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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주기별로 빠져드는 게 조금씩 달랐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공상과학물 속 로봇에 빠져 있었다. 밖에서 놀다가도 텔레비전에서 로봇에 관한 만화영화만 하면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집중력으로 브라운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살면서 집중력 부족이라는 소리도 종종 듣고 있지만 이때만큼은 그런 말이 필요 없었으리라. 부모님이 보지 못하게 하면 울고불고 떼를 쓰면서 어떻게든 로봇과 함께 호흡해야 했다. 지구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로부터 이 세상을 지키는 정의의 로봇과 그들을 조종하는 주인공은 가장 위대한 영웅이고 친구였다.

돈이라도 생기면 과자를 먹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며 한푼 두푼 모아 조립식 로봇완구를 샀고 마치 보물처럼 책상 서랍에 숨겨놓으며 애지중지했다. 이때의 마음 같아서는 나중에 결혼을 하더라도 로봇완구와 만화책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반대한다면 차라리 독신이 났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WWE(미 프로레슬링 단체)에 빠졌다. 각각의 스토리를 가진 프로레슬링 캐릭터에게 감정몰입을 했고 내가 응원하는 레슬러에게 위협이 되는 악역들을 진심으로 미워하기도 했다. 게임을 하더라도 다른 친구들과 달리 WWE에 관련된 소재만 즐겼다.

아마 고등학교 시절 그곳을 가지 않았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WWE에 빠져서 지금쯤 상당한 마니아가 되어있을 공산이 크다. 그곳이란 다름 아닌 만화대본소였다.

무협소설 덕에 매질을 면하다

닌자 컨셉으로 사진한장을 찍어보았다. 무협이라는 세계는 나를 여러가지로 바꾸어놓았다.
 닌자 컨셉으로 사진한장을 찍어보았다. 무협이라는 세계는 나를 여러가지로 바꾸어놓았다.
ⓒ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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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을 따라서 만화대본소에 처음 발길을 내디뎠던 초등학교 때는 몰랐다. 만화책이 아닌 두꺼운 무협지를 보는 형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글씨도 세로로 써져있어서 눈만 아팠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무협지를 읽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세상을 피로 물들이려는 악의 화신에 맞서 주인공이 성장해가는 모습은 굉장한 재미로 다가왔다. 초등학생 시절 우주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용사들의 또 다른 버전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황당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이것은 인간이 무술을 배워서 하는 것이니까'라며 좀 더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매 작품 비슷비슷한 내용이었지만 그러한 공식의 중독에 더 빠져들었다. '그래서 형들이 이렇게 무협지를 탐독했구나' 하고 묘한 동질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무협마니아들이 나에게 서점에서 판매하는 무협소설을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만화대본소 무협지는 지나치게 부앙부앙해(과장됐다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 어차피 중국무협소설작가들이 쓴 작품들의 세계관을 모방한 거야. 진짜 무협소설을 느끼려면 그들의 작품을 읽어봐."

'무협지가 거기서 거기지 무슨...' 처음에는 별로 와닿지 않아 그들의 말을 무시하다가 친구가 가져온 와룡생의 <마왕탑(魔王塔)>을 읽어보면서 나름 큰 충격에 빠지게 됐다. 그렇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만화보다도 더 황당했던 무협지와 달리 나름 소설 같은 형식을 갖추고 문장력도 훨씬 뛰어났다. 말 그대로 무협지와 무협소설의 차이였다.

만화대본소 무협지는 숨기고 읽어야 했다면 무협소설은 아예 대놓고 봤다. 친구들이 보던 타 장르의 소설과 비교해도 수준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은 중화권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는 '신필(神筆)' 김용의 작품을 탐독하게 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특히 당시 학생들의 밀리언셀러로 불리던 <영웅문> 시리즈는 고등학생 시절 내내 나를 완전히 무협 마니아로 중독시켜 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에서 봐도 1부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 2부 신조협려(神雕俠侶), 3부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로 이어지는 3부작 시리즈는 최고 중의 최고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작품 속 등장인물의 이름은 물론 특징과 사용 무술까지 상당수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김용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서 모조리 읽어댔다.

