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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적 지표가 어떠했든, 사람들은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게 살았고 이웃들과 콩 한쪽도 나눠 먹으며 마냥 행복했다,는 옛날이야기는 어째 미심쩍은 기운이 느껴진다.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할 테다. 오직 딸이라는 이유로 학업이 중단되지는 않았는지, 그 안엔 오직 순응과 체념만이 있었는지, 동네엔 여자를 때리는 남자와 여자들끼리의 그악스러운 드잡이가 있지는 않았는지, 폭력이 난무하던 세상에서 아이들은 과연 행복하기만 했는지.

나폴리4부작 책표지
 나폴리4부작 책표지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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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이렇게 총 네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은 한 번 펼치면 멈출 수 없는 대단한 흡인력을 자랑한다. 나폴리 출생인 1944년생 두 여인 릴라와 레누의 파란만장한 삶과 함께, 격변하는 이탈리아의 현대사가 생생하게 어우러지며 펼쳐진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66살의 레누는, 어느 날 릴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릴라가 "자신이 살아온 66년이라는 세월을 통째로 지워버리려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레누는, 릴라가 그녀 마음대로 사라질 수 없도록, 그들의 모든 이야기를 상세히 써내려가기로 작정한다. 레누는 나폴리 4부작의 화자이며, 1권은 릴라와 레누의 유년기부터 시작된다.

"내겐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우리의 유년기는 폭력으로 가득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매일매일 별의별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게 기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힘들게 할 숙명을 태어났고 타인들도 우리 인생을 힘겹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나의 눈부신 친구> 중)


일찍이 알파벳과 숫자들을 익혀 학급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던 레누지만, 릴라의 재능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다. 레누는 평생 동안 릴라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놀라운 학업 성취를 보여준 릴라. 그러나 릴라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만 마치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레누가 학업을 이어가던 때, 릴라는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동네 청년에게 청혼을 받게 된다. 릴라의 아버지는 딸의 결혼으로 생계 걱정을 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결혼을 종용한다. 결혼으로 부를 거머쥔 릴라를 잠시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본 레누는, 그녀의 결혼식에서 깨닫게 된다. 릴라는 결국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결국 릴라마저도 내 어머니의 세계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해내야만 한다. 이제는 복종만 할 수는 없다." (<나의 눈부신 친구> 중)

릴라는 결혼 첫날부터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그녀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이를 묵인한다. 마치 그들 눈에는 릴라의 멍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4부작 내내 사소한 것에서부터 당시의 현실을, 때로는 지금까지도 유효한 사회상을 여실히 드러낸다.

유부녀인 릴라는 레누가 사랑하던 니노와 사랑에 빠지고,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던 레누는 나폴리를 벗어나 피사의 대학으로 진학한다. 그곳에서 레누는 학자로서 전도유망한 피에트로를 만나 약혼하게 되고, 피에트로의 어머니 덕분에 첫 소설을 출간하게 된다. 레누의 소설은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얻으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결혼을 앞두고, 레누는 고민에 빠진다. "이미 몰락해버린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너무 깊이 자리"잡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동시에, 아이를 안고 보살피고 싶은 감정을 느끼며 갈등하는 것이다. 44년생 레누의 고민은 82년생 김지영씨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레누는 결혼한다. 이제 그녀는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걸까. 살면서 내가 배운 한 가지는,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레누는 출산과 육아로 모든 것이 힘겨워지고, 일생동안 성취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는다. 남편도 레누의 절망감을 덜어주지 못한다. 레누는 학식과 지성으로 무장된 피에트로 역시 구시대적 남녀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피에트로는 내가 제대로 교육을 받았음에도 나에게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를 바랐다."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중)


릴라도, 레누도, 마냥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진 못한다. 파란만장한 그녀들의 삶이, 말 많고 탈 많은 이 소설 속 이야기가,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릴라와 레누는 분명 나이기도 했고, 내 곁의 수많은 여인들이었다.

나폴리 4부작에는 일방적인 악인도,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삶이 그렇듯이. 누군가를 잠시 미워하더라도, 너의 사정도 딱하구나, 하게 되는 것. 내가 아프다 하여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지도 모른다. 절대악을 교화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닐 테니.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그 아무리 복잡해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설령 현실이 너무 견고해 그 변화가 다음 세대로 미뤄질지라 해도.

이 책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레누와 릴라의 관계일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에서 대조적이다. 레누가 모든 일에 확신이 없는 반면, 릴라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졌다. 레누가 타인의 인정과 호감에 매달리는 반면, 릴라는 그 어떤 것으로도 자유롭다. 그런 그들은 평생을 사랑하고, 증오하고, 질투하고, 연대한다.

그들은 서로의 뮤즈이기도 하고, 인간관계의 총합이기도 하다. 그 날카로운 애증과 뜨거운 사랑을, 나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나의 레누', '나의 릴라'라고 이 여인들을 부르고 싶었다는 것밖에는.

4부작을 읽고, 허탈감을 느꼈다. 책에 대한 불만족은커녕, 눈앞에서 살아 숨 쉬듯 생생했던 레누와 릴라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아쉬움이었다. 그러나 내 허탈감은 이내 사라졌다. 돌아보니, 레누와 릴라는 나의 현실에 가득했다. 소설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소설은 내 삶을 더욱 날카롭게 자각하게 한다. '페란테 열병'을 앓는 나는, 만나는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나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2016)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2017)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2017)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2016)


태그:#나폴리4부작,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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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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