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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 내 기념관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4.3사건의 희생자들.
▲ 제주4.3사건의 희생자들 제주4.3평화공원 내 기념관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4.3사건의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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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2013년 12월 발간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적힌 4.3의 정의다.

그동안 제주도를 5~6차례 방문하면서도 단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곳, 바로 제주4.3평화공원이다. 어쩌면 제주4.3평화공원은 제주 관광코스를 계획하면서 단 한번도, 일행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곳이었기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쉽게 접근하기에는 무거운 곳이었다.

또한 제주4.3을 대한민국의 아픔이라고 하지만 뭍이 아닌 섬 이야기이기에 그동안 도외시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기회가 생겼다. 제주4.3사건 70주년을 앞두고 한국언론진흥재단 광주지사에서 제주4.3사건만을 주제로 한 현장연수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낯설었던 제주4.3사건을 배운다는 설렘과 함께 아픈 역사를 살아온 유족과 아픔이 깃든 역사현장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겼다.

제주4.3, 사건이냐 항쟁이냐 개념 모호… 특별법 개정안에 담겨야 할 내용은?

지난 21일 눈 덮인 제주4.3평화공원 모습. 이곳에서 오는 4월 3일 10시 70주년 추모제가 열린다.
▲ 70주년 추모제가 열릴 제주4.3평화공원 지난 21일 눈 덮인 제주4.3평화공원 모습. 이곳에서 오는 4월 3일 10시 70주년 추모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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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공원 앞 마당에 마련된 제70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 행사장. 눈 덮인 행사장은 흔한 모습이 아니라며 사진에 담아두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말에 여지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 70주년 추념식이 열릴 제주4.3평화공원 행사장 4.3평화공원 앞 마당에 마련된 제70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 행사장. 눈 덮인 행사장은 흔한 모습이 아니라며 사진에 담아두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말에 여지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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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시샘하는 함박눈이 내린 현장연수 첫날인 지난 21일 제주 4.3평화공원도 하얀 세상으로 변했다. '기억의 복원 70년 제주4.3'이라는 연수 주제답게 첫날 일정은 제주4.3을 이론적으로 배우는 시간이 마련됐다.

특히, 제주발전연구원의 문순덕 책임연구원의 다크투어리즘에 강의에 이은 허호준 한겨레팀장의 제주4.3의 전반적인 이해와 관련된 강의에서는 제주4.3으로 학위까지 받았다는 허 팀장의 박진감 넘치는 사건전개와 더불어 제주4.3에 대한 진지한 토론도 전개됐다.

골자는 제주4.3이 '사건'이냐 '항쟁'이냐, 또는 '사태', '봉기'냐는 개념 정립의 문제였다.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함께 연수에 참가한 전남타임즈 김양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는 "5.18광주민주화운동처럼 명칭을 놓고도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전제한 뒤 "제주4.3도 4.3사건, 사태, 항쟁, 봉기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데, 현지주민들은 제주4.3사건으로 불리는 게 낫다고 보는지, 아니면 항쟁이나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게 나은지?"라고 논제를 던졌다.

허 팀장은 제주4.3과 관련해 "탄압에 맞섰던 싸움이었지 않느냐며 항쟁이라는 표현들이 설득력을 많이 얻고 있다”면서 “당장 오늘, 내일 4.3항쟁이다, 4.3학살이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제주4.3의 성격규정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허호준 한겨레기자 허 팀장은 제주4.3과 관련해 "탄압에 맞섰던 싸움이었지 않느냐며 항쟁이라는 표현들이 설득력을 많이 얻고 있다”면서 “당장 오늘, 내일 4.3항쟁이다, 4.3학살이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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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허호준 한겨레 팀장은 "제주4.3 특별법에는 제주4.3 사건으로 표현돼 있다. 제주4.3 사건의 정의는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사건이라 한다고 되어 있지만 단지 사건의 정의일 뿐이라는 얘기가 많다"면서도 "그러나 민주화운동 이전 지난 40~50년 동안 이뤄져온 제주4.3의 성격 규명은 폭동이요 반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화 투쟁 이후에 잠깐 4.3항쟁으로 불리기도 했었고, 진보 역사학계에서는 제주4.3을 항쟁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면서 "한편에서는 폭동, 항쟁, 학살 세 가지를 놓고 지난해에 제주4.3 평화재단에서 설문지를 돌렸는데, 제주도 그렇고 전국적으로도 '학살'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도 덧붙였다.

