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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오래된 정사로 인정받고 있는 <삼국사기>는 상대적으로 신라의 기록이 많은 편이다. 기록이 많은 이유에 대해 일부에서 김부식이 신라계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신라에 비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상은 기록의 부재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를 알 수 있듯 김부식은 <삼국사기> 곳곳에 기록이 없어 알지 못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게다가 신라의 존속 기간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더 길었기 때문에 신라의 기록이 많은 건 이상한 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신라의 기록 중 무열왕과 문무왕의 기록은 열전에 수록된 김유신의 기록과 함께 압도적으로 많다. 따라서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이 되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오늘은 이러한 문무왕의 치세 중 굴욕적인 취리산 회맹과 나당전쟁의 과정을 살펴보고, 문무대왕릉이 조성되는 과정을 통해 당시의 시대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취리산 회맹과 문무왕의 굴욕

661년 문무왕(재위 661~681)이 왕위에 오를 당시 신라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백제가 멸망했지만, 옛 백제의 지방을 중심으로 복신과 도침의 활약 속에 '백제부흥군'이 재건되었다. 여기에 왜에 있던 왕자 부여풍이 돌아와 백제부흥군의 왕이 되면서 백제는 다시금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흔히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이 항복한 순간 끝이 났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처럼 백제의 멸망을 백제부흥군의 소멸로 본 견해도 있다. 하지만 백제부흥군은 내분을 통해 스스로 자멸하면서, 663년 백강구 전투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문무대왕릉 봉길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의 모습
▲ 문무대왕릉 봉길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의 모습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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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옛 백제 지역을 두고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본래 신라와 당나라는 밀약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킬 경우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에 귀속한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신당서> 백제전은 당나라가 입장을 바꿔 옛 백제의 땅에 웅진, 마한, 동명, 금연, 덕안 등의 5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부흥군이 소멸한 직후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에게 웅진도독의 직위를 제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665년 당나라의 강압에 의해 취리산에 도착한 문무왕은 웅진도독부의 수장인 부여융과 당나라의 사신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궤와 함께 회맹의 의식을 가졌다. 회맹은 당나라가 은혜를 베풀어 부여융에게 선대의 제사를 받들고, 옛 백제의 영토를 보전하게 해주었다는 내용과 문무왕에게 묵은 감정을 버리고 화친을 요구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결국 웅진도독부는 새로운 백제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당나라의 전형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문무왕에게 굴욕을 안겨주며, 백마의 피로 입술에 발랐던 이 의식이 바로 취리산 회맹이다.

취리산 회맹지 취리산 회맹지, 공주과학생명고등학교 뒤에 있는 치미산에 세워진 표석이다. 회맹지와 관련해 연미산이라는 주장 역시 만만치 않다.
▲ 취리산 회맹지 취리산 회맹지, 공주과학생명고등학교 뒤에 있는 치미산에 세워진 표석이다. 회맹지와 관련해 연미산이라는 주장 역시 만만치 않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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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나라의 강요나 다름이 없었던 이날의 회맹은 이후 지켜지지 않은 약속으로 남았다. 무엇보다 굴욕을 맛본 문무왕은 당나라를 몰아내지 않고는 신라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때부터 이미 나당전쟁의 서막이 준비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당전쟁의 발발과 문무왕의 화전양면 전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그 동안 고구려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기에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던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 역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풍전야의 상황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선제공격을 한 건 신라였는데, 670년 신라가 요동지역에 대한 공격과 함께 나당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기세가 오른 신라는 671년 옛 백제 지역의 영토를 차례로 점령해갔다. 하지만 당나라가 반격을 가하면서 672년 석문 전투에서 신라가 대패를 당했다. 이때 문무왕은 당나라에 사죄사를 보내며 죄를 청하는 한편, 물밑으로 전쟁 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 일종의 화전양면 전술을 구사했던 문무왕은 옛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지원하며 당나라 축출이라는 공통된 목적의식을 만들었다.

익산토성 익산토성, 보덕국의 치소로 알려져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덕성으로 등장하고 있다.
▲ 익산토성 익산토성, 보덕국의 치소로 알려져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덕성으로 등장하고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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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고구려의 보장왕의 서자로 알려진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한데 이어 지금의 익산의 금마저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게 했다. 이와 함께 불교의 힘을 빌려 당나라의 축출을 염원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호국사찰이 바로 사천왕사였다. 따라서 나당전쟁은 신라의 국력을 총 결집하고, 옛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이 함께 당나라로 축출했던 일대의 사건으로 볼만하다.

