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조상연

관련사진보기


사실 아버지가 알고 보면 대단한 사람이야. 지하철 20개 역 40분 출근만 하면 돈 쓸 곳도 없는데 다달이 통장으로 돈이 꼬박꼬박 들어오니 신나는 일이요, 길가에 버려진 화분의 바짝 마른 꽃을 보면 시 하나 뚝딱 나오니 이건 또 얼마나 신기한지 몰라. 누워서 고향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나 만년필로 낙서하듯 써 내려가면 근사한 수필 한 편 나오는 건 일도 아니야.

아버지가 쓴 글 중에 나름대로 아끼는 글이 있는데 고향 친구 태숙이 이야기가 그렇고 '모란동백'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글이 그래. 모란동백 글은 네 동생 '현우'도 인정하는 글이지. 아버지가 준 아이패드에 실시간으로 글이 올라오기 때문에 네 동생은 항상 아버지가 어떤 글을 쓰는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고 있단다.

하나만 묻자. 속 모르는 남들은 아버지를 두고 낭만주의자라고 한다만 네가 보기에 아버지의 삶이 어떠하냐? 언젠가 네가 그랬지. 회사에서 '존경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설문조사에 남들은 이순신 장군 신사임당 세종대왕을 써냈는데 너만 당당하게 '우리 아버지'라며 존경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써냈다고.

국어학자 양주동 박사가 자신을 일컬어 '국보'라고 했지만 그분이야 그럴만한 분이고 아버지의 이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알려주랴? 바로 너희들이 아버지를 대하는 모습이다. 세상에 자식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몇이나 된다고? 아버지처럼 자식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세상에 꿀릴 일이 무엇이랴?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네 말에 뛸 듯이 기뻤고, 그 일이 있은 뒤로 아버지는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았으며 너희들을 이토록 사랑했노라 글로서 남기고자 결심을 했다. 아버지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네가 사준 노트북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글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내 딸도 자식들에게 낭만적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으면, 그 자식들이 나도 엄마처럼 살아야지 할 수 있도록 신나게 살았으면, 자식들이 잠 안 올 때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잔다는 상상만 해도 금방 잠이 드는 그런 엄마가 되었으면..."

이왕 글쓰기 얘기가 나왔으니 아버지가 아끼는 글 하나 붙여둔다. 너의 증조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있어 종교나 다름없는 그런 분이었느니.

-

구절초와 눈물

중학교 다닐 적 1시간 거리를 걸어 다녔다. 학교는 다니기 싫고 시골의 할머니는 보고 싶고 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었으리.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조그만 깡통 하나를 발로 툭 툭 차가며 어떻게 해서든지 그 깡통을 집까지 가지고 왔다.

깡통을 차고 다니는 일은 나에게 있어 엄숙한 종교의식이었다. 깡통을 손 안 대고 발로 차가며 집까지 데려와야만 방학이 오고 시골의 할머니를 볼 수 있다는 묘한 신념이 생겼다. 학교에서 집까지 1시간 거리가 때로는 시간 반으로 늘어나기도 했는데 그건 순전히 깡통이라는 종교의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들꽃을 보기란 하늘의 별 보기처럼 어려웠다. 집에서 한참 내려오면 안정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에 가면 들꽃이 지천이었다. 자연스럽게 안정사는 내 놀이터가 되었고 조그만 들꽃을 보며 온종일 놀았다.

대웅전 돌계단 밑 구절초를 한참 바라보다가 심심하면 대웅전 뒤뜰에 있는 몽당빗자루로 구절초 주위를 말끔하게 쓸어놓기도 했는데, 하루는 절에서 제일 나이 많은 스님이 빗자루 들고 서 있는 나를 불러세웠다.

"그 꽃이 뭐라고 그렇게 쓸고 닦고 하노?"
"……."
"말 안 하면 그 꽃 뽑아버린다."
"우리 할머니가 입는 치마 색깔하고 같아서……."

순간,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 빗방울 속에는 내 눈물도 섞여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몇 날을 고열에 시달렸고 결국 구절초가 꽃잎을 떨구기 시작할 즈음 뼈만 남은 초췌한 모습으로 시골의 할머니 품에 안기고서야 신열은 가라앉았다. 개학을 하고 할머니와 헤어져 돌아올 때는 방앗간집 손자답게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었다.

▶ 해당 기사는 모바일 앱 모이(moi) 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모이(moi)란? 일상의 이야기를 쉽게 기사화 할 수 있는 SNS 입니다.
더 많은 모이 보러가기


태그:#모이, #아버지와딸, #시집, #편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편안한 단어로 짧고 쉽게 사는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http://blog.ohmynews.com/hanast/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