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쪽 벌판에는 유채꽃 단지가 조성되어 해마다 4월 초에 노란 유채꽃밭이 월성의 벚꽃과 조화를 이룬다.
▲ 4월 초의 월성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쪽 벌판에는 유채꽃 단지가 조성되어 해마다 4월 초에 노란 유채꽃밭이 월성의 벚꽃과 조화를 이룬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신라 초기 박혁거세가 신라를 다스리던 어느 날, 서라벌 동쪽 토함산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중 '기골이 장대하여 천하무적 장사'(<삼국유사>의 표현 그대로이다)인 듯한 인물이 성 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지 보다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를 발견하고 점찍었다.

'석탈해'로 불리던 이 인물이 산을 내려가 집터에 가보니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호공이라는 신라의 유력자였다. 사실 알고 보면 토함산 정상부에서는 남산과 대덕산, 명활산 산줄기들에 가려서 오늘날의 경주 중심부는 물론 지금의 월성터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야기는 토함산에서 바로 경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것처럼 서술해서 경주 시내 가까이 붙은 산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경주 시내 중심부와 토함산의 거리는 꽤 멀다. 멀기 때문에라도 잘 보이지 않는다.

스토리를 만들어내려면 좀 더 팩트에 근거해야 하는데, 이 스토리를 처음 만든 사람은 토함산에 실제 올라가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대에 토함산이 신라의 오악(五嶽) 중 하나인 동악(東嶽)이 되고 탈해가 동악의 신으로 추앙받으면서 탈해와 토함산을 연계하여 굳이 이렇게 스토리로 만든 것 같다.

어쨌든 탈해는 호공의 집 주변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어 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호공의 집에 가서 호공의 집이 옛날 자신의 조상이 살던 집이라며 집을 내놓으라고 우겼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아 기가 막힌 호공은 아니라고 하며 다투었다. 탈해가 끝까지 우기자 결국 관청에 소송을 내어 결판을 내게 했다. 관청에서 탈해에게 물었다.

"이 집이 네 집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겠느냐?"
"우리 집은 원래 대장장이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이웃 마을에 나가 사는 동안 저 사람이 빼앗아 살게 된 것입니다. 지금 땅을 파서 조사해보면 아실 겁니다."

탈해가 워낙 태연하고 유창하게 답변하자 관청에서 그 말대로 땅을 파보았더니 숫돌과 숯이 나왔다. 대장장이였다는 말이 증명된 셈이어서 탈해는 소송에 이겨 호공의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뻔뻔한 짓이었지만, 탈해는 서라벌에서 가장 좋은 집터 중 한 곳에서 사는 데 성공하게 된다.

기록에 남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소송 사건은 이렇게 사기꾼(?)이 남의 집터를 빼앗는 데 성공한, 대단히 부정적인 사례로 남게 된다.

본래 탈해의 집터가 궁성이 된 월성 내부. 현재 건물이나 유적지가 없어 비어 있는 느낌도 준다. 사진은 11월 초의 월성 풍경
▲ 월성 내부 본래 탈해의 집터가 궁성이 된 월성 내부. 현재 건물이나 유적지가 없어 비어 있는 느낌도 준다. 사진은 11월 초의 월성 풍경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수록된(<삼국사기>에서는 간략하게 기록)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탈해의 조상이 대장장이였다는 것은 탈해 집단이 철제 무기를 스스로 만들고 이를 앞세워 정복 전쟁을 하는 군사 집단이었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석탈해로 대표되는 한 이주민 집단이 철기를 앞세운 무력을 기반으로 서라벌의 일부 지역을 차지하며 정착, 신라의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탈해는 후에 신라 왕이었던 남해왕의 사위가 되며, 이를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착실하게 힘을 축적한 뒤 호공의 후원 하에 왕이 되는 데 성공한다. 자기 집을 빼앗긴 호공이 나중에 탈해를 돕게 되는 이유는 기록이 없어 불분명하지만, 복잡한 정치적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정치판에서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경우가 흔하니 말이다. 어쩌면 호공에게 상당한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탈해 사후에는 다시 박씨 왕이 등장하지만, 결국 석씨 집단은 벌휴왕 대에 이르러 비로소 세습 권력을 구축하며, 이후의 왕계는 탈해의 후손인 석씨 집단이 한동안 이어나간다.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아 자리 잡은 초승달 모양의 집터, 그곳에 파사왕대부터 신라의 궁궐이 들어서게 되는데, 바로 월성이다.

