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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외아들이 해를 입을까 봐 아버지가 조선어로 말을 붙이지 않았다며 훗날 어머니는 거듭 타일렀지만, 황민화 교육만이 나를 맹목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 만큼 권력이 쥐락펴락하는 '교육'의 연약함과 대단함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거꾸로 식민지 조선에서 압제가 얼마나 가열찬 것이었는지도 과묵한 아버지의, 목에서 막히고 만 말로 알 수 있다. (18쪽)


일제강점기를 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무렵 조선말을 쓸 수 없던 학교나 마을이나 사회를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낯선 나라에 뚝 떨어져서 하루아침에 그 낯선 나라에서 쓰는 말로만 살아가라고 한다면, 이때에 어렴풋하게나마 지난날 이 땅에서 살던 사람들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을까요.

조선인은 학교나 공공장소에서 조선어를 못 쓰게 된 사태에 그다지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 가만히 있는 게 좋다고들 했으니 … 이처럼 아이를 볼모 삼아 조선을 철저히 일본화해 가던 선두에 실은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42쪽)
고약한 냄새가 자욱한 어둑어둑한 흙바닥에는 볏짚만 깔린 채 배가 볼록해 파리가 꼬이는 아이들이 몇이나 있고 반쯤 열린 솥이 변변찮은 아궁이뿐이었습니다. 소작농들이 이런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엎드리면 코 닿을 광주 시내에서 몇 년이나 공부하면서도 몰랐다는 게 충격이었습니다. (46쪽)


 겉그림
 겉그림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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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인 조선에서는 나라가 조선이었어도 조선말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무렵 한겨레가 쓰던 말은 '조선말(조선어)'이라는 이름이었고, 일본 제국주의가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국어'라는 이름을 붙인 말은 '일본말(일본어)'이었어요. 그래서 일제강점기 교과서를 보면 '조선총독부 국어 교과서'에는 오로지 일본말만 나옵니다. 그때에는 '국어 = 일본말'이었으니까요.

그러면 일제강점기에 '국사'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무렵 '국사 = 일본사'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사'라고 따로 이름을 붙여야 비로소 이 나라 역사였어요.

지문날인을 해야 외국인등록증이 발급되는 규제에서 엿보이듯 일본의 사회질서 속에서 재일조선인은 여전히 치안의 대상이다. 특히 이 사실은 조금도 변할 기미가 없다. (69쪽)
그렇다. 일본의 자위론이 떠올랐다. 타국을 침범하던 일본이 '평화'를 위해서라며 입에 올린 게 '문단속론'이었다. 즉 보복이 두려운 게 아니겠는가! (200쪽)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온 발자국을 담은 <재일의 틈새에서>(김시종/윤여일 옮김, 돌베개, 2017)를 읽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일본말로 처음 나왔고, 이제 한국말로 옮겨서 새로 나옵니다.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 하루란 무엇인가를 그리는 이야기요, 우리한테 나라·뿌리·고향·바탕이란 무엇인가 하고 하나하나 되묻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국어·국사'라는 이름하고 '조선어·조선사'라는 이름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참말로 '국어·국사'라는 이름은 한겨레도 중국도 대만도 안 썼습니다. 일본에서조차 안 썼지요. 지난날 중국이나 조선이나 일본은 '중국어·조선어·일본어'하고 '중국사·조선사·일본사'처럼 말했습니다. 이러다가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달으며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을 적에 '국어·국사'라는 이름이 튀어나왔어요.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울타리를 군홧발로 세우면서 쓰던 이름이 '국어·국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이런 이름을 털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 이름에 이런 뜻이 깃든 줄 모르기 일쑤이지요. 그냥 쓰는 말 한 마디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일제강점기 생채기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재일조선인이라는 한겨레를 헤아리려 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국어·국사' 같은 식민지 찌꺼기 이름을 털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일본 시의 전통이 만일 조선 시에 열등감을 느낀다면, 그건 시 한 편이 제대로 죽음에 값한 시인을 갖지 못한 까닭이겠죠. 조선에는 옛부터 시 한 편으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시인이 많았습니다. (139쪽)
나는 재일조선인에게 '귀화'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화란 원래로 복원되는 것이지, 저기에 있는 체계로 마치 유카타처럼 자신을 다시 감싸는 허위의 소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170쪽)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교과서. 왼쪽은 '조선말'을 가르치는 교과서. 오른쪽은 '국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사'를 가르치는 교과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교과서. 왼쪽은 '조선말'을 가르치는 교과서. 오른쪽은 '국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사'를 가르치는 교과서.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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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의 틈새에서>를 쓴 김시종 님은 어릴 적(일제강점기)에 일본말을 제 나라 말인 줄 여기면서 신나게 쓰던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풀어냅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벙 뜬 이녁 모습을 고스란히 적습니다. 일본에서 '어느 나라 품에 안길 수도 없는 살림'을 지어야 하면서 겪는 고단한 하루를 찬찬히 적습니다.