허 팀장은 또한 "광주와는 결이 다른 게 제주4.3에서는 제주의 현장연구자들과 서울의 연구자들의 의견이 조금씩 다른데, 서울에서는 역사가의 눈으로 볼 때는 당연히 항쟁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사건의 원인을 보면 오래 지속적이고 탄압에 맞선 항쟁이었지 않냐. 그걸 단지 남로당위원회가 좌파그룹이 무장봉기를 일으켜서 그런 것이지 그걸 당연히 항쟁이라는 논리를 편다"고도 했다.

허 팀장은 또 "범국민위원회라든가 4.3 70주년을 계기로 뭉쳐진 단체들이 역사의 정명찾기에 나서고 있는데 정명에서는 탄압에 맞섰던 싸움이었지 않느냐며 항쟁이라는 표현들이 설득력을 많이 얻고 있다"면서 "당장 오늘, 내일 4.3항쟁이다, 4.3학살이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동학도 동학농민전쟁으로 정형화되기까지 100년이 걸렸다"며 성격 규정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제주4.3 특별법 개정안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기자는 "2000년도에 4.3특별법이 제정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 특별법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특별법 개정안의 핵심 요구안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에 허 팀장은 "특별법 개정의 핵심은 피해배상"이라고 전제한 뒤 "특별법에 피해배상이 빠져 있다. 피해배상이 가능할까에 대해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진보보수 대통령 후보를 막론하고 피해 배보상을 하겠다고 했다. 심지어 홍준표 대표까지도"라면서도 "하지만 피해 배보상 하겠다는데 천문학적인 예산이 문제다. 희생자가 1만5000명, 유족으로 결정된 게 5만명이 넘는다, 희생자에 대한 피해 배상이 특별법 개정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지만 지금 현재 이번 특별법 정부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개정안 통과가 어려워 보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제주4.3평화기념관부터 섯알오름까지… 아픔의 현장을 가다

제주4.3의 제대로 알기를 마친 곧바로 본격적인 제주4.3사건 유적지 탐방길을 시작했다.

4.3평화기념관 내에 설치돼 있다. 백비 앞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백비를 설치한 이유가 적혀 있다.
▲ 4.3백비 4.3평화기념관 내에 설치돼 있다. 백비 앞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백비를 설치한 이유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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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제주4.3사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조성된 제주4.3평화공원을 둘러봤다. 입구부터 눈에 띄는 조형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4.3 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백비를 설치한 이유가 적혀 있다. 백비란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고.

제주4.3사건의 유족들이 그날의 증언을 하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기념관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의 한 장면.
▲ 증언 제주4.3사건의 유족들이 그날의 증언을 하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기념관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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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전역이 불에 타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내 기념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상의 한 장면.
▲ 초토화 작전 영상 제주전역이 불에 타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내 기념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상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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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를 지나 4.3 역사의 역동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기념관 중간중간 영상을 통해 흘러나오는 피해유족들의 생생한 증언이 발길을 붙잡았다. 또한 4.3사건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영상 또한 눈길을 사로잡았다.

1948년 11월 17일 참혹한 초토화작전에 불을 당긴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이라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명의의 계엄령 관련 문서도 아픈 역사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토화 작전과 민간인 대량학살을 표현한 원통형의 하얀방. 죽음의 다양한 형상들이 벽에 부조물로 표현되어 있는데 보기만 해도 학살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1948년 11명의 민간인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한 동굴인 다랑쉬굴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특별전시관은 4.3사건을 겪은 민간인들의 피난생활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의 모습 속에서 학살상황까지 엿볼 수 있었다.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UN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 미국과 4.3당시 미군정의 책임규명 위한 진상조사해야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UN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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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은 평화‧통일‧인권의 상징입니다'라는 비침글과 함께 희생자들의 사진으로 꾸며진 마지막 전시공간을 지나 평화기념관을 나오자 몇 몇 사람들이 서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UN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이었다. 그 이유는 제주4.3이 미군정 시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미군이 모든 진압작전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의 공식사과와 더불어 4.3당시 미군정의 책임규명을 위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제주4.3사건의 기폭제가 된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주변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달려들자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총상을 입는다. 바로 이 부분 과연 누구의 지시로 총이 발포가 됐는지도 규명되어야 할 부분이며, 미국으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하는 대목인 것이다.