그러니 월성은 본래 석씨 집안의 거주지로 기능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궁성으로 사용되었고, 시설과 성벽을 보강하면서 본격적인 왕궁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월성 내부에는 월성 전체를 걸어서 돌 수 있는 성벽길이 있다. 이 길가에는 4월 초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 월성 내부 월성 내부에는 월성 전체를 걸어서 돌 수 있는 성벽길이 있다. 이 길가에는 4월 초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천년 신라의 왕성, 월성

신라 천년의 수도가 경주였다면, 신라 천년의 왕성은 '월성'이다.

본래의 명칭은 월성이지만, 전체적인 모양새가 반달의 형태를 띠고 있어 일반적으로 반월성이라고도 불리었다. 또 보기에 따라서는 초승달 모양이니 역사서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집터라고도 표현했다.

경주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치우쳐 있는 월성은 명실공히 신라의 궁궐이 있던 곳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파사 이사금 22년(101)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이름 짓고, 국왕이 금성으로부터 거처를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월성을 쌓은 뒤부터 신라 왕들은 잠시 명활산성에 머문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이곳에서 거처했다. 그러므로 이곳은 신라 역사의 중심이요, 신라 수도의 중심이 되는 장소였다.

후에 가면 이 월성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동궁(오늘날 동궁과 월지 구역, 과거에 안압지라 불리던 구역)이 들어서고, 신라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북쪽으로 확장되면서 궁궐의 공간도 월성을 넘어 북쪽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어쨌든 중심은 멸망하는 그날까지 월성이었다.

월성 남쪽에는 남천이 흘러 천연의 해자를 형성한다.
▲ 월성 남천의 가을 월성 남쪽에는 남천이 흘러 천연의 해자를 형성한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지금이야 오랜 세월 속에 퇴락하여 흙도 무너져 내리고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작은 언덕처럼 보이지만, 본래 월성은 흙과 돌을 섞어 쌓은 토성이었다.

성 안쪽에도 지금은 건물 하나 없고 일부 지역은 잔디로 덮여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무성한 수풀이 자라고 있으나, 당시에는 왕궁과 주요 관청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언덕 능선에는 가파른 성벽이 당당하게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벽 아래에 있었던 해자(적군의 접근과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용 물웅덩이)도 일부가 복원되어 당시의 모습을 일부 보여주고 있다.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 쪽에서 월성으로 갈 경우 이 해자를 볼 수 있다.

월성의 성벽 전체 길이는 1.8km에 이르는데, 높이는 남쪽이 다소 낮다. 성벽과 바로 붙어 있는 남천이 자연 해자의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것 같은 작은 하천이지만, 당시에는 수량이 제법 됐을 것이다.

올해 2월 1일부터 상시 개방 중인 월정교. 2층 누각 형태의 화려한 모습이다.
▲ 최근에 복원한 월정교의 야경 올해 2월 1일부터 상시 개방 중인 월정교. 2층 누각 형태의 화려한 모습이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이 남천을 건너는 다리로 일정교, 월정교가 있었는데, 월정교의 경우 작년(2017) 가을에 일시 개방했다가 마무리 공사를 거쳐 올해 2월 1일 일반에게 상시 개방되었다. 4월에 정식 준공한다. 야경이 좋다고 벌써부터 야경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현재 월성 안쪽으로 들어가면 석빙고가 남아 있는데,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는 조선 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던 시설로, 원래는 월성 서쪽에 있던 것을 1741년(영조 17)에 옮겨서 지은 것이다.

월성 내의 석빙고는 신라 때가 아닌,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 월성 석빙고 월성 내의 석빙고는 신라 때가 아닌,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월성은 흔적만 있고 당시의 모습은 알아볼 수 없으므로, 성 안에 들어서면 상상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천년의 도읍지 중에서도 왕궁이 있던 성, 그 안에 있던 궁궐과 수많은 관청들, 성을 둘러싼 당당한 성벽, 그 아래의 해자, 주변의 사찰과 고분들과 동궁, 월지를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한 덩어리로 어울렸던 당시의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둘러보자. 

4월 초 봄날의 월성

월성은 4월 초~중순 봄날의 여행지로도 좋은 곳이다.

길이 1.8km의 월성 내부에 들어서면 그 옛날의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넓은 잔디밭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그리고 서울의 몽촌토성처럼 잔디 위를 뛰노는 아이들, 학생들과 가족, 친구 단위의 객(客)들이 곳곳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낸다.

