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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 김낭규, 송태휘 부부
ⓒ 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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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평화공원에 위패를 올리지 못한 분이라고 해서 그간의 경위를 듣고 싶었습니다.
"4.3희생자 명단을 올리라고 해서 처음에는 위패를 올렸습니다. 저는 너무 기뻐서 일본에 사는 남동생, 고모들을 불러 같이 추모제에 참석하고 감격했지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 때 4.3위원회에서 설득하길 "(아버지)김대진씨는 신고철회를 해도 희생자니까 공원 위패는 건들지 않을 것"이라며 철회서를 받아갔습니다.

다음해에 제주4.3 평화공원에 가서 아버지 위패를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떼어버린 겁니다. 울며 내려오는데 4.3위원회 직원을 만났어요. "가서 보니 위패도 어서라(없더라). 어떵된거냐(어떻게 된 거냐), 너 말만 믿고 도장 찍어줬는데. 우리 아버지는 살아서도 갈 데가 없더니 죽어서도 갈 데가 없구나, 이것이 평화의 섬, 평화의 나라냐. 뭐가 평화냐"고 악을 썼습니다.

그이도 같이 엉엉 울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거예요. 그 사람도 위패까지 뗄 줄은 몰랐다고 해요. 4.3중앙위원회에서 결정을 내리고 실무작업은 그 사람을 시킨 거죠. 3일간 울다가 꼭 미칠 것 같은데, 마침 4.3특집 방송에서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하라고 하길래 전화로 사정을 얘기했더니 다음에 연락한다고 끝냅디다. 방송은 '뽄'만 내는 디주(모양만 내는 곳)이더군요. 그 후로 밭에 가면 매일 울었죠. 남편 오면 뭐라 할까 봐 돌아서고, 자면서도 울고."

-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저의 아버지는 신촌초등학교 교장 대리 겸 교사였어요. 일제 말기에 징병을 가게 되니까 군인 갔다가 죽으면 어떵허코 허연(어떻하지 해서) 가기 전에 결혼을 시켰죠. 해방을 맞고 3.1절 행사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들 불러다 태극기를 밤새 만들어 작은 방에 천장 가득 대미고(쌓아놓고) 그걸 마차로 싣고 갔는지까지는 몰라도 3.1절 기념식(*1947년)에 가져갔어요.

그 후 어머니가 슬픈 표정으로 다니고, 동네 사람들은 분주히 오고 가고 했어요. 아버지가 경찰서에 잡혀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래도 그때는 며칠 안 살고 나온 것 같은데, 그 후 집에서 마음 놓고 주무시질 못하는 겁니다. 갈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산으로 갈 수밖에요. 아버지가 저쪽 사상이라면 왜 태극기를 만듭니까? 암만 생각해도 우리 아버지가 공산당이라는 말은 인정할 수가 없어요."

신촌마을 이웃집에서 다함께 찍은 사진. 첫쨰 줄 왼쪽 세 번째가 김낭규 씨를 임신한 모친, 뒷줄 왼쪽 검은 학생복 입은 남성이 김낭규 씨의 부친 김대진 씨.
▲ 친척과 동무들이 함께 찍은 사진 신촌마을 이웃집에서 다함께 찍은 사진. 첫쨰 줄 왼쪽 세 번째가 김낭규 씨를 임신한 모친, 뒷줄 왼쪽 검은 학생복 입은 남성이 김낭규 씨의 부친 김대진 씨.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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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아버지 시체를 전시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나요? 시신은 거둘 수 있었는지.
"조천지서에서 잠깐 세웠다가 제주시 관덕정 마당 옆 경찰서에 보금지(호주머니)에 숟가락 끼워서 세웠다고 헙니다. 보고 온 동네 어른들이 어느 여자 눈물 안 흘린 사람이 없다고 하대요. 친척이 시신은 어영(*지명)에 가서 불태워버렸다고 외할아버지에게 알려줬어요. 외할아버지는 조그만 곽을 짜서 밤중에 곱안 간(숨어서 가서) 뼈영(하고) 가루영(하고) 담아 당모루(*신촌의 야트막한 오름) 어머니 옆에 묻었습니다. 난 두 살 남동생을 업고 그곳 만 보면 울음이 나서…. 작년에 입도 할아버지 묘에 이장했습니다."

