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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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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주면 좋고 안 들어줘도 그만인 황당한 부탁.

한글을 깨우치고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문학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보다는 배고픔을 먼저 해결해야만 했었다. 이렇게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갈등의 모순 속에서 질 좋은 수첩과 멋진 펜 한 자루는 아버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따듯한 봄날, 라일락 나무 아래에 서면 라일락꽃의 그 달달한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면 향이 맡아지지를 않는다. 익숙해졌다는 말일 게다. 가장의 의무를 다하고자 희망은 희망일뿐이라는 비겁한 생각으로 문학에 대한 꿈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분수를 아는 훌륭한 아버지라며 자위를 하고는 했다.

새벽, 세수하다가 문득 거울을 보니 귀밑머리가 하얗다. 이제는 아버지도 세상을 단편이 아닌 통으로 보고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철들자 망령이라고 했던가? 아버지는 지금 문학을 꿈꾸던 풋풋했던 수므 살 시절로의 회귀를 꿈꾸며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그 시절 수첩과 펜 한 자루를 사기 위해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를 일 년 동안 걸어 다니기도 했는데 지금 아버지의 행동이 그렇다. 그토록 좋아하는 술까지 끊어가며 시집과 만년필을 사 모으는 중이다.

"하하하~."

편지를 쓰다 말고 글을 이어나가려니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구나. 아버지가 아직도 철이 덜 들었다는 생각은 둘째치고 네가 들으면 황당한 부탁이겠거니 싶어 나오는 헛웃음이다. 그렇다고 들어줄 수 없는 부탁 억지로 들어달라는 건 아니고 "우리 아버지는 이런 생각도 했었구나." 기억이나 해줬으면 좋겠다.

음, 아버지 아이패드에는 항목별로 2000여 개의 글이 저장되어있다. 아버지의 고향 이야기, 어렸을 적 고향 친구 이야기,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 그리고 너희들 이야기와 어좁잖게 시라고 써놓은 짧은 글 등등, 2,000여 개가 훌쩍 넘는 글들이 정리되어 있단다. 아이패드의 비밀번호는 너희 두 사람 성은 빼고 이름을 영문으로 치면 열린다.

아버지가 왜 이렇게 주책을 떠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이왕 망신살 뻗은 거 끝까지 가보자. 아버지 살아서 정성껏 글을 써 모을 테니 이다음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너희들이 잘 간추려서 아버지의 글을 활자화시켜보지 않으련? 책으로 출판해보면 어떻겠냐 묻고 있는 거다. 문득, 이렇게라도 해서 너희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에라 관둬라. 없던 일로 하고 아버지가 시 한 편 소개하마. 시에 나오는 아버지도 너의 아버지처럼 소심한 아버지였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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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만년필

한혜영

만년필 늘 품고만 다녔을 뿐
그것으로 뭔가를 적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함부로는 쓸 수 없는
칼이나 권총쯤 되는 줄 알았어요
우유부단의 수뇌부였던 아버지

그 흔해터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적지 못했던
어린새끼들 데리고 어떡하든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유언장 작성 따위는 더구나 엄두도 못낸

아버지 돌아가시자 어머니
만년필 쑥 뽑아들더니 힘껏 내던져버렸습니다
한평생 가슴에
꽂았다 뺐다 하면서 만지작거리기나 했을 뿐인

아버지의 마음은 아랫집 함석지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왈칵 쏟아내면서
딱 한번
일필휘지로 시원스럽게 육두문자를 휘갈겨 썼습니다

생에 대한 야유조차도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끝내 할 수 없었던 당신

아버지의 마음을 유품으로
챙겨 드리지 못한 점을 이해하세요.
저승에 가서도 아버지, 그 약해빠진
마음을 품고 다니며 전전긍긍할까봐 그랬습니다

시집 <올랜도 간다> 중에서

(사진은 아버지가 일년 동안 소비하는 만년필 잉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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