한창 신라 때는 화려하고 섬세한 여러 건물들이 있었을 빈터. 건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월성 능선을 따라 하얀 벚꽃이 군락을 이루어 좋은 산책길이 된다.
▲ 월성의 벚꽃 월성 능선을 따라 하얀 벚꽃이 군락을 이루어 좋은 산책길이 된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해마다 4월 초에 이 성 안에서 자라는 벚꽃은 하나의 작은 숲을 이루고 있어 방문한 이들에게 하얀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이처럼 편안한 벚꽃이라니. 녹색의 잔디와 어울려 싱그럽고 쾌활한 느낌을 준다. 혹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다 바람에 벚꽃이 떨어질 때면, 이 벚꽃이 소복이 하얀 이불을 만들어 주리라.

월성은 성 능선을 따라 전체를 걸어보는 게 좋다. 성을 따라 벚나무가 잘 발달되어 있고, 인공적이되 지금은 전혀 인공적으로 보이지 않는 2000년 역사의 가파른 경사진 면에 하얀 군락을 이룬 모습은 자못 감동적이다.

특히 남천 쪽 성벽에는 남천을 따라 벚꽃이 발달하여 그 안에 조용히 파묻히면 경주 시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하다.

4월에 월성에 온 사람들은 유채꽃밭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4월 초에 벚꽃이 먼저 절정기를 보내고 뒤이어 유채꽃이 만개한다.
▲ 월성과 유채꽃 단지 4월에 월성에 온 사람들은 유채꽃밭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4월 초에 벚꽃이 먼저 절정기를 보내고 뒤이어 유채꽃이 만개한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이런 월성 바깥 북쪽 넓은 벌판에는 벚꽃과 어울려 노란 유채가 피어난다. 관광객들 볼거리를 위해 조성된 대단위 유채꽃 단지는 4월 초부터 중순에 걸쳐 월성을 두르고 있는 벚꽃과 어울려 따뜻한 색채의 조화를 이룬다. 유채꽃이 벚꽃보다 약간 늦다.

이 유채꽃 단지는 여름에는 연꽃이 피어나는 습지 공원이 된다.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만들어주고 산책과 사진 촬영의 명소가 되도록 한 것이지만, 유적지 일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좀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현재 월성 북쪽 일부에서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공양의 의미를 담은 듯한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고, 해자에서 신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목간과 동물 뼈, 각종 식물 씨앗이 나오기도 했다.

동궁과 월지 입구에서 건너다보는 월성 입구에 해자가 복원되어 있다.
▲ 월성 주변의 해자 동궁과 월지 입구에서 건너다보는 월성 입구에 해자가 복원되어 있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한편, 현재 서울 고궁박물관에서는 '프로젝트전 월성' 전시가 4월 8일까지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전은 2014년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월성 발굴조사의 성과를 예술 작품으로 표현한 예술 작가들의 독특한 전시회이다. 레고로 만든 발굴 현장과 레고와 토우의 조합 작품들, 월성 발굴 현장을 적외선 카메라와 3차원 입체(3D) 카메라 등으로 촬영한 사진 작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여행 정보]

* 경부고속도로 경주IC→경주 시내로 진입, 남천을 건너 인왕동 사거리에서 좌회전, 7번 국도를 따라 직진하면 우측에 동궁과 월지(안압지), 좌측에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 옆에 낮은 언덕처럼 빙 둘러쳐져 있는 토성이 월성이다.

* 주차의 경우 월성과 동궁을 가로지르는 월성로 길가에 주차선이 이어져 주차가 가능하지만,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금방 자리가 찬다. 그 외 월성에 직접 연결된 주차장은 없으므로, 동궁과 월지(안압지) 주차장과 국립경주박물관 주차장, 그리고 대릉원 정문 앞 주차장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 경주는 시내 전체가 역사 유적지인 만큼 시내버스 체계가 잘 되어 있다. 경주역, 혹은 경주고속버스터미널, 경주시외버스터미널 등에서 11번, 600번대 버스 등 여러 시내버스를 이용해 동궁과 월지(안압지) 입구에서 내려 월성으로 걸어 들어간다.

* 월성은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시간 통제도 하지 않지만, 어두워지면 위험할 수 있으므로 들어가지 않는다.

* 식사는 대릉원 주변의 관광객 상대 식당들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쌈밥정식집들이 많고, 황남빵에서 비롯된 경주빵집들, 보리빵집들이 많다. 한 끼 식사할 만한 괜찮은 쌈밥집들이 제법 있다.

대릉원 주변에 먹을 만한 쌈밥집들이 많다. 사진은 경주 쌈밥집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풍녀구로쌈밥의 쌈밥정식
▲ 경주의 쌈밥정식 대릉원 주변에 먹을 만한 쌈밥집들이 많다. 사진은 경주 쌈밥집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풍녀구로쌈밥의 쌈밥정식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태그:#월성, #반월성, #탈해, #월성 유채꽃단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