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사람들에게 태국 영화는 생소하다. 아니, 생소했었다. 그가 2000년도에 <정오의 낯선 물체>로 혜성처럼 등장하기 이전까지.

어떤 만인의 삶,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태국의 예술 영화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태국의 예술 영화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 영화의 전당




아피찻퐁의 영화는 미쟝센과 미쟝센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영화는 논리적인 서사와 이미지의 도식들이 합쳐지지 않고 형용사의 형태로 존재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영화를 보며 영상미를 떠올린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처럼 현실의 것을 반영하거나 오즈 야스지로처럼 정교한 사물의 배치를 유도하거나 벨라 타르처럼 느리고 급격하지만 유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일 테다. 보통 소설의 언어가 문자이고 영화의 언어가 카메라인 것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카메라의 시선은 그 영화 자체가 어떤 시선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아피찻퐁의 언어는 뚜렷이 지칭되는 인칭 대명사나 명사나 보조사나 수사와 술어가 아닌, 그저 형용사일 뿐이다.

아피찻퐁의 카메라는 그 자체로 현실을 보여주기보단 어딘지 모르게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무언의 시선을 보여준다. 그의 카메라는 위에서 아래를 보지도 않고 아래에서 위를 보지도 않는다. 사선 또한 없으며 정말 정직하게 정면과 측면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자주 목격하는 대각선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배제해 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대각이란 정면과 측각의 중간에 있기에 애매한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대각이란 장면에 역동성을 배가하고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사실 그러한 카메라 워크가 인물의 이동을 반영하는 것이지 카메라로 인해 인물이 변화하는 것은 아닐 테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영화 속의 인물은 단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화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한 장면, 여담으로 이 영화는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들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영화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한 장면, 여담으로 이 영화는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들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 도호


그 부분에 관해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전반에 걸쳐 관찰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의 작품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에서 산 하나를 두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얼빠진 부하 2명의 모습은 화면 안에서 대각선으로 관측되는데, 그것은 그들을 잡는 카메라가 정면에서 평평함을 유지함으로써 암시되는 화면 밖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대장격인 무사의 시선과 대비된다. 화면 안에서는 역동적이나 화면 밖은 평탄함으로 하나의 장면에서 둘 이상의 효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영화에 영리하지 않은 관객이 자칫 오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영화에 답이 없으니 오인이란 없겠으나,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감독이 내세우는 기준이 있기 마련이므로 그러하다.

물론 아피찻퐁의 영화에 대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대각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선의 시선이나 혹은 말 그대로 눈을 옆으로 돌려 째려보는 듯한 쇼트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소수에 불과하다. 아마 당신은 그래도 그 장면이 있기에 위에서 아피찻퐁의 영화에 대각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은 어폐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피찻퐁에게 대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진다. 아피찻퐁의 영화에서 대각은 그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 쇼트가 아니라 그들을 화면 밖에서 바라보는 우리의 것이거나 혹은 그 영화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관객을 상정하고 삽입된 것이다. 아피찻퐁 영화에서는 거의 대부분 정말로 신비한 존재가 나타나게 되며 그것은 <엉클 분미>에서 나타난 원숭이 인간이나 <열대병>에서 정글의 신으로 묘사되는 호랑이의 시선이다. 그들이 존재하는 곳은 정글이며 우리는 정글 속을 탐험하는 등장인물 혹은 신비한 존재들을 위에서 아래로 관조하는 듯한 절대자의 시선, 그리고 그 정글 사이에서 인물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그 쇼트가 우리의 것인지 아니면 바라봄을 당하는 그들의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영화 <엉클 분미>의 작품 포스터

영화 <엉클 분미>의 작품 포스터 ⓒ 킥 더 머신


그러니까 아피찻퐁의 영화에서 대각은 유령의 시선이다. 그것은 유령이기에 애초에 없는 것으로 치부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있다. 그것이 바로 유령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령이란 비과학적인 것으로 증명되지는 않으나 분명 우리가 인식하고 겪은 현상이다. 현실이 아니라 현상이다.

