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올 겨울은 한파 때문에 추워서, 날이 풀리면 미세먼지가 심해서 겨울잠 자듯 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에너지 넘치는 59개월 아들과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실내 키즈 카페 뿐. 돈을 내고 인공조성된 놀이터가 싫어서 겨우내 집에 있었다. 그 대가로 소꿉놀이, 유치원놀이, 식당놀이 각종 놀이를 섭렵하며 입에서 단내가 날만큼 수다를 떨었다. 겨울이 빨리 가기만을 바라던 어느날 잠시 미세먼지 없는 따뜻한 날이 찾아왔다.

겨울 스포츠인 눈썰매를 한 번도 즐기지 못하고 한파에 떨고만 있던 겨울을 보상해주려는 마음에 아이와 단둘이 집 근처 놀이공원에 갔다. 장갑, 마스크, 스키바지, 발열내복, 보온병까지 철저히 준비했다. 작년 겨울 속초에서 눈썰매 타며 좋아하던 아이 모습을 그리며 놀이공원에서 눈썰매도 타고 토마스 기차도 타고 신나게 보낼 하루에 설렜다.

아이도 눈썰매 타러 간다고 좋아했다. 즐거움은 잠시 뿐 눈썰매장에 도착해 하얀 언덕을 본 순간 아이가 얼었다. 언젠가 눈이 많이 내려 아빠가 아파트 놀이터에서 썰매개가 되어 끌어 준 평지에서 타는 썰매를 타고 싶다고 한다.

"동글이 5살 때 속초 가서 아빠랑 같이 썰매 슝 타고 내려 온 거 기억나? 그때 재미있게 탔잖아. 이것도 그거랑 같은 거야. 한 번만 타보자."

작년 겨울 아빠랑 함께 탔던 눈썰매를 상기시키며 아이를 달랬다. 무언가 시도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아이라 그런거려니 하고 어르고 달래 유아용 슬로프에 올라갔다. 학원에서 단체로 온 우리 아이와 비슷한 또래 아이들은 모두 혼자 썰매에 앉아 있었다. 동글이도 혼자 타는 게 처음이라 그렇지 두 번째부터는 즐거워할 거라 생각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고 진행요원이 노면 상태가 안 좋으니 썰매를 힘껏 밀라고 했지만, 세게 밀면 아이가 무서울까봐 살짝 밀었다. 썰매는 다섯 발자국 쯤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진행요원이 다가가 썰매를 힘껏 밀었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썰매를 따라가며 아이 이름을 불렀다. 썰매에서 내려 진행요원 안내에 따라 출구로 나가는 아이 뒷모습을 보면서 계속 이름을 불렀다. 눈앞에 아이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내가 더 불안해졌다. 한달음에 출구로 달려갔다. 아이가 나를 보자 멈춰섰다.

"내 썰매가 멈췄는데 아저씨가... 으아앙"

온 얼굴을 찌푸리며 우는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저씨가 세게 밀어서 무서웠다며 우는 아이가 마냥 귀여웠다.

"아저씨가 밀어서 무서웠구나. 아저씨가 세게 밀었어?"

이날 동글이는 더 이상 썰매를 타지 못하고 사파리 버스와 토마스 기차, 회전 목마만 즐기고 집에 왔다. 놀이공원에 있는 동안 계속 썰매 타면서 무서웠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처음 한두 번은 많이 무서웠겠다며 받아주었다. 점차 이야기가 반복되는 횟수가 올라가자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결국 아이에게 "썰매가 무서웠던 걸 아저씨 핑계 대지 말라"고 화를 냈다. 아이는 더 이상 썰매 아저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밤에 아이를 재우려고 누웠는데 한 번만 더 참아 줄 걸 왜 화를 냈을까 싶어 아이에게 미안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아이를 쓰다듬는데 문득 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잠든 아이를 두고 방을 나와 거실 책장에서 <머리에 뿔이 났어요> 책을 꺼냈다.

