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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경기도 부천시 까르푸(현 홈플러스) 중동점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노동 문제' 웹툰 <송곳>에 등장하는 노무사 구고신.
 2003년 경기도 부천시 까르푸(현 홈플러스) 중동점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노동 문제' 웹툰 <송곳>에 등장하는 노무사 구고신.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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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패배한 게 아니라 평범한 거요. 국가는 평범함을 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오. 우리는 벌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오!" - 만화 <송곳> 4부 중

'노동 교과서'라 불리는 만화 <송곳>의 주인공 구고신 부진노동상담소장은 '노동'의 의미를 평범함에서 찾았다. 지고 이기고, 잘나고 못나고의 기준 없이 그저 평범한 것. 그러나 법은 오랜 기간 이 평범한 노동에 '근로'라는 이름을 덧씌웠다.

근로(勤勞: 부지런히 일함). 노동은 과격, 불순 등의 오명을 쓰고 사용자 중심의 이 말로 대체됐다.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노동의 사전적 의미는 구고신의 주장대로 생각보다 평범하다.

"일제와 군사독재시대 사용자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수정하겠다."

지난 20일 청와대는 대통령 개헌안을 통해 노동의 오명을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수준의 임금 ▲ 노동자 단체행동권 ▲ 노사 대등 결정 원칙 ▲ 공무원 노동 3권 보장 등 그간 외면 받아온 노동권을 강화시키겠다는 취지였다. 정치권 저마다의 평가도 곧이어 따라 나왔다.

대통령 개헌안 이전부터, 긴 시간동안 '근로 아닌 노동'을 외쳐온 실제 '구고신'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근로가 노동으로 바뀐다면 노동자의 삶이 크게 달라질까? 만화 <송곳> 구고신의 모티브가 된 김재광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과 이종명 부천비정규센터장에게 지난 21일 전화를 걸었다.

 최근 드라마로 제작된 만화<송곳>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이종명 부천비정규직센터장(왼쪽), 김재광 노무사.
 최근 드라마로 제작된 만화<송곳>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이종명 부천비정규직센터장(왼쪽), 김재광 노무사.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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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 죄 없는 '노동' 수난기

"일단은 환영이다."

김 소장은 '일단'이라는 전제를 깔았다. 개별 법률 개정을 떠나 "헌법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당장 천지개벽할 일은 없겠지만... 노동이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정당화 될 것으로 본다"라고 기대했다.

이 센터장은 헌법 속 '근로'의 개수를 셌다. 그는 "전문에 '근로'라는 말이 14개가 들어있는데, (그게 노동으로 바뀌면) 근로기준법도 노동기준법으로 바뀌지 않겠나. 그런 점에서 긍정적이다"라고 평가했다.

두 '구고신'은 그간 노동 현장에서 핍박받은 '노동'의 수난도 들려줬다. 이 센터장은 노동 교육 시간 만난 대부분의 이들이 "근로자는 뭔가 깨끗하고 세련된 사무직으로 느끼고, 노동자라고 하면 '못사는 사람' '투쟁' '과격' 이미지를 떠올렸다"라고 전했다. 김 소장은 '노동자'라는 말 자체가 과거 표준어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근로자'는 굉장히 불평등한 언어다. '사용자'는 있는데 (근로자처럼) '근사자'는 없지 않나. 불평등한 언어들이 그동안 노사관계를 숱하게 왜곡해 왔다. (근로에서 노동으로 바꾸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장차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김 소장의 말대로, 1992년까지만 해도 '노동자'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이유로 '근로자'로 고쳐 쓰기를 권고당했다. 불과 4년 전인 2014년에는 국립국어원이 노동절을 앞두고 '노동자'를 고쳐 써야하는 순화어로 안내해 논란에 오른 일도 있었다(관련 기사 : '노동자'는 순화 대상 용어? 노동절에 국립국어원 '망신').

그럼에도 '노동'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인식은 여전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비례대표)은 지난해 11월 23일 헌법개정특위 회의에서 "근로와 노동의 말의 맛이 다르다. 뉘앙스 차이가 있다"라면서 "지금 큰 문제없이 적절히 사용되고 있는 것을 굳이 노동으로 획일화하려는 것은 실익이 없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국립국어원은 2014년 4월 '노동자'를 '근로자'로 순화해 쓸 것을 안내했다가 논란에 오르자 다시 정정한 바 있다.
 국립국어원은 2014년 4월 '노동자'를 '근로자'로 순화해 쓸 것을 안내했다가 논란에 오르자 다시 정정한 바 있다.
ⓒ 국립국어원 트위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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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말이 바뀌면 삶도 바뀐다

"근면하다는 기준은 사용자가 세운다. 노동자더러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게 근로다. '야, 너 근면해라' 이런 식이지. 노동은 근면과 관련이 없다. 노동은 '내 일의 권리'에 관한 말이다. 이런 차이를 깨닫는 것은 (노동자들의) 의식 전환에 큰 도움이 된다. 노동자로서 자기 각성의 효과를 준다."

김 소장은 설령 노동자가 '자기 각성'을 못하더라도, 헌법의 변화는 노동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모든 법률은 헌법에 근거한 것이고 사회적 의식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라면서 "누군가 '근로고 노동이고 제대로 대우나 해주지'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법률적으로 봤을 때 장차 그렇게 말하는 분들께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낙관은 헌법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헌법은 가치의 문제다. '개별법이 이렇게 바뀐다'고 하면 할 말이 많아진다. '52시간 근로시간 단축'(관련 법률도 실제 현장에서는), 속된 말로 '개뻥'이다. (개헌으로 기본권이 바뀌면) 하위법도 다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논쟁이 생길 거라고 본다."

이 센터장도 "한순간에 바뀌는 것은 없다"라면서 헌법 가치를 뿌리내리 위한 또 다른 노력을 강조했다. 노동 교육을 금기시하는 학교 수업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권 교육이 학교까지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그러지 않고서는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헌법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노동 교육의 변화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확장] 노동이 꼭 '의무'여야 할까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21일 오전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할 개헌안 중 '지방분권'과 '경제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21일 오전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할 개헌안 중 '지방분권'과 '경제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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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장은 이번 개헌안 발표에서 특히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강조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등 보수진영에서 줄곧 '강성노조의 기업 죽이기' 프레임으로 공격받아온 소재였다. 그는 "정리해고 문제 등에서 직장 행동을 하도록 하는 근거가 되도록 헌법을 바꾸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수준의 임금' 강조에 자유한국당 등 보수진영이 '근로자의 창의성 저하'를 우려하는 것에는 "택도 없는 이야기"라고 맞받아쳤다.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김 소장은 "(창의성을 저하한다는 주장의) 실제 근거가 없다. 당장 그것 때문에 임금이 상승한 일도 없다. 설득력이 없는 말이다"라고 반박했다.

김 소장은 한 가지 아쉬움도 전했다. 현재 헌법에서 국민에게 부여하고 있는 '근로의 의무'를 굳이 의무로 강제하지 말자는 주장이었다. 새 헌법이 노동의 진짜 의미를 담겠다면, 의무가 아닌 권리로 구현했으면 한다는 바람이었다. 그의 물음표는 국가가 아닌, '노동을 하는 사람'에 맞춰져 있었다.

"논쟁적인 문제긴 한데. 노동을 굳이 의무로 규정지을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4차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근로가 의무인 것이 시대정신에 적정한 것인지 말이다. (의무 대신) 권리로 구현하면 되지 않을까? 사람이 노동을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자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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