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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청련은 6.29 이후 변화된 정세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8월 8일에서 9일까지 서대문에 있던 기독교 선교교육원에서 1박2일로 정회원 대의원총회를 열었다. 이 대의원 총회를 위해 준비특위가 구성됐고, 제안될 안건에 대해 미리 집중적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왼쪽)이범영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6쪽짜리 청년운동론 ‘민청련은 청년 대중단체로의 전환을 절대적으로 요구 받고 있습니다’ 문건 첫 페이지. (가운데)대의원총회 준비특위에서 제작한 5쪽짜리 ‘대의원총회준비 보고서’ 첫 페이지. (오른쪽) 9차총회 보고서 표지
 (왼쪽)이범영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6쪽짜리 청년운동론 ‘민청련은 청년 대중단체로의 전환을 절대적으로 요구 받고 있습니다’ 문건 첫 페이지. (가운데)대의원총회 준비특위에서 제작한 5쪽짜리 ‘대의원총회준비 보고서’ 첫 페이지. (오른쪽) 9차총회 보고서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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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대의원총회에서 민청련은 87년 상반기 활동을 평가하면서 성과로서는 "7총 이후 운영위 중심으로 공개영역이 회복되어 상하층 연대선이 안정적으로 정착된 점, [민중신문]의 정기적인 발행, 6월항쟁 가투투쟁에서 소정의 인원동원과 가두선전활동을 수행한 점" 등을 들었다. 그리고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중앙집행위가 좌우 편향 없이 회원지도를 잘 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반성해야 할 내용으로 "조직 내 사상적 중심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 대중노선의 구체적 관철과 대중과의 결합방법 제시가 미흡했다, 정회원 체제가 부실하게 운영됐다, 중간지도력이 부재했다, 재정구조가 취약해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과 측면보다 반성 측면을 더 강조했는데, 특히 지도부의 사상적 지도 부족에 대한 비판은 당시 운동 세력에 불어 닥치기 시작한 이른바 'NL(민족해방)' 계열에 대한 대응을 지적한 것이었다. 

정회원체제가 부실화된 점에 대해서도 논의가 많았다. 정회원제는 7총 이후 도입된 것으로 조직에 대한 높은 헌신성과 활동력이 검증된 기간활동가로 구성되는 조직 내의 비공개조직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비합법 활동 시대를 맞은 민청련이 조직 보위를 위해 자구책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반회원들에게는 누가 정회원인지 뿐만 아니라 정회원제 존재 자체조차 일체 알 수 없도록 엄격한 보안을 유지했다. 이 제도는 한편으로 민청련이 투철한 기간활동가를 양성하여 조직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고, 나아가서 이 정회원제를 통해 언젠가 도래할 변혁의 시기에 민청련이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이 정회원 제도는 일반 회원들에게도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고, 정회원들에게 요구되는 높은 규율이나 책임성도 확보되지 못하고 평범한 대중적 체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히려 일반 회원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고 자발적 참여를 막는 질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의원총회 준비특위는 이 점을 신랄하게 지적하면서 정회원체제는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준비특위에서 제출한 이 안건은 대의원총회에서 통과되어 정회원제는 해소됐다.

이어서 대의원총회 결의로 중앙집행위원장 겸 운영위원장이었던 권형택을 중심으로 9차총회를 준비하기 위한 총회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공개 집행부 쪽에서는 사업부장 김성환과 청년부장이면서 국민운동본부에 실무간사로 파견됐던 최성웅이 참여했고, 비공개 집행부 쪽에서는 선전부장 유기홍, 조직부장 진영효, 그리고 여성 대표로 임태숙 등이 참여했다.

총회준비위원들은 대의원총회 보고서를 기초로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8차총회 이후의 사업평가, 향후 활동방향, 집행부 인선, 총회 실무준비 등의 작업을 진행했다.

