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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소박하게나마 하고 싶은 일을 꾸려가며 사는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80년이 넘은 한옥과의 첫만남부터 고치고, 수선하는 과정을 담아갈 이 연재는 앞으로 공간의 완성, 그 이후 공간에서 만들어갈 일들을 담아낼 예정입니다. - 기자말

이전 집주인 어르신이 이사 가시고 난 집. 달력과 시계를 두고 가셨다. 2017년 10월에 멈춰 있는 저 달력은 몇 달 동안 텅 빈 집 저 자리에 걸려 있었다.
 이전 집주인 어르신이 이사 가시고 난 집. 달력과 시계를 두고 가셨다. 2017년 10월에 멈춰 있는 저 달력은 몇 달 동안 텅 빈 집 저 자리에 걸려 있었다.
ⓒ 황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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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구할 때 전 집주인을 몇 번 만날까. 그동안의 내 경험으로는 계약서 쓸 때 딱 한 번씩 만난다. 거래를 위한 대부분의 소통은 부동산 사무실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집은 달랐다. 집 밖에서 집의 위치와 겉모습을 몇 차례 살펴본 뒤 내부를 보고 싶다고 부동산 사장님께 연락을 했다. 집주인으로부터 '정말 거래할 의사가 있느냐'는 연락이 전해졌다. '살펴보고 마음에 들면 그럴 생각'이라고 답을 했다. 그제야 겨우 대문이 열렸다.

칠순을 넘은 어르신이 먼지가 뽀얗게 앉은 쪽마루에 신문지를 깔아주시며 코카콜라 캔을 내미셨다.

"탄산음료는 잘 안 마시는..."

사양의 말을 꺼내려는 순간, 부동산 사장님이 어깨를 '툭' 치셨다. 오기 전에 들은 충고가 떠올랐다.

"다른 양반한테 들었는데, 그 집 어르신이 다른 부동산에서 더 비싼 값에 팔아주겠다고 연락 받고 고민 중이시래요. 가셔서 어쨌든 어르신 맘에 들게 잘 하세요."

집 사고파는데 면접을 보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부동산 사장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랬다. 아파트는 지역 부동산에 매물 정보가 공유된다. 단독주택은 여러 군데 내놓으면 서로 빨리 팔기 위해 부동산에서 아무래도 집값을 깎으려 든다. 매물의 시세가 정확하지 않아 부르는 게 값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처음 집을 내놓을 때는 한 군데만 내놓고, 거래가 급할 때만 여러 군데 내놓는다. 동네 자체가 들고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빌라나 원룸 전월세 거래는 많아도 오래된 집 매매 거래는 많지 않다. 이 집 주인 어르신은 급할 게 없었다. 다만 나이 들어 이 집을 건사하며 살기가 번거롭고 귀찮아 팔고 나가고 싶을 뿐이셨다. 집 살 사람이 맘에 안 들면? 안 팔면 그만이었다.

'세상에 그런 거래가 어디 있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쨌거나 거래를 성사시키려는 공연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분위기가 그게 아니었다. 아차, 싶었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 코카콜라를 처음 마시는 것처럼 달게 마셨다. "어디 사는 뉘시냐"는 질문을 받은 것은 매우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몇 마디 나누는 사이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서울에서 차를 타고 세 시간 반 가까이 가야 하는 지역이고, 나이 들어서는 서울에서 살다 직장 따라 경기도 신도시로 이사한 뒤 3~4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노라는 이야기를 술술술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어르신 눈에 나는 뜨내기였다. 본인으로 말씀하시자면 종로에서 태어나 종로에서 자라 종로에서 나이든, 평생 종로구민이셨다.

"도시가스는 문제 없나요? 방범은 잘 되나요? 쓰레기 수거는 어떻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답은 하나로 일관됐다. 여기는 대한민국 1번지 종로, 총리 공관이 있는 종로, 제일 안전한 종로, 좋다는 건 무조건 제일 먼저 오는 종로. 살기 좋은 종로. 누구라도 한 번 들어오면 절대 안 나가는 종로. 거기에 더해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종로라는 첨언도 잊지 않으셨다.