굳이 이 문장을 반복한 것은 그것이 아피찻퐁의 영화를 표현하는 문장인 탓이다. 아피찻퐁의 영화에서 간간이 등장하는 대각들은 현실 어딘가에서 갑작스레 고개를 쳐드는 유령의 존재를 상정하는 듯하다. 그 유령은 영화 밖에 있는 우리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스크린 속 태국의 열대 정글은 신기루 속 오아시스처럼 묘사되나 그들이 실존한다면 반대로 스크린 밖의 우리가 유령처럼 보일 것이므로 그렇다. 우리가 연극을 볼 때 객석에서 배우들을 보지만 배우들은 무대 밖의 우리가 마치 없는 것처럼, 그러나 그들이 진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아피찻퐁 영화의 문제는 바로 그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과 우리 중 누가 정말 유령인가. 아피찻퐁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러 유령은 영화적으로 볼 때 분명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들은 영화 내에서 이야기 진행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은 채 그저 그곳에 나타나기에 설명을 듣지 않은 우리는 그저 당황스럽기만 하다.

아피찻퐁 영화가 극도의 최면성을 지닌 것은 바로 그러한 면에서 등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피찻퐁 카메라는 그들 유령을 정말로 실존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잡아내는데, 시퀀스 사이의 공백에 무언가를 기입해 완성된 서사로서의 안정감을 얻으려던 우리는 마침 눈에 띈 그 유령을 그 자리에 기입하게 된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논리성을 완성하게 되어 이 영화는 정말로 이상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이상함은 우리가 기존의 영화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의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보지 못한 새로운 지평선을 발견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지평선 너머에는 신대륙이 있는 것일까? 현실의 관객과는 다른, 스크린 속의 또 다른 관객이 정말로 있는 것일까?

 영화 <열대병>의 작품 포스터

영화 <열대병>의 작품 포스터 ⓒ 킥 더 머신


아피찻퐁 영화에서는 시퀀스 사이에 정말로 존재의미가 없는 듯한 혹은 우리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시퀀스나 장면이 삽입되고, 그러한 불특정성에 어느 순간 우리는 이 영화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된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결코 영화라는 여행의 여행자나 혹은 낯선 태국 정글의 탐지자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아피찻퐁의 영화에서 어떠한 분석작업도 해낼 수가 없다. 단지 눈에 비치는 그대로 호랑이는 호랑이이며 원숭이 인간은 원숭이일 뿐이다.

영화 내에서 갖은 수사어가 붙은 그들, 이를테면 정글의 수호신인 호랑이와 정글 속에 숨어 사는 원숭이 인간의 존재는 영화 속에서 합리화되나 우리에게는 아니다. 그들은 우리 현실에 존재하게 되는 순간 유령처럼 치부되며, 이러한 유령들 사이에서 추가로 동성애자가 유독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현실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으리라 여기는 건 아닐지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물론 가장 현실적인 답변은 감독 본인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영화 작가로 인정한 이상 그의 배경적 사실조차 영화의 한 부분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영화가 현실의 치부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측면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생각을 투입할 여지를 허용치 않는다. 측면이란 옆구리와 같으며 옆구리는 신체에서 가장 약한 부분 중 하나이다. 옆구리는 허를 찌르는 것이며 그것은 손이 닿는 가슴과 얼굴과는 달리 방어하기 힘든 곳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측각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아피찻퐁의 영화가 이끄는 방향대로 흘러가게 된다. 그것은 이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눈을 움직이듯 시선의 매끈함을 의미한다. 그러니 어쩌면 그것을 치부를 그대로 보여주기보단 그러한 매끈함 속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우리에게 내비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열대병>의 한 장면

영화 <열대병>의 한 장면 ⓒ 킥 더 머신


물론 그러한 이끌림에는 단지 카메라 워크가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만은 않는다. 아피찻퐁의 영화에는 분명 언어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러한 언어는 우리가 익숙하게 맞이하는 조합이 아니어서 단박에 알아보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분해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와 '나'가 아니라 '가나라'처럼 애초에 합해지지 않을 것들의 조합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순히 문장에서 글자 몇 개가 뒤바뀐 정도라면 어느 정도 그 원형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고유의 언어 능력인 덕분이다.