김병곤이냐, 김희택이냐

9차총회의 가장 큰 주제는 공개 지도력의 회복과 청년대중운동으로의 전환 모색이었다. 그 중에서도 공개지도력 회복 문제가 일단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공개지도력 회복 문제는 구체적으로는 의장단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중에서도 의장을 누가 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김근태 전 의장은 아직 감옥에 있었으나 그 외에 초창기 민청련을 이끌었던 지도적 인사들은 대부분 활동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일찍이 민통련으로 간 장영달, 이해찬은 일단 논외로 하면 의장 후보로는 최민화, 김희택, 김병곤, 박우섭, 장준영, 이범영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최민화가 그 중 가장 연장이고 선배격이어서 의장후보 1순위였지만 부인 박혜숙의 투병 때문에 가정과 사업을 떠날 수 없었다. 박우섭은 석방 이후 활동무대를 민통련으로 정하고 활동하고 있었다. 이범영은 아직 수배가 풀리지 않아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었고, 장준영은 수배상태인지 아닌지가 좀 애매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상태였다.

결국 의장 후보는 김희택과 김병곤으로 압축됐다. 김희택은 김병곤을 의장으로 강력히 추천했다. 후배지만 김병곤의 탁월한 리더십과 추진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공개운동과 노동현장을 두루 망라하는 폭넓은 인맥과 동료 선후배들에게서 받는 높은 신뢰도 그가 의장을 맡아야 하는 이유였다. 김희택이 내심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는 김병곤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의장의 대외교섭력에 있어서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김희택과 김병곤은 철산동 아파트에서 몇 년간 위아래 동에서 살아서 가족끼리도 자주 왕래하며 선후배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온 터라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김희택의 추천이 겸양의 말이 아니고, 진심임을 김병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병곤은 그 추천을 수락할 수 없었다. 김희택의 추천을 정중하지만 완강하게 고사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김희택을 의장으로 밀었다. 도리상 선배를 제치고 의장을 맡을 수 없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김희택의 인화력과 인품을 민청련 의장에 꼭 필요한 덕목으로 생각했다.

한편으로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김병곤은 6월항쟁으로 열린 공간에서 민통련을 민중운동연합으로 발전시키고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은 그것을 위해 민통련에서 일해야 한다는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총준위원장을 맡아 인선작업을 진행하던 권형택이 두 사람을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서 만나게 했다. 두 사람은 누가 의장을 맡을 것인가 문제로 밤이 깊도록 토론했다. 몇 시간을 서로 밀고 당기는 입씨름 끝에 결국 김희택이 물러섰다. 김병곤의 간곡한 권고를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장 관건이었던 의장은 사실상 김희택으로 결정됐다. 이후 총준위원회는 김희택과 의논하여 부의장으로 김병곤, 박우섭, 장준영, 그리고 총준위원장을 맡았던 권형택 등 4인을 내정했다. 그 중에서 장준영은 수배문제가 아직 애매한 상태여서 일단 비공개로 하기로 했다.

9차 총회에서 선출된 의장단 1.김희택 의장 2.김병곤 부의장 3.남근우 부의장 4.권형택
 9차 총회에서 선출된 의장단 1.김희택 의장 2.김병곤 부의장 3.남근우 부의장 4.권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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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대중운동으로 전환하는 문제

9차 총회에서 다루어야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민청련의 청년대중운동으로의 전환 문제였다. 6월항쟁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와 거리를 누비는 수백 만의 대중의 모습은 앞으로의 시대가 민중의 시대, 대중의 시대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6월항쟁 직후 7월부터 전국 노동현장에서 벌어진 노동자대투쟁 역시 이제 민주화운동이 소수의 선진적 활동가 중심이 아닌 광범한 대중을 기반한 운동이 되어야함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청년운동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운동의 방향을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선전부와 정책실을 중심으로 한 개의 문건을 작성하여 총준위에 제출했다. 이 문건은 총준위 검토 과정에서 최성웅이 그 내용을 일부 수정, 보완했고 그것을 민청련 각 부서 회원들에게 회람했다. "민청련은 청년 대중단체로의 전환을 절대적으로 요구 받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16절 6페이지짜리 대외비 내부회람용 문건이었다.

