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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내우가 26년간 쓴 일기를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과에서 4권으로 집대성한  책들
 최내우가 26년간 쓴 일기를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과에서 4권으로 집대성한 책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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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으로부터 최원장 부친 유고집인 <월파유고>와 26년간의 일기를 모은 <창평일기>를 읽으며 며칠간 가벼운 몸살을 앓고 있다. 몸살은 육체적 피로로 팔다리가 쑤시고 오한이 나거나 기운을 차리지 못함을 말한다. 하지만 내가 앓는 몸살은 정신적 몸살이다.

학교라야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한 촌부가 70여년 동안의 기록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사사를 받은 흔적은 없다. 공명심으로 기록한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한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식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 기록한 것도 아니다.

잉크를 적셔 쓰던 펜글씨나 볼펜으로 쓴 일기에는 그날의 사건이나 기분에 따라 글자의 크기나 굵기, 글씨체들이 달라진다. 기분이 상해 술 마신 날에는 일기장에 쳐진 줄을 무시하고 함부로 쓴 글씨체로, 농사 계획이나 집안 행사 등에 관한 일정은 반듯한 글씨로 썼다. 주요 사안들에 대해서는 별지에 작성해 그 날짜 일기 옆에 붙여 놓기도 했다.

<창평일기>, 최내우가 26년간 매년 한 권씩 쓴 일기를 모은 일기장

<창평일기>는 전라북도 임실군 신평면에서 일생을 살았던 최내우(1923~1994)가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다. 최내우는 1923년 임실군 삼계면 신정리 덕임마을에서 삭녕 최씨인 최병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 살 때 신평면 창평리로 이주해서 1994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한 마을에서 살았다. 특히 저자가 후처 소생으로 형제와 집안으로부터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일제강점기 치하의 혹독한 가난을 경험했다.

그의 일기가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나 소설가들의 글보다 친근하게 느껴진 것은 내 어린 시절에 어른들한테 수없이 들었던 말을 글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스테파니 도우릭의 <일기,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에서 정의한 일기의 내용이다.

"일기란 잘 쓰는 게 아니라 자주 쓰는 것이다. 심지어 쓸 게 없는 사실마저도 일기의 소재로 삼으라."


스테파니 도우릭의 일기 쓰는법을 배웠을까? 그야말로 짧고 사소한 기록도 있다. 1972년 5월 28일 일기다.

"공장에서 기계수리. 오후에는 천변에서 놀고 석양에는 성강에 갔다."


<카프카의 일기>에서는 "맞춤법이나 문법, 단정한 글씨, 어순, 시간순서, 완성도 따위는 일기쓰기에서 별로 중요치 않다"고 적혀 있다. 그의 일기를 읽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한문과 한글, 맞춤법 틀린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일기가 의미를 지닌 것은 가공되지 않은 생생한 글이기 때문이다. 

 최내우가 잉크로 쓴 일기 모습
 최내우가 잉크로 쓴 일기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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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기 속에는 처절한 가난과 멸시를 딛고 일어나 주위의 신망과 도움을 받으며 유지가 되어가는 과정을 낱낱이 그리고 있다. 그는 삭녕 최씨 집안의 후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멸시와 혹독한 가난을 체험했다. 1943년 보리고개를 겪던 시절 최내우가 어머니와 나눈 대화내용이다.

"형우야(나중에 내우로 개명), 한 보름만 지내면 풋보리라도 먹을 수 있는데, 그 사이 큰일 나겠다. 서숙 몇 되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는 수 없던 그는 "식량이래야 쌀은 없고 수수와 서숙인데 쑥을 캐다가 개떡을 쪄먹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시절 구장은 공출이 없었다. 뾰쪽한 수가 없던 그는 구장인 이복형님 집으로 찾아가 돈 빌려줄 것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양식이 떨어져 내일 몇 사람들과 김제로 쌀을 팔려고 마포 두 필을 가지고 가는데 여비가 없으니 돈 2원만 주시지요'라고 했는데 '지금 돈이 없다'고 하셨다. 웬만하면 형제간에 도움을 줄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쉽고 섭섭한 마음도 들었으나 알고 보면 가혹한 폭정아래 민심이 변한 것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최내우는 22세 되던 해에 해방을 맞았고 6.25동란 직전인 1949년에 마을 구(현 이장)장에 당선되어 1965년까지 17년 동안 이장을 지냈다. 최내우가 구장이 되기 1년 전 여순사건이 발생해 좌우익간에 이념갈등이 폭력적으로 드러나던 시기였다.