북촌리 서모봉 일제 동굴진지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일제가 자살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서모봉 등사면에 조성한 동굴진지다.
▲ 북촌리 서모봉 일제 동굴진지로 가는 길 북촌리 서모봉 일제 동굴진지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일제가 자살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서모봉 등사면에 조성한 동굴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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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기념관을 나와 이번에는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들의 한이 맺혀있는 현장으로 향했다. 제주4.3사건 당시 조부 등 3명의 혈족을 잃은 이상언 제주4.3유족 전 청년회장이 안내했다. 함께 걸은 북촌마을 4.3길은 올레길 코스로 많은 트레킹족들의 발길이 오가는 곳이었지만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4.3희생자들의 한이 서린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 고스란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309호 지정돼 있는 북촌리 서모봉 일제 동굴진지를 가는 길은 험난했다.
▲ 밭줄 잡고 사다리타고 등록문화재 제309호 지정돼 있는 북촌리 서모봉 일제 동굴진지를 가는 길은 험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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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일제가 자살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서모봉 등사면에 조성한 동굴진지다.
▲ 콘크리트 구조물로 형태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일제의 동굴진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일제가 자살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서모봉 등사면에 조성한 동굴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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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일제가 자살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서모봉 등사면에 조성한 동굴진지다. 근대문화유물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다.
▲ 일제 동굴진지 출구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일제가 자살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서모봉 등사면에 조성한 동굴진지다. 근대문화유물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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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밭길을 따라 해안가로 내려가야 볼 수 있는 북촌리 서모봉 일제 동굴진지는 등록문화재 제309호 지정돼 있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이곳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일제가 자살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서모봉 등사면에 조성한 동굴진지다. 실제 들어가보니 꽤나 잘 팠다. 진출입로도 분리돼 있다. 물론 이곳에도 민간인을 강제동원했을 게다.

제주4.3사건의 자취를 따라 걷는 북촌마을 4.3길.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출발한 4.3길은 서우봉 일제 동굴진지를 거쳐 북촌마을 일대를 순회하는 트레킹 코스로 잘 조성돼 있다.
▲ 북촌마을 4.3길 제주4.3사건의 자취를 따라 걷는 북촌마을 4.3길.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출발한 4.3길은 서우봉 일제 동굴진지를 거쳐 북촌마을 일대를 순회하는 트레킹 코스로 잘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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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훈련 하듯 동굴진지를 빠져나와 다시 줄을 타고 북촌마을 4.3길 투어를 계속 이어갔다. 마을길을 따라 마지막 도착지인 북촌초등학교를 향했다. 북촌초등학교는 1949년 1월 17일 새벽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하자 그 보복으로 마을사람들을 집결시켜 놓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 사격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곳이다.

북촌주민 참사현장인 북촌초등학교 위령비 앞에서 묵념을 올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북촌에서의 4.3발자취를 따라간 다크투어리즘을 마무리했다.

북촌마을 일대 제주4.3을 주제로 한 다크투어리즘 안내를 자처한 이상언 전 제주4.3유족 청년회장이 북촌마을의 아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가해자들의 기록도 발굴해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북촌초등학교에 세워진 제주4.3비와 이상언 전 제주4.3유족 청년회장 북촌마을 일대 제주4.3을 주제로 한 다크투어리즘 안내를 자처한 이상언 전 제주4.3유족 청년회장이 북촌마을의 아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가해자들의 기록도 발굴해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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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초등학교 위령비 앞에서 취재진을 안내한 이상언 전 제주4.3유족 청년회장은 "제주4.3사건의 해결을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게 진상규명인데, 희생자들은 증언을 하는데 가해자들은 양심선언도 있지만 윗선, 즉 미국, 이승만 정부, 당시 2, 9, 11연대장, 명령받아 수행했던 장교들 등은 증언도 하려하지 않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면서 가해자들의 기록도 발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유족들은 뭘 바라는 것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면서 "배상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 응어리진 한이 풀릴 것이다. 후보 시절 찾았던 문재인 대통령도 올해는 꼭 올 것 같다. 70주년이 뜻깊은 해가 될 것 같다"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일제의 침략야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모슬포와 섯알오름