이 문건은 6월항쟁의 성과로 민청련이 "청년 대중역량을 튼튼히 구축해야할 필요성을 시급히 요청받고 있다"고 하면서 청년대중역량을 구축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우선 문건은 민청련이 그동안 대중노선과 조직운동을 표방하면서도 학생운동 출신의 선진활동가 조직에 머물러 있었던 한계를 지적했다. 이런 활동가 조직 형태가 탄압시기에 조직을 보위하는 데는 기여한 바 있지만, 대중투쟁이 폭발적으로 고양되는 시기에 대중조직 기반을 확대하고 대중투쟁을 이끌어 나가는 데는 오히려 장애가 됐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6월항쟁에서) 대중 속에서 훈련되고 단련되지 않은 활동가는 지극히 무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고, 대중조직의 힘을 갖지 못하는 조직은 결코 투쟁을 이끌 수 없음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습니다."라고 지적했다. 6월항쟁 과정에서 민청련이 꾸준히 선전물을 내고 가두에서 열심히 싸우긴 했으나 명동농성투쟁 같은 핵심 현장에서 일부 회원의 참여는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이었다.

이 문건은 그러므로 "민청련은 선진활동가 조직에서 각 계급 청년을 조직 기반으로 하는 청년단체로 개조되어야 하며 계급운동과의 통일적 발전을 위해 기층 청년을 주요한 조직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청련은 한편으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대중단체"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개영역의 확보가 필수"이며, "노동청년대중을 조직하기 위해 생산지역에 공개 지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9차 총회 이후 지역지부 창립의 근거가 되었다.

이 문건은 당시 수배 중이던 이범영이 작성한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이범영은 이 문건을 기초로 하여 청년운동론을 작성했는데, [민주화의 길] 17호에 무명으로 게재했다가 이범영 사후 1주기 추모문집 [이 강산의 키 큰 나무여](나눔기획, 1995)에 '청년운동론 시론'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문건은 회원들 회람 과정에서 문구나 용어 사용에서 일부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중심논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했고, 그래서 총회준비위에서는 이 문건의 주장을 회원 결의사항으로 채택했다.

가장 자유롭고 성대했던 9차총회

1987년 8월 25일,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200여 명의 청년들과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9차 총회가 열렸다. 6.29선언 이후 세태를 반영하여 민청련 창립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참석했고,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계훈제 민통련 부의장, 이재오 서울민통련 부의장, 목우 스님, 한경남 전 의장, 김지용 구속청년협의회 회장 등이 축사를 했다. 총회에서는 김희택을 의장으로 하는 지도부를 선출하고, 청년대중운동의 기치 하에 지역위원회를 신설할 것을 선언했다. 향후 이 지역위원회 산하에 북서울, 동서울, 남서울 3개 지역지부를 건설할 것도 아울러 공표되었다.

청년대중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그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이제 우리는 4년여 투쟁경험을 겸허하게 되새기고, 솔직한 자기비판을 통해 앞날을 설계할 시점에 와 있다. 특히 우리는 대중과 굳게 결합하지 못한 채 대중의 옆에 서서 투쟁해 온 과거를 청산하려 한다. 우리는 이제 각계각층 대중 속에 파고들어 대중조직화 사업에 열을 올려야 한다."

대중조직화 사업이 6월항쟁 이후 민청련의 새로운 활동목표로 떠오른 것이다. 9차 총회를 기점으로 새로 구성된 집행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지역위원회 산하의 3개 지부 조직책임자에 새로 떠오르는 열성회원 3인이 임명된 것이 눈에 띄었다.

의장단/ 의장: 김희택, 부의장: 김병곤, 박우섭, 장준영(비공개), 권형택
사무국/ 사무국장 겸 사회부장: 김종복, 총무부장: 김두일, 홍보부장: 윤형기, 조직부장:       최성웅, 여성부장: 임태숙
지역위원회/ 동민청 위원장: 김성환, 남민청 위원장; 남근우, 북민청 위원장: 김재승

(왼쪽부터) 동민청 위원장 김성환, 남민청 위원장 남근우, 북민청 위원장 김재승
 (왼쪽부터) 동민청 위원장 김성환, 남민청 위원장 남근우, 북민청 위원장 김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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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민청련, #9차총회, #청년운동론, #김희택, #김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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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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