수업시간 내내 교과서나 참고서 안에 무협소설을 숨겨서 공부하는 척하면서 엄청나게 읽었다. 집에 가서도 자기 전까지 읽었다. 당시 매우 두껍고 글씨도 작았던 무협소설들을 하루에 한 권 이상 씩 읽어버렸다. 본래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중간고사 등 중요한 시기에까지 무협소설을 탐닉했던 것은 살짝 문제가 있기는 했다.

재미있는 것은 학교 시험에도 살짝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언젠가 세계사 시험을 100% 주관식으로 치른 적이 있다. 세계사 선생님은 무척 엄한 분이셨는데 90점 밑으로는 이른바 '사랑의 매(?)'를 사용하셨다. 당시 시험에 나온 영역은 중국사였는데 송나라부터 명나라까지가 배경이었다.

꽤 어려웠는지 반에서 1등 하던 공붓벌레 친구를 제외하고는 90점 이상을 기록한 친구가 없는지라 줄줄이 앞으로 나가서 매를 맞았다. 대부분이 50점 아래였다. 내 차례가 왔다. 반 친구들은 당연히 나도 맞을 줄 예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험지를 보던 선생님도 내 이름을 부르면서 "96점!"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두가 어려워하던 주관식 세계사를 단 한 문제만 틀리고 모두 맞춘 것이다. 당연히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세계사의 배경은 모두 영웅문 시리즈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고 난 공부를 안 했음에도 대부분의 답을 어렵지 않게 적어낼 수 있었다. 무협소설을 읽으면서 도움을 받았던 흔치 않은 기억이다.

도움을 받은 것은 또 있다. 하도 무협소설을 보다 보니 글씨를 읽는 속도 자체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속독을 전문적으로 배운 분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글씨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다. 물론 빨리 읽는 만큼 이해력도 좋다.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같은 경우 전체 평균에 비해 월등하게 좋았다. 몇 문제 틀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간도 항상 20~30분씩 넉넉하게 남았다. 지문을 매우 빨리 읽고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독서의 선작용(?)이었던 듯하다.

생애 첫 책을 내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
 영화 <바람의 파이터>
ⓒ 청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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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은 나한테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영향을 받아 친한 친구들도 무협광이 되었고 우리들끼리 모이면 수시로 무협소설 얘기로 늦게까지 얘기를 나눴다. 밤늦게까지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 누가 더 강하고, 그 부분은 정말 웃기지 않냐는 등 작품 속 캐릭터를 현실 속에 있는 사람들처럼 다뤘다. 극장에서 무협영화가 개봉한다 싶으면 당시로써는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몰려가 꼭 보고 왔다. 안타깝게도 내가 사는 곳은 극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협을 응용해 운동(?)까지 했다. 주말에는 막대기를 들고 마당에서 서로 초식을 외치며 무술 영화까지 찍었다. 막대기로 대결하다 싫증 나면 서로 맨손 격투를 치렀고 감정이 격해져 싸움 직전까지 가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친구의 주먹에 맞아 내 얼굴에 멍이 들었고 친구 역시 얼굴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위험한 장난들이었다. 성인이 되면서도 틈틈이 무술을 배우고 싶었으나 여건상 그리되지는 못했다. 잠깐 하다가 먹고사는 문제로 잊어버리고를 반복했다.

관심은 꾸준히 이어졌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로 유명한 최배달 선생님의 친형님께서 근처에 살고 계시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친구는 잠깐씩 도인 같은 생활도 했다. 무협소설 주인공처럼 산속에 들어가 얼음물에서 냉수마찰도 하고 나무를 상대로 목검치기도 하는가 하면 오랫동안 독특한 류파의 검술을 배우기도 했다. 오랜만에 친구가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십중팔구 산속에서 지내다 온 것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도 무협에 관한 관심은 끊어지지 않았다. 전역 후 지역 도서관에 가자 한동안 보지 못했던 동창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각자 공무원 준비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며 공부를 하려고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도서관에 다녔다. 하지만 목적은 따로 있었다. 동창 녀석들은 공부를 할 때 난 조용한 곳에서 무협소설을 썼다.

