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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경내에는 불상이 하나 전해지는데,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 그것이다. 본래 이 불상은 경주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옮겨져 지금까지 청와대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이 불상의 원위치가 확인되면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어 불상의 원위치가 어디인지 관심사로 떠올랐다.

불상의 원위치로 추정되는 곳 중 '이거사지'가 있다. 경주시 도지동에 소재한 이거사지는 현재 폐사지로, 사찰이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해버린 모습이다. 이거사지의 첫 모습은 사찰에 세워졌을 석탑이 무너져 탑재들이 흩어져 있어, 긴 세월의 무상함만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을 정도인 이 이거사지는 의외로 어떤 한 인물을 찾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이거사지 경주시 도지동에 자리한 이거사지의 모습, 지금은 석탑의 탑재만이 사찰의 흔적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 이거사지 경주시 도지동에 자리한 이거사지의 모습, 지금은 석탑의 탑재만이 사찰의 흔적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 김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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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올랐던 성덕왕의 시대

<삼국사기>는 이거사 남쪽에 성덕왕릉이 있다고 했다. 실제 이거사지 인근에서 성덕왕릉이 확인되면서 기록과 현장이 일치하고 있다. 성덕왕의 이름은 '흥광'으로 신문왕의 차남이다. 친형인 효소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성덕왕의 시대는 무열왕을 시작으로 신라 중대의 안정과 전성기가 이어진 시기로,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신라의 국력은 최고조에 올랐던 시기다.

성덕왕릉 전면에서 바라본 성덕왕릉의 모습
▲ 성덕왕릉 전면에서 바라본 성덕왕릉의 모습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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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사회 모습은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명문을 통해 성덕왕의 시대는 어진 이를 등용해 백성을 위무하고, 예악을 숭상했다. 또한 생업의 근본인 농사에 힘썼다는 사실과 40년간 정사에 힘써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게 한 적이 없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와 함께 <삼국사기>는 722년 성덕왕이 정전제도를 실시해 백성들의 토지 소유를 허가했다는 사실과 관리들에게는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충고와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성덕왕릉의 십이지신상 십이지신상이 등장한 성덕왕릉
▲ 성덕왕릉의 십이지신상 십이지신상이 등장한 성덕왕릉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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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과의 관계에서 성덕왕은 신라의 이익을 높이는 방향으로 외교력을 집중한 결과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을 정식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732년 9월 당시 동북아 정세는 요동지방으로 팽창하던 발해의 무왕이 흑수말갈의 문제를 두고 당과 적대적으로 맞서면서, 당과 대립을 하던 시기였다. 이때 발해는 장군 장문휴를 보내 등주로 쳐들어가 등주자사 위준을 잡아 죽였는데, 자연스럽게 당나라는 발해를 치기 위해 신라의 도움이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성덕왕릉의 석물 성덕왕릉에 설치된 관검석인상과 석사자상, 당나라 황릉 제도에서 본뜬 것이다.
▲ 성덕왕릉의 석물 성덕왕릉에 설치된 관검석인상과 석사자상, 당나라 황릉 제도에서 본뜬 것이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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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은 이러한 동북아 정세를 활용해 대동강 이남을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왜가 병선 3백 척을 이끌고 신라의 동쪽 변경을 침입했으나 이를 가볍게 제압하는 등 성덕왕 시기의 신라는 외교, 국방, 내치 모두 분야에서 안정된 사회를 구가하게 된다. 그렇게 태평성대를 이어가던 성덕왕은 737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뒤를 이어 소덕왕후 소생의 아들인 효성왕이 즉위하게 된다.

십이지신상과 석물이 세워진 성덕왕릉

앞선 신라왕릉과 달리 성덕왕릉은 십이지신상과 석물이 세워지기 시작한 시기다. 이는 당나라의 황릉 제도에서 본뜬 것으로 여겨지는데, 십이지신상과 관검석인상 2기, 석사자상 4기 등이 세워졌다. 이 가운데 관검석인상의 경우 1기는 상반신의 일부만 간신히 남아있으며, 남은 1기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다.

성덕왕릉 귀부 성덕왕릉의 귀부, 비편의 일부가 수습이 되었지만 몇 글자만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다.
▲ 성덕왕릉 귀부 성덕왕릉의 귀부, 비편의 일부가 수습이 되었지만 몇 글자만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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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에 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에 성덕왕릉의 사진이 일부 남아 있는데, 사진을 보면 난간석과 상석 등의 일부 훼손이 있지만, 석물의 경우 지금과 큰 차이가 없는 편이다. 또한 묘제 양식의 변화를 통해서도 성덕왕릉은 신문왕릉에서 발전한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성덕왕릉의 귀부가 확인이 되면서, 비석이 세워진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비문은 남아있지 않고, 비편의 일부가 수습되었으나 몇 글자만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성덕왕릉과 함께 보면 좋은 성덕대왕 신종

성덕대왕 신종은 '에밀레종' 설화에 등장하는 종으로 그 크기가 국내에 있는 종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종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이 종은 성덕왕의 원찰인 '봉덕사'에 있었다.

그러다 봉덕사가 폐사되면서 '영묘사'로 옮겨졌고, 이후 '봉황대'에 종각을 지어 보관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경주읍성 남문 밖에 위치한 경주부립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이전을 했고, 해방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성덕대왕 신종 국립경주박물관의 야외에 전시된 성덕대왕 신종의 모습
▲ 성덕대왕 신종 국립경주박물관의 야외에 전시된 성덕대왕 신종의 모습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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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 신종에서 특히 눈길이 가는 부분은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비천상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으로 평가된다. 또한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을 통해 이 종이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최초 아들인 경덕왕 때 만들려고 했지만, 미완에 그친 것을 혜공왕 때 이르러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공사에 관여했던 이가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과 그 오빠인 김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성덕대왕 신종에서 주목해볼 점은 중국과 일본의 종과 달리 종을 연결하는 부분에 자리한 음통이다. 이 음통은 만파식적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상원사 동종과 용주사 동종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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