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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은 전국 도처에 별서別墅를 짓기 시작했다. 살림집과는 별도로 지은 이러한 별서는 15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늘어났다. 이는 사림파의 등장과 그에 따라 발생한 네 번에 걸친 사화士禍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별서는 원래 별업別業, 촌서村墅, 향서鄕墅, 농서農墅로도 불렸고, 누, 정, 원, 당, 헌, 대, 정사 등 여러 명칭으로 사용됐다. 그러다가 <동국여지승람>에 누정樓亭 조항으로 수록된 후 각종 지리지나 지방지에 누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별서는 호남 지역에서도 16세기 들어서서 크게 늘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소쇄원이다. - 기자 말

광풍각과 제월당 사이 담장 공간에 핀 산수유
▲ 산수유 광풍각과 제월당 사이 담장 공간에 핀 산수유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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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는 어렸을 때 우연히 발견한 골짜기에 소쇄원을 조성됐다.
▲ 소쇄원의 계곡 양산보는 어렸을 때 우연히 발견한 골짜기에 소쇄원을 조성됐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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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어렸을 때 우연히 들오리가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을 보고 궁금하여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 바위가 기묘하고 폭포수가 쏟아지는 경치가 아주 빼어난 어느 그윽한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곳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그는 그곳에 집을 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소쇄원의 시작-자유분방한 선비의 공간

1519년 기묘사화로 양산보는 낙향했다. 그 후 고향인 지석동 창암촌에 어릴 적 눈여겨봐 뒀던 골짜기에 소쇄정이라는 작은 정자를 지었다. 그곳은 혼탁한 세상에서 벗어나 성리학의 완성자인 주자의 삶을 좇아 조용히 정진하기에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리하여 양산보는 20대 초반이던 1520년대 중반 무렵에 처음 공사를 시작하여 소쇄정을 지었고, 1530년대에 여러 건물과 다양한 조경을 갖춘 원림 수준의 소쇄원이라는 형태로 확장했으며, 그의 나이 40세 되던 무렵인 1540년대에 이르러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춘 원림을 조영했다.

소쇄원은 처음 소쇄정이라는 작은 정자를 지으면서 시작됐다.
▲ 대봉대 초정 소쇄원은 처음 소쇄정이라는 작은 정자를 지으면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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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라는 말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양산보는 더러운 세상을 피하여 맑고 깨끗한 이상적인 공간을 추구했다.
▲ 소쇄원 죽림과 설경 소쇄라는 말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양산보는 더러운 세상을 피하여 맑고 깨끗한 이상적인 공간을 추구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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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瀟灑'라는 말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문인 공치규(孔稚珪, 447~501)가 지식인의 이중적인 위선을 풍자한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양산보는 더러운 세상을 피하여 맑고 깨끗한 이상적인 공간을 추구하여 그의 별서를 '소쇄'라고 했다.

양산보는 당시 선비들처럼 성리학을 신봉하면서도 다양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소학> 뿐만 아니라 사서와 삼경, 특히 주역을 깊이 연구했다. 또한 그는 주돈이를 존경하여 <태극도설>을 항상 글방 좌우에 걸어두고 <애련설>을 가까이했다. 노장사상에도 관심을 가져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그의 전기인 <오류선생전> 등을 문방 좌우에 두었다 한다.

광풍각 뒤쪽 언덕에는 도오(복사꽃 동산)를 두어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재현했다.
▲ 도오 광풍각 뒤쪽 언덕에는 도오(복사꽃 동산)를 두어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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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각 뒤쪽 언덕에 도오(桃塢, 복사꽃 동산)를 두어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재현했고, 광풍각 앞에 (지금은 없어진) 버드나무를 심어 도연명을 상징했다(도연명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를 오류선생이라 했다).

이처럼 양산보는 성리학의 연구와 실천에 몰두한 전형적인 유학자이면서도 노장사상 등 다양한 사상을 폭넓게 수용한 자유분방한 선비였다. 소쇄원은 그의 다양한 사상들이 반영된 공간이었다.

소쇄원의 사람들

소쇄원은 양산보와 그 후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양씨 집안은 관직에 나아간 적도 없고 경제 기반도 약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영향과 경제적 후원으로 소쇄원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양산보는 김후의 장녀 광산 김씨와 결혼하여 가문을 명문가로 키우고, 소쇄원을 건립하여 지역의 명사들을 불러 모았다. 광주에서 창평으로 이주한 1세대인 양산보는 여러 명문가와 연결된 그의 처가인 광산 김씨와 외가인 신평 송씨의 후원과 영향으로 소쇄원을 건립하고 집안을 호남의 신흥 명문가로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을 토대로 1755년(영조 31)에 소쇄원의 건축물, 조경 등의 공간 구성을 새긴 목판 그림이다.
▲ 소쇄원도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을 토대로 1755년(영조 31)에 소쇄원의 건축물, 조경 등의 공간 구성을 새긴 목판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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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5개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재력이 막강했던 처가 사람 김윤제와 10살 많은 외사촌 형으로 전라도 관찰사를 하면서 소쇄원을 짓는 데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외가 사람 송순(宋純, 1493~1582)의 도움이 컸다.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석천 임억령(林億齡, 1496~1568), 송강 정철(鄭澈, 1536~1593), 제봉 고경명(敬敬命, 1533~1592) 등 당대의 명사들도 소쇄원을 빈번하게 출입했다. 이들은 소쇄원 사람들과 학연, 지연, 혈연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중 하서 김인후는 양산보보다 일곱 살 아래였지만 가장 절친했던 사이였다. 그의 문집인 <하서전집>에는 양산보와 관련된 시가 80수, 양산보의 둘째 아들이자 김인후의 사위였던 양자징과 관련된 시가 50수에 이를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소쇄원을 자주 방문했다. 얼마나 자주 소쇄원에 들렀으면 연못의 물고기가 알아볼 정도였다고 한다.