이처럼 당나라와의 기나긴 전쟁은 675년 육지에서의 매소성 전투와 676년 바다에서의 기벌포 해전에 승리를 끝으로 신라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같은 여파로 당나라는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이동시켰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옛 고구려 지역에서 힘의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이같은 힘의 공백은 훗날 발해가 건국되는 토대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 역사는 새로운 한 시대인 신라와 발해가 성립하는 남, 북국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무왕은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의 승리를 통해 큰 영향력과 상징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문무대왕릉의 조성과 문무왕릉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자리한 봉길해수욕장은 '문무대왕릉(=대왕암)'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 떠 있는 문무대왕릉은 문무왕의 시신을 산골한 장소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문무왕의 시신은 화장해 동해 어귀 큰 바위에 장사를 지냈다고 했으며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 했다.

또한 <삼국유사> 역시 동해 큰 바위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둘 다 같은 장소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무왕릉비에는 '분골경진(粉骨鯨津)'이란 구절이 등장하는데,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 한 뒤 고래가 사는 바다에 장사를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감은사지 감은사지 금당지의 모습,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이 머물 수 있는 구조로 조성되었다.
▲ 감은사지 감은사지 금당지의 모습,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이 머물 수 있는 구조로 조성되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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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감은사의 기록을 통해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를 드나들 수 있도록 용혈이 있고, 금당 아래에 용이 된 문무왕이 머물 수 있는 구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은 현재 감은사지의 모습과 일치하고 있다. 또한 만파식적 설화를 통해 당시 이견대로 행차했던 신문왕(재위 681~692)이 묵었던 장소가 감은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태종무열왕릉비'의 예처럼 '문무왕릉비'도 세워졌다. 그런데 보통 비석이 왕릉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문무왕의 경우 동해의 바위에 산골 했기 때문에 왕릉에 세울 수가 없었다.

결국 문무왕릉비는 문무왕과 생전에 연관이 깊었던 장소인 사천왕사에 세운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실제 사천왕사 앞에는 비석을 세웠던 귀부가 2개 남아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2개의 귀부는 '사천왕사사적비'와 '문무왕릉비'로 추정이 되고 있다. 사천왕사는 <삼국사기> 경명왕 편에도 등장하고 있어, 신라가 망하기 전까지도 비석이 관리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사 동편 귀부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 지금은 비석의 귀부만이 당시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 사천왕사 동편 귀부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 지금은 비석의 귀부만이 당시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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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라가 멸망하면서 문무왕릉비에 대한 행방은 묘연해졌다. 그러다 1760년 당시 경주부윤으로 있던 홍양호에 의해 그 존재가 확인이 되었고, 1817년 경주를 방문한 추사 김정희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문무왕릉비'는 당시 신라인들이 남긴 금석문으로, 일차 사료에 해당하는데, 내용 가운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없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는데, 바로 '투후(秺侯)'와 '성한왕(成漢王)'의 존재다.

비석에 등장하는 투후는 흉노족 출신의 '김일제(金日磾)'를 말하며, 성한왕은 신라의 시조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성한왕의 기록은 김인문의 묘비와 흥덕왕릉 비편 등 당대의 금석문에서 확인이 되고 있어, 일부에서 신라 왕실이 흉노족 출신이 아니냐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반면 숭조사업의 영향이라는 주장 역시 만만치 않으며, 학계에서도 신라 김씨가 흉노족이라는 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러한 기록의 금석문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련된 연구가 필요해 보이는 건 분명해 보인다.

문무왕릉비 문무왕릉비의 하단, 금석문에만 등장하는 ‘투후’와 ‘성한왕’의 존재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직접 촬영
▲ 문무왕릉비 문무왕릉비의 하단, 금석문에만 등장하는 ‘투후’와 ‘성한왕’의 존재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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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수난을 겪은 문무왕릉비의 하단 부분은 1961년에 발견이 되었으며, 상단 부분의 비편 일부는 지난 2009년 경주시 동부동의 한 가정집에서 빨랫돌로 쓰던 것을 가스 검침원에 의해 발견이 되면서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한 문무왕릉비가 세워졌을 동편 귀부의 떨어져 나간 머리 부분이 발견되는 등 정말 어렵게 제자리를 찾은 문무왕릉비를 통해 문무왕에 대해 새롭게 접근해 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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