조형물 뒤로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가 보인다. 알뜨르에는 일제의 전투기를 감추기 위해 시설된 당시의 격납고 38개소 중 현재는 20개소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의 조형물 조형물 뒤로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가 보인다. 알뜨르에는 일제의 전투기를 감추기 위해 시설된 당시의 격납고 38개소 중 현재는 20개소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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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뜨르비행장으로 사용되던 모슬포 일원에는 아직도 20개의 비행기 격납고가 온전하게 남아있다. 뒤로는 산방산이 보인다.
▲ 모슬포 일원에 널려져 있는 일제 비행기 격납고 알뜨르비행장으로 사용되던 모슬포 일원에는 아직도 20개의 비행기 격납고가 온전하게 남아있다. 뒤로는 산방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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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살아'가 변형돼 모슬포가 됐다는 4.3의 또다른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제주 대정읍 상모리 일원. 제주4.3 현장 탐방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제주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로 찾은 모슬포 일원은 일제의 비행장이 위치했던 장소답게 아직까지도 비행기 격납고와 섯알오름 정상에는 고사포 진지가 일제 강점기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기록에는 1950년 7월 16일 해병 모슬포부대 5중대 2소대 분대원과 같은 해 8월 20일 해병3대대 분대장급 이상 하사관들에 의해 두차례에 걸쳐 민간인이 희생된 곳이다.
▲ 만벵듸 영령 희생터(왼쪽)와 백조일손 영령 희생터 기록에는 1950년 7월 16일 해병 모슬포부대 5중대 2소대 분대원과 같은 해 8월 20일 해병3대대 분대장급 이상 하사관들에 의해 두차례에 걸쳐 민간인이 희생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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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다크투어리즘의 한 코스인 이곳은 특히 백조일손지묘에 묻힌 영령들이 발굴된 곳으로 제주4.3에서는 꽤 의미있는 현장이다. 기록에는 1950년 7월 16일 해병 모슬포부대 5중대 2소대 분대원과 같은 해 8월 20일 해병3대대 분대장급 이상 하사관들에 의해 두차례에 걸쳐 민간인이 희생된 곳이다.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시설로 1945년 원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섯알오름 일제 고사포진지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시설로 1945년 원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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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사에 따르면 섯알오름 후면에 위치해 있는 일제 동굴진지는 식량 보관용으로 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붕괴위험이 있어 안전 시설물을 설치해놓았다.
▲ 섯알오름 일제 동굴진지 해설사에 따르면 섯알오름 후면에 위치해 있는 일제 동굴진지는 식량 보관용으로 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붕괴위험이 있어 안전 시설물을 설치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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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추모비를 지나 섯알오름 정상으로 향했다. 일제의 잔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고사포 진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일제가 창고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제 동굴진지도 그 모습이 남아있는데 이곳은 제주도내 동굴진지 가운데 동공의 크기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입구도 6곳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알뜨르에는 아직도 일제의 전투기를 감추기 위해 시설된 당시의 격납고 38개소 중 현재는 20개소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 알뜨르비행장 일제 전적지 알림판 알뜨르에는 아직도 일제의 전투기를 감추기 위해 시설된 당시의 격납고 38개소 중 현재는 20개소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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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제의 비행기 크기와 같은 모형비행기 조형물이 격납고 내에 설치돼 있다. 알뜨르에는 일제의 전투기를 감추기 위해 시설된 당시의 격납고 38개소 중 현재는 20개소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당시 일제의 비행기 크기와 같은 모형비행기 조형물이 격납고 내에 설치돼 있다. 알뜨르에는 일제의 전투기를 감추기 위해 시설된 당시의 격납고 38개소 중 현재는 20개소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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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이 구조물은 비행통제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쪽으로는 비행기 활주로도 추정되는 넓은 들판도 옛 모습으로 남아 있다.
▲ 비행통제소로 추정되는 구조물 현지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이 구조물은 비행통제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쪽으로는 비행기 활주로도 추정되는 넓은 들판도 옛 모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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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 아직도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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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에서 내려와 모슬포 알뜨르 일제 비행기 격납고로 향했다. 이 시설 역시 견고했다. 아직까지 그 형태가 완벽할 정도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모형으로 경비행기까지 격납고에 설치하니 일제 강점기 당시의 모습이 그려졌다. 기록에는 알뜨르에는 일제의 전투기를 감추기 위해 시설된 당시의 격납고 38개소 중 현재는 20개소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러한 비행기 격납고 등과 관련해 제주 모슬포 일대 4.3유적지를 안내한 문화관광해설사는 "대정읍 상모리 알뜨르 비행장 등 일본이 패망 후 남기고 간 땅을 제주도로 돌려줘야 하는데 국방부 땅이 돼 버렸다면서 "지금도 투쟁 중인 가운데 정부는 빌려 줄 테니까 사용하라고 하는데 제주에서는 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1950년대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사법적 절차없이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132명의 영혼이 잠든 곳이다. 특이하게 위령비 상단에 태극기가 새겨있다. 그 이유는 유족들이 이제라도 국가의 보호를 받고 싶다는 의미로 태극기를 새겨 넣었다고 해설사는 설명했다.
▲ 백조일손지묘 1950년대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사법적 절차없이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132명의 영혼이 잠든 곳이다. 특이하게 위령비 상단에 태극기가 새겨있다. 그 이유는 유족들이 이제라도 국가의 보호를 받고 싶다는 의미로 태극기를 새겨 넣었다고 해설사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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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사법적 절차없이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132명의 영혼이 잠든 곳이다. 봉분이 작은 이유는 땅을 충분히 구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 백조일손지묘 1950년대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사법적 절차없이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132명의 영혼이 잠든 곳이다. 봉분이 작은 이유는 땅을 충분히 구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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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은 마지막으로 백조일손지묘를 찾았다. 1950년대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사법적 절차없이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132명의 영혼이 잠든 곳이다. 작은 봉분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에 의문이 갔다. 이에 대해 해설사는 땅을 구입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묘의 봉분이 작고 가깝게 붙여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의문을 풀어줬다.

