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영화 <소공녀> 메인포스터

영화 <소공녀> 메인포스터 ⓒ CGV아트하우스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한 편의 영화에서 조연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주연 캐릭터의 캐스팅, 무게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과는 다른 지점의 물음이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물론, 작품에 따라 다르다는 대답이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평소에 조연 캐릭터들은 문자 그대로 조연에 지나지 않는 대우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흔히 활용되는 신스틸러(Scene stealer)라는 단어에도 그런 애환은 충분히 묻어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감독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조연 캐릭터는 단순히 몇몇 장면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고운 감독의 작품 <소공녀>에서도 가장 많은 장면을 책임지고 있으며,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단연 주연 캐릭터인 미소(이솜 분)다. 이것은 주연과 조연의 활용을 언급하기 전에 주연인 인물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부분이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그런 조연의 활용에 있다.

02.

영화의 시작과 함께 미소는 살던 집을 떠나 떠돌이 신세가 된다. 곧 월세가 오를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직후다. 그렇다고 그 집이 좋은 집이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난방이 되지 않아 겹겹이 옷을 껴입지 않고는 긴 겨울을 버텨낼 수도 없는 곳. 가사도우미로 근근이 하루를 버티는 미소에게 월세 상승은 생존권을 위협당하는 일이었다.

집을 나오자마자 학창 시절 밴드를 함께 했던 친구들의 집을 찾아가 돌아가며 신세를 지고, 답례로 달걀 한판과 가사노동을 제공한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가장 철없던 시기의 친구들이 이 영화의 조연들이다. 그들 모두는 지금 사회의 젊은 세대들을 대변하는 것이자 꿈을 잃고 현실에 묶여버린 이들의 군상이다.

문영(강진아 분)은 링거를 맞아가면서까지 회사 일을 시달리고, 현정(김국희 분)은 가망도 없어 보이는 남편의 공무원 시험을 뒷바라지하며 시부모를 모시고 산다. 대용(이성욱 분)은 떠나버린 아내를 잊지 못한 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밤마다 술과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남편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면서 돈 많은 남편을 만나 아들을 낳는 게 '생의 구원'이라 말하는 친구 정미(김재화 분)도 있다.

 영화 <소공녀> 스틸컷

영화 <소공녀> 스틸컷 ⓒ CGV아트하우스


03.

그들의 활용이 여기에서 그친다면 이 작품의 조연들도 단순히 이 사회를 조명하는 장치로 활용되는 것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이들 조연의 역할은 미소라는 인물과 결합하며 한 걸음을 더 내디딘다.

그 전에, 미소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리 가난해도 담배와 위스키, 남자친구인 한솔(안재홍 분)만은 포기할 수 없는 그녀. 반대로 이야기하면, 미소라는 캐릭터는 이 세 가지만 주어질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의 가격이 차례로 오르기 시작한다. 미소가 대학 시절의 친구들을 찾아가는 건 그런 이유다. 미소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동인이 여기에서 얻어진다. 외부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로 인해 획득한 재화를 활용하여 삶을 이어가는 것이 힘들어지자, 삶을 이어가는 것 자체를 노동력과 맞교환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 지점까지 오롯이 주인공인 미소의 시선을 내러티브 속에 담는다. 직접적으로 미소의 시선을 통해 영화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영화 속 모든 선택은 미소의 심리와 맞닿아있다.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살기에 과거에 함께 시간을 보냈던 멤버들의 삶도 그러하리라 생각하던, 그 출발선부터 말이다.

04.

영화 속 조연들이 입체적으로 그려지며 미소의 삶을 강조하는 데 활용되고, 시종일관 미소의 시선으로 그려지던 영화가 조연 각각의 삶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은 미소가 화자가 아니라 청자로 활용되면서부터다. 어떻게 보면 집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미소가 그들에게 하소연해야 할 것만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다. 미소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미소에게 자신의 삶에 채워지지 못한 것들을 하소연한다.

그리고 미소는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다. 지금 자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 청소와 함께 말이다. - 미소가 자신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이들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청소를 해주고 한 끼 식사를 지어주는 행위는 감독이 작품 속 조연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동일하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따뜻함을 잃지 않는 것. 섣불리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다고 그들의 모습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 그들의 아픔을 듣는 모습과 더불어 청소를 통한 그들의 회복을 돕는 행위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처럼 여겨지던 미소의 삶을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닌 자신의 선택이라 해석하게 만든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버린 그들의 삶과 가진 것은 없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켜나가는 미소의 삶이 어느 한쪽을 포기하고 다른 한쪽을 얻은 선택의 문제로 동등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영화 <소공녀> 스틸컷

영화 <소공녀> 스틸컷 ⓒ CGV아트하우스


05.

물론,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의 경향을 따르지 않고 취향을 고집하는 일이 녹록할 리 없다. 감독은 이 지점을 미화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던 이 작품이 후반부에 이르러 록이(최덕문 분)의 아버지 장례식을 비춤과 동시에 지독한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이전까지 이 영화의 매력은 각박한 현실 속에 자신의 몸을 숨길 작은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시간을 담보했지만, 저당 잡혀있던 그 시간조차 말라버렸던 소녀의 이야기.

하지만 그런 그녀가 바둥거리지 않는 게 슬프면서도 좋았고, 손에 쥐어진 수표는 당당히 내치면서도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하는 외사랑 – 위스키, 담배, 남자친구 – 앞에 굴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 모인 조연들의 대화를 통해 이 사회의 진짜 무서움은 소공녀의 삶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녀를 대하는 타인들의 태도라는 것을 이 영화는 정확히 짚어낸다.

영화 속 모든 조연들은 정작 그녀가 곁에 있을 때조차 자신의 어려움만 토로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다. 각자 자신의 삶만으로도 버거워 그랬다고는 하나 그녀의 세계에는 발을 들이려 하지 않던 이들이다. 모두를 떠나 보내고 난 뒤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라면, 마지막 순간에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다리 위의 그녀 모습이 더욱 씁쓸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말로는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직접 찾아보려고는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미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06.

전고운 감독은 비싼 집값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기 십상인 도시 서울에서 느낀 사회 구조에 대한 의문과 영화적인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을 이 작품 <소공녀>에 더했다고 한다.

물론 영화 속 미소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행동이 현실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런 영화적 표현들은 무엇을 선택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과 관련한 부분까지도 말이다.

스스로의 취향을 지키기 위해, 작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실현 가능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남긴 물음이다.

영화 무비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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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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