이어진 한국전쟁시기 우익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음에도 좌우익 사이의 갈등 조정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마을에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는 집안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집안의 애경사, 제사 등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이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마을 개발위원장, 정화위원장, 산림계장, 학교 운영위원장, 동창회장, 공화당 군위원 등 각종 공식 비공식 직책을 맡아 지역 유지가 됐다.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11명의 자녀를 전주로 유학시켰다.

매일 신문을 읽으며 신문명에 눈을 뜬 선구자

 생전의 최내우 모습
 생전의 최내우 모습
ⓒ 최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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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 부양의 기초는 처가의 도움을 받아 시작한 방앗간 운영이다. 뿐만 아니라 양잠과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매입한 부농이기도 하다. 그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하기도 했지만 신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선 선구자이기도 하다. 마을 최초로 TV를 놓고 경운기도 샀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자 마을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고 변화를 주도한 인물이다.

한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활동하던 최내우의 일기에는 예술적 기교나 난해한 문장은 없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겪었던 애로사항을 낱낱이 기록했다. 1969년 4월 24일 일기에는 면서기였던 장남 최성미가 군에 입대하던 날에 쓴 일기로 자식에 대한 연민을 엿볼 수 있다. 

"어려서부터 약 22년간 길러 군에 보내니 서운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면에 간 걸로 인정하면 되지. 그러나 자전거로 곧 들어올 것만 같다"


자녀들의 성적이 나쁘거나 행실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혹독하게 훈육했으며 가족의 태도나 행실에 대해서도 권위적인 태도를 보였다. 1969년 9월 26일 일기에는 궤짝 속에 넣어둔 5000원 중 1500원만 남아있어 자식들을 모두 소집해 돈의 행방을 물었지만 모두 모른다고 했다. "이쯤 되면 본인은 허수아비 가장이며 자식의 장래가 실패할 것으로 보고 재경고 했다"며 쓴 기록이다. 

"현금으로 500원 권 3매 잔금 합해서 3500원을 가져오지 않으면 아버지는 자살하거나 가출하겠다. 해지기 전에 현금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버지는 폐인이니까 자살하거나 가사에 무용지물이라 세상을 그만두니 고백해라."


새해 첫날의 일기를 쓰기 전에는 일기장 내지에 지난해의 중요한 사건이나 수입 지출을 결산하고 새해 소망과 목표를 기록해 놓았다.

"희망은 자식들 성공. 적기 실시하면 다수확하고 실기하면 저수확한다. 수입을 최고로 올려놓고 지출은 최고로 줄여보자."


 최내우 장남인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이 아버지가 쓴 26권의 일기를 들고 있다. 최성미 원장은 19살 때인 1967년에  면서기가 되어 2008년(41년간 재직) 면장으로 퇴직해 현재 임실문화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최내우 장남인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이 아버지가 쓴 26권의 일기를 들고 있다. 최성미 원장은 19살 때인 1967년에 면서기가 되어 2008년(41년간 재직) 면장으로 퇴직해 현재 임실문화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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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면서 과거와 끊임없는 대화를 하며 하루를 반성하고 미래를 계획했던 촌부는 나이가 들어 병원 출입이 잦았다. 더 많은 기록과 후손들에게 유익한 기록을 남기길 원했던 그는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94년 6월 17일 일기다.

"15일 만에 임실 병원에 다녀왔다. 트랙터 창고를 지었다. 정원 정리했다. 담배 밭에 제일 못난 담배 모종에 요소를 시험적으로 투하했다. 장마 지면 상한다 했다. 성동이는 상가집에서 지내드라. 내 병세는 양호했다. 분명히 알아보게 되었다. 이러한 조시로만 간다면 수명 연장은 자신 있다."


기록은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시스템을 유지 개선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최내우의 <월파유고>와 <창평일기>는 당시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회학적 자료이다. 한 촌부가 쓴 70년간의 기록이 작아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최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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