그런데 그것을 단지 우리 인간이 가진 고유의 언어 능력이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비겁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눈에 올곧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다시 말해 주관으로 객관성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객관이 주관에 삼켜지는 것일까. 우리는 인체 속의 뇌로 사고하는 탓에 그것을 피해갈 수 없다. 아무리 객관을 유지해도 그것을 피해 가지 못함을 통탄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영화의 카메라가 등장한다. 그 카메라는 우리의 눈이 아니며 사고의 핵심이 없으니 단지 현실을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인다.

 영화 <열대병>의 한 장면

영화 <열대병>의 한 장면 ⓒ 킥 더 머신


그 객관성으로 바라보는 태국의 모습은 분명 객관적이어야만 한다. 방금 말했듯 카메라는 그 자체로는 주관이 없기에 모습이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피찻퐁의 영화를 보며 그러한 객관성을 자꾸만 주관으로 합리화하려 하는 성향이 생긴다. 그런데 그것은 필연이다.

왜 필연이느냐면 아피찻퐁의 영화에는 서사가 없으나 쉼표가 있는 탓이다. 그 쉼표는 어쩌면 뜨문뜨문 떨어져 있어 가까이서 보면 연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피찻퐁의 영화에서 시퀀스는 유연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 시퀀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제하고도 그 시퀀스 간의 간극이 무척 멀게만 느껴진다. A에서 B로 연결되어야 할 그것은 A에서 D로 이어진다.

우리는 보통 일반적인 영화가 그러하다면 영화의 매끈한 흐름이 망가진다며 욕을 하거나 혹은 그러한 굴절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곤 한다. 이렇게 분절된 장면은 이후 어느 장면에서 다시금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상상, 하지만 아피찻퐁의 영화에 그런 것은 없다. 없다기보단 없는 것임에도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그 시퀀스 사이의 공백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기입하고 가상의 답지와 비교채점을 해보게 된다. 마치 아피찻퐁이 불러주는 이 장면들이 하나의 답안인 것처럼 자신의 상상과 감독의 상상을 하나하나 대조해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 <열대병>의 한 장면

영화 <열대병>의 한 장면 ⓒ 킥 더 머신


아피찻퐁의 영화는 대부분 야사로 시작된다. 야사는 분명 실제로 있었던 일일 수도 있고 애초에 거짓으로 꾸며낸 풍문일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세월이 흘러가며 그 이야기가 거친 수많은 사람의 상상력이 조금씩 보태어진 현재의 완성품이 어느 누구의 상상력도 아닌 새로운 상상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피찻퐁의 영화는 영화의 면모 중 하나인 상상력의 구현이라는 점에 부응하나, 기존의 영화가 상상력을 온전히 구현하는 것에 반해 그의 영화는 우리의 상상력이 영화 상상력의 공백을 자유롭게 매꾸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뉴 타입 시네마(New-type Cinema)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정말로 흥미진진한 것임이 틀림없다. 마치 누군가의 달리기에 돈을 걸어보듯이 그가 출발부터 도착까지 순위가 오고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본다는 점에서 우리는 추측과 해답의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아피찻퐁의 영화는 그러한 쾌감으로 우리를 몰입하게 하며 계속해서 이끌어 가는데, 결국엔 그대로 이야기가 끝나버린다. 긴밀하게 이어질 때 몰입의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지만 아피찻퐁의 영화는 오히려 그러한 공백의 자리에 스스로를 기입함으로써 얻는 책임적 몰입감이 주가 되며, 그것은 분명 우리가 추리 영화에서 뒷이야기를 추측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아피찻퐁은 영화를 건축하기 이전에 건축 설계도를 우리에게 내어주며 이것을 함께 만들어 나가자며 손을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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