각종 스토리를 구상해보고 동창들 이름을 변형해 소설 속 캐릭터들을 이름을 지었다. 무협소설 속 지명이나 중국의 역사 거기에 각종 문파에 관한 자료들도 끊임없이 공부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운이 좋았던지라 내 이름으로 된 무협소설도 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이야 워낙 많은 지망생들이 몰려 원고료가 바닥을 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내 이름으로 책을 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잠깐이지만 나도 유명한 무협소설 작가가 되어 나와 같이 꿈꾸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상상도 했다.

하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성향도 중요하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작가가 되기에는 나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끊임없이 꿈꾸며 상상해야 하는데 나의 성향은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느껴졌다. 작가 모임 같은 곳을 나가도 그들과 어울리며 밤새도록 얘기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차라리 스포츠 동호회가 더 재미있었으며 친구들과 앞날이나 돈 버는 얘기를 하는 쪽에 훨씬 흥미를 느꼈다.

"직접 해보든가" 내 인생을 바꾼 한 마디

하지만 고맙게도 당시 무협소설을 출간한 일은 나에게 여러모로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소설책의 표지와 전체적 디자인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디자이너에게 의견을 얘기한 적이 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춰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돌려서 말을 했으나 디자이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아는 척을 하냐'는 투였다.

더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낮은 음성이 나의 귀에 확 들어왔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정 그렇다면 직접 해보든가."

직접 해보든가? 뭐 못할 것도 없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을 배워서 직접 소설책의 표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난 그쪽 관련 대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직업훈련소 같은 곳은 1년을 꼬박 다녀야 했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그런 쪽을 제대로 가르쳐줄 학원도 없었다. 그러던 중 건너 건너 아는 지인 중에 지역신문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분이 계셨고 다짜고짜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작업하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생각 외로 편집디자인 일은 나와 잘 맞았다. 출판사에서 디자이너가 할 때는 마냥 어렵게만 느껴졌으나 막상 배우기로 하고 편집기자분의 작업하시는 모습을 보니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무엇인가 기능을 배우려고 하지 않고 소설 쓸 때처럼 벽돌을 한 장 한 장 올린다는 느낌으로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15일 정도 지나니 기능은 잘 알지 못해도 전체적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를 하고 있으니 집에서 혼자 해보며 기능도 차근차근 스스로 배워 나가는 게 가능했다.

그렇다. 그때 배웠던 일들은 현재 나의 직업이 되었다. 글 쓰는 것도, 디자인도 둘 다 재미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희소성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게 나의 삶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신문사나 출판사 같은 곳에 취직을 하더라도 글 쓰는 사람은 많으니 상황에 따라 일자리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지만, 편집을 겸하게 된다면 좀 더 자리가 보장될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달 후 조그만 가게를 얻어 각종 책자나 전단, 홍보물을 만드는 장사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세상은 '나비효과'의 연속인 것 같다. 만약 그때 내가 무협소설에 빠지지 않았다면 현재 이 일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생업에 바빠 그때처럼 무협소설을 읽지는 못한다.

하지만 각종 포털사이트 같은 곳에서 무협 웹툰 등을 찾아서 읽는 나를 보면 지금도 무협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태그:#무협소설, #무협지, #무협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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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디지털김제시대 취재기자 / 전) 데일리안 객원기자 / 전) 홀로스 객원기자 / 전) 올레 객원기자 / 전) 이코노비 객원기자 / 농구카툰 크블매니아, 야구카툰 야매카툰 스토리 / 점프볼 '김종수의 농구人터뷰' 연재중 / 점프볼 객원기자 / 시사저널 스포츠칼럼니스트 / 직업: 인쇄디자인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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