김인후는 이러한 돈독한 관계와 잦은 방문으로 1548년 소쇄원 완공을 기념하여 지은 시라고 볼 수 있는 <소쇄원 48영>을 남겼다. 이처럼 호남 출신의 유명 인사들이 소쇄원가家와 깊이 교유하면서 소쇄원은 그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매대에 핀 매화, 매대는 매화가 심어져 불린 이름이다.
▲ 매화 매대에 핀 매화, 매대는 매화가 심어져 불린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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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은 완공 후 양산보의 원림이라는 뜻으로 '양원梁園'이라고 불렸다. 양산보는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들고, 매화나무를 직접 심는 등 소쇄원을 손수 조성했다. 양산보는 나중에 평천장平泉莊 고사를 참고하여 후손들에게 소쇄원 관리에 대한 당부를 남겼다.

중국 당나라 때 이덕유는 낙양 30리 밖에 평천장을 호사스럽게 꾸몄다. 그는 죽을 때 후손들에게 "평천장을 팔아먹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 평천장의 나무 한 그루, 돌 한 점이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착한 자손이 아니다"는 유언을 남겼다.

양산보는 평천장 고사처럼 소쇄원을 남에게 팔지 말고 돌 하나 나무 하나라도 소중하게 보존하라고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이상적인 공간을 손상시키지 말라는 이 유언은 맑고 깨끗한 선비의 정신을 더럽히지 말고 절의를 지키고 살라는 뜻도 숨어 있다. 양산보는 만년에 소쇄원에서 10여 년간 병으로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1557년(명종 12) 봄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3월 20일에 세상을 떴다.

계곡에서 보면 대봉대와 초정이 하늘에 닿아 있다.
▲ 대봉대와 초정 계곡에서 보면 대봉대와 초정이 하늘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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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으로 보는 소쇄원 관람법-소쇄원에선 계곡미를 제대로 느껴야
소쇄원의 공간은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입구 대나무 숲에서 연못, 대봉대, 애양단, 오곡문까지 이르는 진입 공간으로 기다림과 만남의 공간인 '전원前園'이다. 다음으로는 오곡문 옆 담장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과 광풍각 일대로 사색과 풍류의 공간인 '계원溪園'이다. 마지막으로 오곡문에서 매대를 거쳐 제월당으로 이르는 소쇄원의 중심 거처로 관조와 조망의 공간인 '내원內園'이다.

물론 이것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1400여 평에 달하는 담장 안 공간이다. 소쇄원을 좀 더 넓게 보면 담장 안의 '내원內園'과 담장 밖의 '외원外苑'으로 볼 수 있다. 내원은 앞에서 말한 공간에 지금은 사라진 고암정사와 부훤당 터까지 포함되고, 외원은 지금의 주차장 자리에 있었던 황금정과 입구의 창암촌, 북쪽의 고암 동굴 등 소쇄원을 둘러싼 주변 자연 환경을 들 수 있다. 

한편으론 입구의 초정과 제월당, 광풍각의 '주거 공간', 연못과 매대, (지금은 사라진) 석가산 등의 '정원 공간', 층계와 다리, 문 등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원림 곳곳의 '산책 공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완벽한 공간 구성이야말로 우리나라 최고의 별서로 소쇄원을 꼽는 이유이다.

소쇄원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모두 찾아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일단 소쇄원에 들어서면 몸의 모든 감각을 열어젖히고 천천히 음미하는 게 좋다. 책의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가듯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풍경을 읽어야 한다. 의미 부여는 있는 그대로, 조금씩 하는 게 좋다. 지나친 의미 부여는 오히려 자연스런 감상을 해칠 뿐이다. 그리고 누가 언제 어떤 이유에서 원림을 지었는지, 원림의 구성은 어떻게 되는지, 그 안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차츰 알아 가면 된다. 그러면 비로소 원림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 참, 또 한 가지. 소쇄원에선 계곡 속으로 꼭 들어가 보자. 계곡에 들어서는 순간 소쇄원의 계곡이 얼마나 깊고 웅장한지를 느낄 것이다. 계곡에서 들여다보면 여태 봤던 소쇄원과는 또 다른 모습이 보인다. 소쇄원이 시작되기 전 태초의 공간, 하늘과 사람과 땅 천지인이 하나가 되는 소쇄원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운치 있는 풍경, 우아한 풍류, 고요한 시정, 올곧은 절의가 배어 있는 원림으로 다가온다.


소쇄원은 계곡에 들어서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 소쇄원 계곡 소쇄원은 계곡에 들어서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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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인 소쇄원을 두 차례에 걸쳐 소개했습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최근에야 알려진 비밀 정원, 이른바 ‘호남의 3대 정원’으로 꼽히는 백운동 별서 정원을 두 번에 걸쳐 소개할 예정입니다.



태그:#소쇄원, #양산보, #소쇄원도, #소쇄정, #대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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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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