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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4년 '서울 정도 600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행사와 함께 대대적인 홍보가 진행되었다. '서울 정도 600주년'은 서울을 나라의 도읍으로 삼은 것이 600년이 되었다는 의미로, 조선의 개국과 함께 1394년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것을 기점으로 삼았다. 분명 600년이 작은 세월이 아니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서울 정도 600년'이라는 문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이보다 훨씬 전인 기원전 18년 서울을 도읍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은 백제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만큼 백제는 우리에게 잊힌 역사였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늘은 사라져버린 백제의 첫 도읍인 하남 위례성에 대해 알아보고, 유력한 후보지로 여겨지는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실전된 하남 위례성을 찾아라!

분명 역사 속에 실체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린 하남 위례성(이하 위례성)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인 <삼국사기>에서 조차 위례성은 위치가 분명하지 않고, 이름만 남아있는 지명에 위례성을 포함시켰다. 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도 위례성의 위치를 몰랐다는 이야기다.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 중 한 곳인 풍납동토성
▲ 풍납동토성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 중 한 곳인 풍납동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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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함락이 되는데, 당시 백제의 왕이던 개로왕은 포로로 잡혀 '아단성'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그 뒤 고구려는 위례성을 파괴한 채 물러가버렸고, 개로왕의 아들 문주가 신라의 구원병 1만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위례성은 폐허가 된 상태였다. 따라서 문주왕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위례성을 포기하고, 고구려의 재침을 우려해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그리고 백제는 다시 위례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처럼 사라진 위례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 스님은 위례성의 후보지로 천안 직산을 추정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의 경우 <아방강역고>를 통해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를 유력한 후보지로 봤다. 하지만 '이성산성'의 발굴조사 결과 신라의 유물이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된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고고학적으로 볼 때 이성산성을 비롯한 춘궁동 일대가 위례성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

한때 위례성의 후보지로 거론된 이성산성, 발굴조사 결과 신라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 이성산성 한때 위례성의 후보지로 거론된 이성산성, 발굴조사 결과 신라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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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나라의 도읍이 산성인 경우는 고구려 초기 도읍인 '오녀산성'이나 백제의 두 번째 도읍인 '공산성' 등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한 나라의 도읍은 정치, 외교, 국방 및 교역, 상업 등 모든 분야에서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평지성이 중심에 있고, 전쟁 등을 대비한 산성이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신라의 '월성'과 '명활산성'을 들 수 있다.

위례성의 후보지로 거론된 풍납동토성

최초 위례성의 후보지로 거론된 곳 중 한 곳이 몽촌토성이다. 이 같은 추정의 배경에는 몽촌토성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 때 쌓은 토성이라는 점과 초기 백제시기의 유물의 출토가 된 점이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지난 1997년 풍납동토성 내 공사 현장에서 초기 백제의 유물이 다량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풍납동토성은 단번에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주목을 받게 된다.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呂’자 형태의 건물지
▲ 경당지구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呂’자 형태의 건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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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 현장 중 한 곳인 경당지구에서 '呂'자 형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제사 시설로 추정된다. 또한 44호 건물지의 경우 최소 길이가 18m에 달할 정도로 큰 건물지로 확인이 되었으며, 우물지에서 제의용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토기류와 말머리 뼈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기와의 출토는 건물의 용도와 관련해 다양한 추측을 낳게 한다.

이와 관련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와 <신당서> 동이열전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에서 기와 건물은 사찰이나 사당, 왕궁과 관청 등에서만 쓰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동시대의 백제와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 추정할 수 있는 대목으로, 이러한 범주에서 보자면 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다량의 기와는 최소한 이곳에 관청이나 사당 등의 건물이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곧은입항아리에 새겨진 '대부(大夫)', 하지만 백제에 대부라는 관직은 없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직접 촬영
▲ 곧은입항아리 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곧은입항아리에 새겨진 '대부(大夫)', 하지만 백제에 대부라는 관직은 없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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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곧은입항아리에서 '대부(大夫)'라는 명문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백제의 관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경우 풍납동토성이 위례성임을 입증하는 간접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백제의 관직 중 '대부'라는 관직명이 등장한 예는 없다. 다만 고구려의 유물로 아차산 시루봉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편에 '대부정대부정(大夫井大夫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사례가 확인된다는 점은 참고해볼 만하다.

한편 풍납동토성은 성벽의 전체 둘레가 약 3.5km에 성벽의 폭이 43m, 성벽의 최상부 높이는 9.5m에 달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토성 가운데 큰 규모에 속한다. 또한 고대 사회에서 도성의 건설은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야 가능했다는 점에서 이 정도의 규모로 축성하기 위해서 많은 인력과 물자가 필요했다는 점은 당시 백제의 국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가 쌓은 성의 특징 중 판축기법과 부엽법을 활용한 토성의 예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 판축기법과 부엽법 백제가 쌓은 성의 특징 중 판축기법과 부엽법을 활용한 토성의 예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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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풍납동토성이 위례성일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까지 부여 관북리 유적이나 익산 왕궁리 유적처럼 풍납동토성에서 왕궁으로 특정할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풍납동토성 = 위례성'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왕궁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을 경우 풍납동토성을 두고 벌어지는 위례성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풍납동토성과 함께 백제의 성곽으로 주목받는 몽촌토성

앞선 풍납동토성이 백제의 도읍인 위례성으로 추정이 되면서, 인근에 자리한 몽촌토성 역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삼국사기> 개로왕 조에는 위례성이 북쪽 성과 남쪽 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몽촌토성, 풍납동토성과 함께 한성백제 시기의 대표적인 문화재다.
▲ 몽촌토성 몽촌토성, 풍납동토성과 함께 한성백제 시기의 대표적인 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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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을 대입할 경우 기록의 재구성이 가능해지는데, 풍납동토성(북성)에 있던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입 소식에 아들인 문주를 신라로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불과 7일 만에 풍납동토성이 함락되면서 몽촌토성(남성)으로 피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몽촌토성은 1980년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시기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면서 한성백제 시기의 성으로 확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몽촌토성의 유물 중 '관(官)'이 새겨진 명문기와 편이 출토되기도 했으며, 북문지에서 성 내부로 이어지는 도로 유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판축기법으로 쌓은 몽촌토성의 성벽과 함께 초기 방어용으로 쓴 목책을 볼 수 있다.
▲ 몽촌토성과 목책 판축기법으로 쌓은 몽촌토성의 성벽과 함께 초기 방어용으로 쓴 목책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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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몽촌토성의 성벽에서 목책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목책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몽촌토성은 풍납동토성과 함께 한성백제 시기를 규명해줄 문화재이자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주목해볼 만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 포스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백제역사문화, #풍납동토성, #몽촌토성,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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