특이한 점은 위령비 상단에 태극기를 새겼는데,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자 해설사는 "유족들이 이제라도 국가의 보호를 받고 싶다는 의미로 태극기를 새겨 넣었다"고 설명했다.

일제의 흔적에서부터 제주 민간인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4.3사건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는 이를 다크투어리즘이라는 신개념 관광패턴을 추진하고 있다.

모슬포 일원 4.3유적지 등 제주도의 다크투어리즘을 연구하고 있는 제주발전연구원 문순덕 책임연구원은 "여행의 새로운 주제로 떠오른 다크투어리즘은 단순히 비극적 사건과 장소를 확인하고 기억하는 방문으로 접근하는 것을 지양하고 역사적, 교훈적 의미알기에 초점을 두어 경건한 마음자세로 접근할 수 있도록 주변시설과 공간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올해로 70주년을 맞는 제주4.3사건의 현장연수를 마치면서 무고한 민간인 학살의 대현장이었던 제주의 아픔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었다는데 큰 의미를 찾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가슴에 달린 동백꽃 배지를 바라보며 제주4.3의 진상규명과 미국의 사과, 그리고 특별법 개정을 통한 피해유족들의 피해배상 문제까지 하루빨리 해결되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제주4.3 유적지 탐방은 지난 21일부터 23일까지 한국언론진흥재단 광주지사의 현장연수 프로그램으로 진행됐습니다. 제주4.3사건 특별법 개정과 진실규명이 하루빨리 실현되길 기대해봅니다.



태그:#제주4.3사건, #제주4.3평화공원, #모슬포, #섯알오름, #알뜨르비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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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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