글쓴이가 들려주는 김희로 이야기란, 재일조선인 지문날인 이야기란, 남북녘으로 갈린 두 정치권력이 저마다 독재로 치닫는 모습을 일본에서 바라보아야 하던 이야기란, 모두 우리 발자국입니다. 같은 겨레가 두 나라가 되어 싸운 지난날도 우리 발자국이요, 우리가 바라지 않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나 떼죽임마저 우리 발자국이에요.

생각해 보면 조선인의 유구한 가락, 애초 군인대오의 행진과는 거리가 멀던 3박자의 장단이 어느샌가 2박자 군화의 울림에 짓밟힌 지 오래다. (318쪽)
전횡을 휘두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뒤를 이은 전두환 대통령, 그것도 석 달 사이에 스스로를 대장으로 끌어올린 전 소장의, 이 또한 악마의 자식이라고밖에 말할 길 없는 처절한 (1980년 광주학살) 포학상을 생각하노라면 '조선인'이라는 게 문득 부끄러워질 만큼 기가 죽는다 … 정말로 조선인은 민족적으로 야만적이고 동족 학살을 일삼는 부도덕한 무리들인 것일까? (319쪽)


우리는 스스로 남이며 북으로 가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일본이며 러시아이며 중국이며 중앙아시아로 퍼지지 않았습니다. 총칼에 눌리고 밟히면서 남북이 갈렸고, 곳곳으로 내쫓겨야 했습니다. 이런 우리는 정치권력이 이끄는 대로 군인이 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어요. 게다가 군사독재자가 시키는 대로 멀쩡한 사람들을 폭도로 내몰아 끔찍하게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평화로우며 착한 마음이 아닌, 위에서 시키는 대로 휘둘리는 사회였습니다.

 재일조선인 삶을 다룬 다른 책. '지문날인'을 놓고 한국 정부는 재일조선인한테 힘이 되어 준 적이 없다. 한국은 언제쯤 재일조선인을 품는 정책을 펼 수 있을까.
 재일조선인 삶을 다룬 다른 책. '지문날인'을 놓고 한국 정부는 재일조선인한테 힘이 되어 준 적이 없다. 한국은 언제쯤 재일조선인을 품는 정책을 펼 수 있을까.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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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피비린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와중에 전두환 장군과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그리운 군가를 함께 노래하며 춤췄다는 감격을 좋아라 '회견기'에 적은 도쿄 모 대학의 교수가 있다. 얼마나 반죽이 잘 맞았겠는가! (320쪽)


재일조선인만 틈새에서 살지는 않았다고 느낍니다. <재일의 틈새에서>를 쓴 김시종 님은 일제강점기에 어린 나날을 보내면서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일본말 잘하는 모범생'으로 지냈다고 해요. 어릴 적에는 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거나 못난 짓인지 하나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1960년대를 비롯해서 1980년대까지도 이 나라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반공웅변대회를 열었고 민주평화운동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짓이라고 가르치기 일쑤였어요. 저는 1970∼1980년대에 어린 나날을 보내면서 학교랑 사회에서 길들인 소름돋는 말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습니다. 나라가 민주와 평화가 아니라면 틈새살이가 될 뿐이라고 할까요. 민주와 평화를 등진 나라에서는 누구나 틈새살이로 억눌린다고 할까요.

부디 군홧발이 모두 사라지기를, 모든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없어지기를, 이리하여 어깨동무와 따사로운 품이 태어나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북녘에서도 어리석은 낡은 모습을 말끔히 씻어내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재일의 틈새에서>(김시종 / 윤여일 옮김 / 돌베개 / 2017.12.29.)



재일의 틈새에서

김시종 지음, 윤여일 옮김, 돌베개(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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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 편집자로 일하면서, 전남 고흥에서 <사전 짓는 책숲집 '숲노래'>를 꾸립니다.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읽는 우리말 사전》《골목빛》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