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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에 오랜만에 로그인을 했다. 쪽지가 한 통 와 있다고 알람표시가 떴다. '누구지? 광고인가?', 무심히 쪽지를 열었다. 긴 글은 아니지만, 짧지도 않은 그 쪽지를 2,3번 읽었다. 그리고 글이 적고 싶어졌다.

쪽지를 보내 주신 분은, 내 동생에 관한 글을 읽었다고 하셨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지 9년이 지났는데, 내가 쓴 옛날 글을 읽고 위안을 받으셨다고 했다. 무슨 단어로 검색을 하면, 세상 떠난 동생에 관한 글이 검색이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래되고 잊힌 기사가 누군가에게 읽혀 힘이 되었다니, 신기하면서 고맙다.

그 분은 1월 초에 여동생을 하늘로 보내셨다고 했다. 내가 세 자매였고, 동생이 막내였던 것처럼, 그 분도 세 자매이고 막내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동생은 위암이었고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가 진행되어 수술을 크게 받았는데, 그 분의 동생도 위암이었다고 하셨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동생은 '앞으로 1년'이라는 기한을 선고 받고도 4년여를 더 살았다면, 이 분의 동생은 진단을 받고 1년 밖에 더 살지 못하신 것 같다. 

많이 힘들 때 내 글을 읽으셨다고 했다. 동생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고, 검색을 했고, 내 글을 발견했고, 위안을 받으셨다고 했다. 동생을 보낸 지 꽤 시간이 흘렸는데, 내가 잘 지내는지 궁금해 하셨다. 

각자의 아픔은 각각의 크기가 있으니, 그 분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가늠되진 않는다. 그러니 그 아픔이 언제쯤 사라질지, 사라지기나 할지 말씀 드릴 수도 없다.

동생이 떠오를 때

'내 동생은 서른이 되지 못한 채 2009년 세상을 떠났다.'

동생의 죽음은 짧은 이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된다. 담담히 이 문장을 적으면서 다음 문장을 적으려고 했는데, 나는 결국 지금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어떤 아픔들은 결코 극복이 되지 않나 보다. 그 고통이 떠오르지 않게 꽁꽁 싸매두고 있어서 내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그러니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기도 조심스럽다.

동생이 떠난 다음 해 2010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아빠가 세상을 떠나셨다. 5년 사이에 장례식을 3번 치렀다. 내 나이 서른 다섯 무렵까지 모두 일어난 일이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우울하고 화가 났다. 별 일도 아닌 걸로 호들갑 떠는 지인들의 일상 얘기도 듣기 싫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나보다 더 심한 고통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명절이 되면 엄마의 부침개를 생각하고 맥주를 박스채로 사다놓고 우리를 기다렸던 아빠를 생각한다. 어버이날이 되면 아빠가 돌아가시던 그 해, 같이 먹었던 수타 짜장면을 생각하고, 마지막일지도 모를 아빠의 모습을 계속 카메라로 담던 언니를 기억한다. 

동생은 언제 떠오르나? 여행을 다닐 때마다 나는 동생을 생각한다. 여행 계획을 짤 때부터 '동생이 있었으면 진짜 좋아할텐데' 생각한다. 동생은 여행을 좋아했다. 혼자서도 잘 다녔다. 항암 치료를 중단하고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하자, 비행기 티켓부터 예약했다. 

어느 날 동생이 여행을 다니는 이유를 말해 준 적이 있다. 동생은 대학을 가지 않았다. 그 결정이 자의였다 해도, 어쨌든 콤플렉스가 되었나 보다.

"대학 안 나온 걸 사람들한테 말할 때면 괜히 내가 의기소침해지는데, 여행을 다니면 그래도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져."

하고 동생이 말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동생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럼 내가 같이 많이 다녀줄게."

어차피 동생은 2009년이면 세상을 떠나니까 많이 다녀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때 나는 여행 다니는 걸 낭비같이 여겼다. 동생이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내가 거절해서 동생 혼자 떠났던 여행들을 떠올리면, 내가 너무 밉다.

동생 없이 동생과 여행하기

동생을 보낸 지 내년이면 십년, 그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다. 동생은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여행이 좋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솔직히 그런 생각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라도, 동생이 보고 싶어했던 넓은 세상을 내 눈으로라도 조금 더 보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지난해 11월에는 오키나와와 그 아래 이시가키 섬으로 10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이시가키 섬에 머무르는 동안 4일 내내 비가 쏟아졌고,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겨우 비가 멈췄다. 구글 지도를 보고 '토미의 빵' 집을 찾아갔다. 후기 글에서 누군가 '은둔자의 가게' 같은 곳이라고 했다. 

'토미의 빵' 집은 가이드 북에 나오지 않는 곳이고, 구글 맵을 뒤적이다 발견한 곳이다. 후기도 별로 없고, 빵 종류도 별로 없다 하고, 찾기도 쉽지 않다는 작은 빵집을 굳이 찾아가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쭉 비가 내리다 이제야 비가 그쳐 둘려 볼 곳도 많은데, 굳이 그 빵집을 찾아가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토미의 빵집 전경
 토미의 빵집 전경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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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깊은 숲 속 어딘가에서 빵을 파는 빵집, 아무도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빵집.

'은둔자의 가게' 같다는 그 빵집은 한참을 헤맨 뒤에야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곳에 과연 가게가 있기는 한 걸까? 그런 마음이 들고도 그 의심을 꾹 누른 채로 끝까지 가봐야 나오는 그런 곳에 있었다.

일층짜리 하얀색 작은 집. 입구를 찾아서 건물을 따라 돌다가 창 너머로 빵을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혼자서 빵 반죽을 만들고 계셨다. 다시 반 바퀴를 도니 빵집 입구가 나왔다. 입구 문은 손님을 반기지 않는 듯 굳게 닫혀 있었지만, 영업중이라는 팻말을 봤으니 문을 열었다. 빵집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가게 안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빵을 두 개 고르자, 할머니는 의자에서 일어나 빵을 봉투에 담으셨다. 기념으로 가져가려고 영수증을 부탁드렸더니, 손으로 적어주셨다. 감사하다고 말을 하고, 가게 문을 나올 때까지 손님은 우리 뿐. 할머니는 말씀이 거의 없으셨고, 다만 계산을 하고 영수증을 적어주셨을 뿐이다.

토미의 빵집의 빵
 토미의 빵집의 빵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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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을 적으시는 주인 할머니
 영수증을 적으시는 주인 할머니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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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나와 사진을 찍었다. 빵집 간판 밑에 동생이 앉아있고, 내가 그 모습을 찍고 있는 상황을 나는 상상한다. 동생이 "정말 좋다, 빵도 맛있고" 하고 신이 나서 떠드는 모습을 실제인 것처럼 나는 떠올릴 수 있다. '토미의 빵' 집은, 동생이 아주 좋아할 그런 곳이다. 나는 동생과 함께 여행을 한 셈이다.

영화 <코코>를 보면, 살아있는 누군가가 그 죽은 이를 기억하는 한 그들은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여행을 다닐 때마다 동생을 떠올리고, 그 동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아직은 동생이 사라진 게 아니다.

나는 굳이 동생을 잊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내 삶에 그들을 불러내 함께 하고자 한다. 떠나간 사람들이 살고 싶었던 것만큼 애써서 살아가려고 한다. 내게 쪽지를 주셨던 분,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분들, 밥 잘 먹고 애써서 살아가자고 말씀드리고 싶다.


태그:#동생, #여행, #일본 여행, #토미의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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