(남편 : 신기한 것이 그때 조천지서에 산 사람시체 전시한다고 해서 달려갔어요. 이마에 총을 맞았는데 핏기가 없고 얼굴이 파랗고 깨끗했어요. 그래도 시체를 보는 순간 겁을 집어먹었어요. 그분이 내 장인이 된 거지요)

- 그 후 4.3추모제 행사에는 안가셨나요?
"다신 이놈의 4.3행사에 안 온다 하며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산소에 들려 업더졍(엎어져서) 울다가 왔습니다. 추모제에 갈 생각은 없으나 우리 집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자수운동 때 죽은 유족, 전봇대 지키다 죽은 친척들이 있으니까 마음먹고 가지요. 아니 갈까 하다가도 영혼이 있으면 '무사(왜) 넌 안 오느냐' 할까 봐 가게 됩니다."

- 살면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나요?
"조천리에 시집가니 아버지 초등학교 동창 여자분들이 살아계셨어요. "너 대진이 딸이냐, 아이고, 너 아버지는 대통령이라도 할 사람인디 시국을 못 만나서" "그 사람 살아시민 제주도에 별 몇 자리가 떨어질 건데" 그런 말을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우대받은 생각을 하면 '난 똑 선생안티(에게) 시집가주(가야지)' 마음먹었는데 선생 각시(아내)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당신 혼자 잘 살려고 헌 일도 아니고, 아버지는 누구 살리젠(살리려고) 그 파싹언디 강(몹시 추운 곳에 가서) 얼고 배고프게 고생하고 고통받은 생각 하면 앞이 캄캄하고 산에도 가고 싶지 않지요. 그 눈 위에서 고생헌 생각하면 집에서 총 맞아 죽는 게 낫지요. 산에 가면 우리 아버지가 여기나 곱아나신가(숨었던가), 여기나 의지해서 좀 쉬었을까 그런 생각부터 납니다. 중학교 진학은 못 했지만 아버지 자식으로 부끄럽지 안 허려고 동생 보다가도 자기 전에는 꼭 한자라도 한 자 써 두고 잤지요. 부모 욕 뵈우지 안 허젠(안하려고)."

부친이 징병 나갔을 때 가족사진을 보내달라고 요청해, 온 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 오른쪽 두 번째 어머니 무릎에 앉은 아기가 김낭규 씨.
▲ 가족사진 부친이 징병 나갔을 때 가족사진을 보내달라고 요청해, 온 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 오른쪽 두 번째 어머니 무릎에 앉은 아기가 김낭규 씨.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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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동생들은 어떻게 살았나요?
"내 밑에 5살, 3살 남동생이 둘, 갓 난 여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여동생은 어머니가 수용소에서 낳은 아기인데, 아기 낳고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 총살되니까 동네 유모에게 한 달에 보리쌀 세 말 주기로 하고 맡겼습니다. 그 쌀도 몇 달 지불하지 못해서 아기를 큰어머니댁에 데려왔어요. 흐린좁쌀(차조) 쪄서 베에 짜 미음으로 먹이며 키우는데, 어느 날 초저녁부터 울다가 잠을 자다 보니 아기가 그냥 죽어있었어요.

큰 남동생은 나이 좀 먹었다고 친척 집에 보내고, 나는 3살 터울 남동생과 외할머니 집에서 살았습니다. 두 남동생은 좀 크니까 큰아버지가 사는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작은 남동생은 나와 같이 사니 그래도 행복했고, 큰 남동생이 친척 집에서 고생하고 일본에서도 고생고생하다가 대장염으로 몇 해 전에 죽었습니다. 제가 일본 가서 동생 손 잡고 '내가 열 살만 되었어도 아맹이나(어떻게든) 너를 보내지 않고 집도 있고 밭도 있으니 살아 볼걸. 그때 나도 여덟 살이니 해볼 도리가 없었노'라고 하니 죽어가는 아이가 말은 곳지(하지) 못하고 엉엉 울어요. 작은 남동생은 잘 삽니다. 동생도 일본에서 아버지 생각하면 아무렇게나 살지 못해서 성공했노라고 해요."

(남편 : 부모하는 일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이시카마시(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좀 모자란 사람이지요.)

4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자 남편(송태휘씨, 84세) 분은 나를 데려다주시겠노라 운전대를 잡았다. 두 내외가 살기 꼭 맞춤한 집에 생활하시는 모습을 보며, 귀향을 꿈꾸는 나는 큰 힌트를 얻은 느낌이었다. 1월호에 인터뷰했던 김진언(작고) 할머니 집은 너무 정갈하고 단출해 내가 흉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30년 동안 만난 4.3 체험의 여성들은 거의 혼자되신 분들이었다. 헤어지면서 두 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마운 마음은 뭐라 말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느꺼운 감정이 밀려오면서 나도 답례를 드렸다. "저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오늘까지 의연하게 살아주셔서..."라고. 드물게 만난 의좋은 노부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양성자씨는 제주4.3연구소 이사입니다. 이 글은 제주4.3 범국민위의 <4370신문> 3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제주4.3, #제주4.3유족,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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