<머리에 뿔이 났어요>
 <머리에 뿔이 났어요>
ⓒ 한길사

관련사진보기


어느 목요일 아침 일어나 보니 이모겐 머리에 뿔이 나 있다. 옷 갈아 입기 어렵고 방문을 빠져 나갈 때도 옆으로 나가야 한다. 머리에 뿔이난 이모겐을 보고 엄마는 기절을 한다. 원인을 파악하고 뿔난 모습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의사선생님도 부르고, 교장 선생님도 불러보지만 모두 알아내지 못하고 돌아간다.

이때 이모겐의 동생 노먼이 백과사전에서 '소아 사슴뿔병'을 찾아낸다. 엄마는 또 한 번 기절한다. 심각한 엄마와 달리 이모겐은 머리에 난 뿔을 즐긴다. 가정부 언니 루시가 수건을 널 수 있게 해주고, 요리사 퍼킨스 부인이 만들어 걸어준 도넛을 새들에게 나눠주고 가족들에게도 권한다.

이모겐 머리에 난 뿔을 보기 싫은 엄마는 모자 디자이너를 불러 뿔을 가려보려 하지만 다시 한 번 기절하게 된다. 길고 수선스런 하루를 보낸 이모겐은 식구들한테 뽀뽀를 하고 자러 간다. 금요일 아침 이모겐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 뿔이 사라지고 없다. 아침을 먹으러 내려와 빼꼼히 얼굴만 내민 이모겐을 보고 뿔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식구들은 모두 기뻐한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이모겐은...

머리에 뿔이 사라진 이모겐이 금요일에 갖게 된 건 무엇일까? 무엇이든 이모겐은 전날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다. 이모겐처럼 우리 아이들도 매일 달라진다. 변화와 성장이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 아이들은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오늘을 산다.

<머리에 뿔이 났어요>
 <머리에 뿔이 났어요>
ⓒ 한길사

관련사진보기


이 그림책에 나오는 엄마가 머리에 뿔난 이모겐을 인정하지 않듯이 어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에서 벗어난 아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썰매를 무서워하는 동글이를 인정하지 않은 나도 이모겐 엄마랑 같았다.

눈썰매를 무서워하는 아이를 보며 "얘는 왜 이렇게 겁이 많을까? 다른 애들처럼 신나게 좀 타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당시에 보지 못 했을 뿐 이런 마음으로 아이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니 썰매 아저씨한테 핑계를 댄다고 생각하고 말로만 '무서웠구나'라며 공감해 주는 척하고 속으론 참은 거다. 참는 건 한계가 있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내일, 언젠가 '벌컥' 하게 된다.

어떤 일을 할 때 해보기 전에 겁내고 긴장하는 아이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다. 쓸데없는 긴장으로 중요한 시험이나 일을 망친 적도 있고, 어떤 일에 도전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내 자신의 모습을 싫어하고 부정하다 보니 아이에게 발견되는 비슷한 부분에 화가 난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화내는 엄마. 뿔을 보고 기절하는 엄마가 나였다.

머리에 뿔난 이모겐을 보며 '깔깔' 웃는 우리 아이 머리 위로 뿔이 나 있다. 아이는 힘차게 썰매를 밀어준 아저씨에 빗대어 자신의 뿔을 드러냈다. 두려움, 긴장, 불안이라는 이 뿔을 나는 자르려고만 했는데, 이젠 그냥 바라봐야겠다.

뿔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놀라거나 기절하지 않게 아이 머리보다 내 머리에 있는 뿔을 먼저 바라보고, 자르려는 노력을 내려 놓아야겠다. 뿔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수선스럽게 살지 몰라도 그 나름의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들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눈썰매 타던 날 느꼈던 감상을 그림책을 보며 다시 한 번 되돌아 봤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글을 올립니다.



머리에 뿔이 났어요 - 소년한길 유년동화 8

데이비드 스몰 글 그림, 김종렬 옮김, 한길사(2002)


태그:#머리에뿔이났어요, #부정적 모습, #눈썰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