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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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중앙을 흐르는 민족의 젖줄 한강. 우리는 흔히 한강이 곧바로 서해로 빠져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강은 곧바로 바다로 가지 않는다. 임진강을 만나고 예성강을 만나 그 품을 더 크고 넓게 만든다.

조금 억지를 부리자면 강화해협인 염하(鹽河)를 더해 4개의 강이 만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의 강, 조상의 강이라는 뜻으로 조강(祖江)이 되어 비로소 바다와 합쳐지는 것. 지도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오랜 세월 이곳을 지키며 살아온 이들에게만 전해오는 강이다.

조강은 서울과 개성을 이어 주기도 하고 서해를 거쳐 수도인 서울로 가는 뱃길이 되기도 하니, 물길로는 사통팔달의 요충지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곳에 반드시 흔적을 남겼다. 이곳에는 연미정(燕尾亭)이 있다.

연미정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흐르던 물길이 유도(留島)를 경계로 남쪽과 서쪽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 모습이 마치 제비 꼬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강화도 동북쪽을 지키는 월곶진, 월곶돈과 함께 있다. 강화십경 중 하나다.

처음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해를 통해 한강으로 오르려던 배들이 이곳에서 닻을 내리고 물길이 바뀌길 기다렸다고.

역사의 현장인 연미정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 연미정(燕尾亭)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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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정은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1627년 1월, 후금 군사 3만여 명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입했다. 정묘호란. 황해도 남동쪽인 평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파죽지세. 임진강 이북 지역을 단숨에 장악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했다. 그러나 후금 역시 중국을 놓고 명과 대결해야 하는 처지에서 조선에만 병력을 놔둘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화의가 성립했으니, 바로 이곳 연미정에서다. 이른바 정묘약조.

전통적 우방이며 종주국이었던 명. 신흥 강국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절묘한 등거리 외교로 나라의 존립을 꾀했던 광해군은 숭명사대 대의명분을 앞세운 세력에 밀려 왕위에서 쫓겨 나고 만다. 인조반정. 인조는 자신을 왕위에 올렸던 바로 그 명분 때문에 후금의 침략을 받아 부랴부랴 강화로 도망을 쳤는데,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광해 역시 강화도에 부속된 섬 교동에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해야 할까.

중종은 1510년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 장무공 황형은 조선조명장록에도 오를 만큼 이름이 높았는데 만년에 연미정으로 와 소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후일 임진왜란 때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여 모두들 장군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순조 때 천주교 신자 5백 명 이상이 처형된 신유박해의 전말을 알리고 조선교회 재건책을 제시하는 백서(帛書)를 작성, 중국으로 보내려다 발각되어 처형된 '황사영 백서사건'의 황사영은 황형장군의 12대손이라고.

오른쪽 물길이 한강과 임진강이 합해서 염하(鹽河, 강화해협)로 흐르는 곳이고 왼쪽이 예성강 쪽. 강화만을 거쳐 교동도를 지나 서해로 들어 간다. 뒤쪽으로 보이는 곳이 모두 북한땅이다. 이곳이 바로 조강(祖江)
▲ 유도(留島) 전경 오른쪽 물길이 한강과 임진강이 합해서 염하(鹽河, 강화해협)로 흐르는 곳이고 왼쪽이 예성강 쪽. 강화만을 거쳐 교동도를 지나 서해로 들어 간다. 뒤쪽으로 보이는 곳이 모두 북한땅이다. 이곳이 바로 조강(祖江)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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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정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섬이 있으니, 머무르섬, 바로 유도(留島)다.

머무르섬(유도)은 육지에서 500여m 떨어져 한강하구 비무장지대 내에 위치한 무인도로, 월곶면 보구곶리 산 1번지와 2번지 두필지로 되어 있다. 이 섬은 까마득한 옛날 홍수에 떠내려오다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과 함께 '머물은섬→머루무섬'이 됐다고 전해온다. '머무루'가 변음(變音)되어 머머리, 머머루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유도(留島), 사도(巳島)라는 한자지명이 사용되기도 한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6·25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가 두 채 있었고 농사도 지었다고 한다. - <김포저널>, '강경구 전 시장의 우리고장 이야기 ⑭ 월곶면보구곶리(甫口串里) 2'


1996년 대홍수 때 황소 한 마리가 떠내려와 이곳 유도에 고립되었다. 표류 5개월, 하루하루 말라가는 소를 우리 해병대가 데려와 '평화의 소'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소는 제주로 장가가 천수를 다했다. 그런데 왜 구출하는 데 다섯달이나 걸렸을까? 아마도 비무장지대라서 통행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지금도 이 지역을 왕래하려면 UN기를 달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엄연한 우리 땅임에도 출입하려면 남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곳.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강화외성의 출입문인 6개의 문루(안해루, 공조루, 참경루, 진해루, 북파루, 조해루) 중 하나인 조해루. 2011년에 복원했다고. 안해루, 공조루, 참경루는 이미 복원되었고 갑곶진의 진해루는 2018년까지 복원하기로 했으니 이제 북파루만 남는 셈.
▲ 조해루 강화외성의 출입문인 6개의 문루(안해루, 공조루, 참경루, 진해루, 북파루, 조해루) 중 하나인 조해루. 2011년에 복원했다고. 안해루, 공조루, 참경루는 이미 복원되었고 갑곶진의 진해루는 2018년까지 복원하기로 했으니 이제 북파루만 남는 셈.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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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극복하기 위해 2007년 남과 북은 10.4선언을 통해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선언 5항에 다음과 같은 합의가 있다.

남과 북은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 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 합의가 제대로만 이행되었더라도 지금쯤 이곳은 그 옛날 수많은 배들이 오가던 할아버지의 강, 조상의 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남북의 교류와 협력, 민족의 화해와 평화에 큰 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10여 년을 헛되이 보냈다.

다행히 이달 말, 남북간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어 다시금 평화의 기운이 온 나라를 감싸고 있다. 부디 10.4선언 그대로 이곳 한강하구의 공동이용을 통해 민족의 번영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태그:#조강, #연미정, #유도, #104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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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분야는 역사분야, 여행관련, 시사분야 등입니다.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www.refd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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