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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9월 12일,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했는데, 지진의 규모는 5.8로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역대 최고의 지진이었다. 야외 박물관이 따로 없는 경주였기에, 문화재 피해도 수십 건이 보고되었다. 당시 지진의 진앙지는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였는데, 진앙지를 듣자마자 훼손되지 않았을까 염려했던 곳이 경덕왕릉이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경덕왕릉이라고 불리는 곳은 의성과 경주 두 곳이 있다. 의성에 자리한 경덕왕릉은 진한 12국 중 하나인 조문국의 왕릉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경주에 있는 경덕왕릉은 신라 중대의 왕릉이다. 오늘은 경덕왕릉을 통해 당시의 시대와 신라 중대의 종언에 이르는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들을 얻기 위한 경덕왕의 노력

경덕왕(재위 742~765)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친형인 효성왕(재위 737~742)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삼국사기> 경덕왕 조를 보면 경덕왕의 첫 번째 부인은 이찬 김순정의 딸 삼모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경덕왕과 삼모부인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삼모부인은 궁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아들을 낳지 못해 강제 이혼을 당한 것과 다름이 없다.

경덕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소나무 숲, 멀리 경덕왕릉의 형태가 모습을 보인다.
▲ 경덕왕릉 소나무 경덕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소나무 숲, 멀리 경덕왕릉의 형태가 모습을 보인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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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년 서불한 김의충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가 만월부인으로 경덕왕이 얼마나 아들을 원했는지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끈다. 기록의 요지는 경덕왕이 표훈대덕을 불러 아들을 얻기를 소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표훈대덕이 천제와 경덕왕 사이를 오가며, 딸은 되지만 아들은 안 된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경덕왕이 딸을 아들로 바꾸어달라고 요구하자, 아들로 바꾸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하게 된다. 그럼에도 경덕왕이 아들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해 낳은 아들이 바로 '건운(혜공왕)'이었다. 이에 경덕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

경주 경덕왕릉의 모습, 불국사와 석국암 등이 경덕왕의 시대에 창건이 되었다.
▲ 경주 경덕왕릉 경주 경덕왕릉의 모습, 불국사와 석국암 등이 경덕왕의 시대에 창건이 되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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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이 이처럼 아들을 원했던 것은 결국 후계 문제와 연관이 있었다. 당시는 왕조국가 시대로, 대부분 혈연에 의한 계승이 이루어지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후계의 문제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내부의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데, 당장 흥덕왕 이후 왕위를 두고 벌이는 쟁탈전이 좋은 사례다. 때문에 경덕왕은 삼모부인과 이혼을 감수하면서, 만월부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경덕왕의 시대와 신라 중대의 종언 

경덕왕 때 폐지된 '녹읍'이 부활을 했다. 녹읍의 부활은 이후 호족들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훗날 후삼국 시대의 토대가 되었다. 반면 '내사정전(內司正典)'을 설치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검찰이나 감사원을 동원해 왕권을 강화하고 했다.

한편 757년에 이르러 신라의 9주 5소경의 명칭과 행정체계를 개편해 지방 통치의 효율성과 통제력을 높이고자 했다. 또한 불국사와 석굴암 등이 경덕왕 때 창건되었으며, 왕권을 높이기 위해 왕궁을 수축하는 한편, 외교적으로 당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경덕왕 때 창건된 불국사, 사진은 연화교와 칠보교, 청운교와 백운교의 모습이다.
▲ 불국사 경덕왕 때 창건된 불국사, 사진은 연화교와 칠보교, 청운교와 백운교의 모습이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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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사실은 이때 왜에서 사신이 왔는데 경덕왕은 사신을 접견조차 하지 않고 쫓아 보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신라와 왜와의 관계에서 신라가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미 성덕왕 시기인 731년 왜가 병선 3백 척을 이끌고 신라 동쪽 변경을 침입했지만 몰살당했던 것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후 765년 경덕왕이 세상을 떠나고 혜공왕(재위 765~780)이 즉위하지만 표훈대덕의 예언대로 신라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혜공왕이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다 보니 어머니인 만월부인이 섭정을 하게 되는데 워낙 왕권의 기반이 약하다 보니 잇따른 반란으로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높아져 갔다.

경덕왕릉의 십이지신상, 성덕왕릉과 달리 탱석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졌다.
▲ 경덕왕릉의 십이지신상 경덕왕릉의 십이지신상, 성덕왕릉과 달리 탱석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졌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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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찬 김지정의 반란으로 혜공왕과 왕비, 만월부인 등이 시해를 당하게 된다. 이후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원성왕)이 함께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하고 상대등 김양상이 혜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선덕왕(재위 780~785)이다.

혜공왕의 죽음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우선 혜공왕 이후 신라의 왕위 계승의 구도가 무열왕계에서 내물왕계로 변화하게 된다. 또한 신라 중대가 끝이 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인 동시에 하대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경덕왕릉을 두고 벌어지는 위치 논쟁 

경덕왕릉과 관련해 <삼국사기>는 '모지사(毛祇寺)'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삼국유사>는 '경지사(頃只寺)'의 서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가 후에 '양장곡'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느 기록에 근거할지에 따라서 경덕왕릉의 위치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선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자면, 지금의 경덕왕릉의 인근에서 사찰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덕왕릉으로 볼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

김유신묘, 이병도를 비롯해 고 이근직 교수 등은 김유신 묘를 경덕왕릉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 김유신묘 김유신묘, 이병도를 비롯해 고 이근직 교수 등은 김유신 묘를 경덕왕릉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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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르자면 '양장곡'으로 옮겨 장사를 지냈다고 했는데, 양장곡은 현 성덕왕릉이 위치한 곳이다. 하지만 성덕왕릉의 인근에서 경덕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는 능은 확인된 바 없다. 이와 관련해 이병도, 고 이근직 교수 등은 김유신의 묘를 경덕왕릉으로 보는 견해를 제기한 바 있어 참고해볼 만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태그:#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 #경덕왕릉, #신라중대,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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