오래된 한옥이 빛나는 순간. 지금은 볼 수 없는 무늬의 유리창. 시간이 쌓여 있는 흔적. 나는 모르지만 저 문은 알고 있을 이 공간의 기억.
 오래된 한옥이 빛나는 순간. 지금은 볼 수 없는 무늬의 유리창. 시간이 쌓여 있는 흔적. 나는 모르지만 저 문은 알고 있을 이 공간의 기억.
ⓒ 황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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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사장님도 역시 종로에서 나고 자라 학교를 다니고 여기서 결혼하고 자식 낳아 사는 평생 종로구민이셨다. 이미 한 동네에서 얼굴 보고 산 세월이 한참 되신 두 어르신이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종로는 지역이 아니라 신분 같기도 했다. 면접을 잘 본 덕분인지 어르신은 앉은 자리에서 계약을 언제 할 거냐고 물으셨다.

나의 집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오래된 한옥 몇 채가 모여 있다. 다들 몇십 년 이웃으로 함께 살아왔노라 하신다. 이사온 지 얼마 안 된 바로 옆집만 빼고.

"옆집은 이사온 지 얼마나 되셨나요?"
"이제, 한 10년 넘었나?"

집주인 어르신을 그후로도 몇 번을 더 만났다. 계약서 쓸 때, 중도금 치를 때, 현황측량이라는 걸 할 때, 잔금 치르기 전 대수선 방향 고민할 때, 잔금 치를 때, 이사 나가실 때. 그렇게 몇 번 뵈면서 지난 겨울 부친을 떠나보내신 것, 여기에서 자식 낳고 키우신 것, 이 방에서 누가 살았고, 저 방에서 누가 살았다는 것, 화장실은 언제 고쳤고, 부엌은 언제 입식으로 바꿨다는 것, 수석 모으는 게 취미시라는 것, 동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양도성으로 가깝게 갈 수 있다는 것, 평생 다닌 성당에 이사하고 난 뒤에도 다니실 거라는 것, 아침마다 헬스를 다니시고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서 다닌다는 것, 주차는 어느 집 대문 앞이 평생 당신 자리였으니 물려주시겠다는 것.....

이 집이 한낮에 볕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화초를 키울 때 어느 방향으로 놓으면 좋은지까지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다른 부동산에서 싸게 판 거라고 자꾸 말해서 속상하다고 말씀하실 때면 괜히 그러시는 것이려니 싶었는데, 그게 이 집을 떠나게 되며 느끼는 시원섭섭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잔금을 치른 뒤 어르신의 사정에 따라 보름 정도 늦게 이사를 나가셨다. 아파트 거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르신과 나 사이에 이 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사를 나가실 때 정든 집을 떠나는 어르신의 심정이 어떨지 가늠하니, 마음 한쪽이 저릿하기까지 했다. 값을 치르고 산 집인데, 어르신께 물려받은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이 집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잘 살겠노라 다짐을 했다.

"집이 다 지어지면 꼭 모실게요."
"배 아파서 안 올 거야."

2017년 10월. 평생 종로구민이셨던 어르신은 이제 성북구민이 되셨다. 아들네 다니러 가실 때 빼고는 살아본 적 없다는 아파트 생활을 시작하셨다. 집이 다 지어진 뒤 볕 좋은 날 한 번 따로 모실 생각이다. 어르신의 건강을 빈다.

고색의 창연이란 이런 것. 이 기둥도, 이 주춧돌도 다 좋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낡고 허름해 보일 이 한옥의 구석구석이 내게는 그저 좋기만 했다.
 고색의 창연이란 이런 것. 이 기둥도, 이 주춧돌도 다 좋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낡고 허름해 보일 이 한옥의 구석구석이 내게는 그저 좋기만 했다.
ⓒ 황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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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사진을 찍은 황우섭은 주로 인물과 건축물을 찍는다. 사람도 건물도 기교와 치장 대신 있는 그대로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는 걸 좋아한다. 오래된 것에 집착하고, 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것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산티아고 순례와 나오시마 여행의 기록을 사진으로 남긴 단행본이 국내에 출간되었고, '조병수 건축사무소' 전속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찍은 사진이 영국 'Thames&Hudson'에서 펴낸 조병수 건축가의 작품집 『BYOUNG CHO』의 표지 및 본문에 실렸다.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되었다.(https://blog.naver.com/hyehwa11-17)



태그:#작은한옥수선, #한옥, #한옥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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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일을 오래 했다. 지금은 혜화동 인근 낡고 오래된 한옥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 그곳에서 책을 만들며 살고 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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