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팬텀 스레드> 포스터

<팬텀 스레드> 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1954년 런던.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누나 시릴(레슬리 맬빌)과 함께 귀족과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의상실 '우드콕'을 운영하고 있다. 중요한 드레스를 완성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레이놀즈는 휴식을 위해 시골집으로 내려가고 그곳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던 알마(비키 크리엡스)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레이놀즈의 새로운 뮤즈로서 그와 함께하기 위해 런던으로 올라 온 알마. 그녀는 레이놀즈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도 언제나 일이 우선인 그와 함께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런 영화가 있다. 첫 번째 장면에서부터 온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빼앗긴 마음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쉽게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또 하나의 걸작이자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은퇴작 <팬텀 스레드>가 지난 8일 개봉했다.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연기와 감독의 세련된 연출을 글로 전달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영화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뻔하지 않은, 독특한 이야기 전개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어두운 방, 벽난로 앞에 앉아 꿈꾸는 듯한 미소를 짓는 알마의 얼굴이 따뜻하게 화면을 밝히면, 알마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문장으로 자신과 레이놀즈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내가 꿈꾸던 것을 이루게 해주었고 나는 그가 가장 열망하는 것을 주었지요. 바로 제 전부를요."

레이놀즈와 알마의 관계에 대한 정의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문장을 말할 때 알마의 표정에는 수차례 미묘한 변화가 있다. 부드러운 미소를 보면 레이놀즈와의 사랑이 진행형인 것 같고 체념한 듯 보이는 무표정을 보면 이들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처럼도 보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는 말을 할 때는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이 대사는 이 사랑에 대한 화자가 누구인지, 이들의 관계를 지탱해 나가는데 있어 누구의 힘이 더 큰지 말해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레이놀즈와 알마는 모두 입체적인 캐릭터다. 울퉁불퉁한 입체감이 아니라 깨끗하고 단정한 면들이 겹겹이 쌓여 이뤄진 이들 캐릭터는 영화를 뻔하지 않는, 독특한 이야기로 전개시킨다.

앞서 얘기 했듯이 레이놀즈와 알마는 손님과 식당 종업원으로 처음 만났다. 중년의 최고급 의상실 디자이너와 젊은 시골 식당 웨이트리스. 관계는 자연스럽게 레이놀즈 중심으로 형성되고 레이놀즈의 뮤즈로서, 연인으로서, 어시스턴트로서 알마는 레이놀즈 곁에 있게 되지만 레이놀즈와 시릴이 쌓아올린 '우드콕'이라는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언제라도 그가 자신을 버리지는 않을까 불안해한다.

'팬텀 스레드'는 젊고 가난한 여자가 부유한 남자를 만나 신분상승을 하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다. 관계에 있어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알마가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벌이는 위험한 사랑의 게임을 우아한 방식으로 서술한 이야기다.

레이놀즈는 함께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는 그만의 룰이 있고 조금이라도 여기에서 벗어나면 그의 예민한 신경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노트와 펜이 들려 있고 그의 정신은 온통 옷에 집중해 있다. 누구라도 자신의 집중력을 방해하는 것을 그는 견디지 못한다.

알마의 보살핌에서 사랑을 느끼게 된 레이놀즈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시릴은 레이놀즈의 가족이자 완벽한 파트너로서 그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의상실 고객관리는 물론이고 레이놀즈의 여자들까지 관리한다. 이들의 관계 또한 레이놀즈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시릴에게는 시릴만의 자리와 역할이 있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룰에 자신을 맞춰나가는 동시에 그의 사랑을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은 실망 뿐. 그의 견고한 룰은 그들 사이에서 장벽처럼 우뚝 서 그녀를 가로막는다.

레이놀즈와 알마와의 관계를 섹슈얼한 관계로 보기는 힘들다. 반쯤 벗은 알마의 몸을 보고도 레이놀즈는 그녀의 몸이 아니라 그녀를 위한 드레스에만 집중한다. 그의 성욕은 식욕으로 대치되고, 그는 알마에게 매력을 느낄 때마다 허기를 느낀다. 벨기에 공주가 웨딩 드레스를 맞추기 위해 의상실을 찾는 날 아침, 알마는 상기되어 심한 허기를 느끼는 레이놀즈의 모습에서 질투와 불안을 느낀다.

레이놀즈를 거쳐 간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도 뮤즈로서의 매력을 잃고 그에게서 버림받을까봐 두려운 알마는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레이놀즈의 싸늘한 반응에 상처받는다.

욕망의 수명은 짧다.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알마는 이때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약해졌을 때 그를 돌봐주는 유일한 사람이 되기로 말이다. 그리고 알마는 위험한 게임을 시작한다.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엄마의 머리카락을 자신의 재킷 옷감 안에 넣어 다니고 다닐 만큼 레이놀즈는 죽은 엄마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이 곁에서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 것이다. 그는 늘 엄마를 그리워한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애정은 그의 결핍이 어떻게 사랑으로 치환되는지 말해준다. 아파서 쓰러진 뒤 알마의 간호로 다시 일어났을 때, 그는 알마의 보살핌에서 자신이 늘 그리워했던 엄마의 사랑을 느낀다.

다른 누군가 때문에 일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레이놀즈는 그녀와 헤어지려고까지 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겪는 증상들(그러니까 그의 증언대로라면 일에 집중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생기고, 자신감은 떨어지는)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알마는 다시금 그가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그의 육체를 무너뜨린다. 레이놀즈는 "내가 아프기 전에 내게 키스해줘"라는 말과 함께 알마의 게임에 기쁜 마음으로 굴복한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고 밤새도록 구토를 할지언정 알마의 보살핌이 주는 안정감을 선택한 것이다. 레이놀즈가 회복하는 동안 알마는 그들의 미래를 꿈꾸고 알마의 무릎위에서 레이놀즈는 허기를 느낀다.

추신.
1. 레이놀즈 캐릭터는 영국 디자이너 찰스 제임스를 참고 했다고 한다.
2. 우아하고 아름다운 음악은 라디오 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 작품이다. 그는 2018년 오스카 영화제 음악상 후보에 올랐다.
3. 레이놀즈가 하루를 준비하는 과정, 의상실 직원들의 출근과 함께 손님을 맞이하고 그들이 옷을 입어보는 모든 과정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4. 어느 씬 하나 아름답지 않은 장면이 없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제 브런치 계정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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