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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도청에서의 기자회견 모습
▲ 김만식 기자회견 모습 충북도청에서의 기자회견 모습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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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4일 오전 11시 충북도청 기자실은 때아닌 장날 같았다. 기자회견이 있는 날이면 항상 바쁘기는 했지만, 이날은 특별했다. 기자회견장에는 노인들이 많았다. 청원 오창창고 사건 유족을 포함해 청주지역 유족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과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자들도 참여했다. 지역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자회견장은 사람들로 꽉 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준비하는 시간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실내 공기는 긴장된 분위기로 마치 폭발하기 직전 화약고 같았다. 전 6사단 헌병대 일등상사 김만식(당시 81세)씨가 강원도, 충북 북부, 경북 북부에서 자행된 보도연맹 학살사건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유족, 특히나 오창창고 유족들은 약 300명이나 살해된 오창창고 사건의 가해자가 불분명하게 조사되는 와중에 치러지는 이 기자회견에 귀를 모으게 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국사편찬위원회도 민간인학살 가해자가 공개증언을 하는 것에 남다른 역사적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론사 역시 민간인학살과 관련한 가해자의 최초 공개증언이라는 사실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증언자 김만식은 의외로 차분했다. 아니 속마음은 무척이나 떨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대기하는 시간 동안 차분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고, 잠시 기도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전쟁 나자마자 보도연맹원 붙잡아 들여

기자회견을 앞둔 김만식
출처: 충청리뷰 육성준 기자
▲ 김만식 기자회견을 앞둔 김만식 출처: 충청리뷰 육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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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김만식씨가 입을 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6월 27일경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보도연맹원들을 처단하라는 무전이 내려왔습니다. (중략) 강원도 원주에서 7월 초 약 50명의 보도연맹원들을 저의 책임 아래 총살했습니다."

이어지는 증언 한 마디 한 마디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그는 이날의 증언을 통해 본인은 "6사단 직속의 헌병대 소속으로 강원도 원주와 경북 영주의 학살 현장에 있었으며, 원주에서는 직접 총살명령을 내렸고,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밝혔다. 또한, 충북 오창창고는 6사단 19연대 헌병대가, 옥녀봉은 7연대 헌병대가 총살에 참여했다고 했다.

특히나 증언 중 강원도 횡성에서 6사단이 저지른 사건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즉 춘천과 홍천지역 보도연맹원들을 횡성으로 끌고 와 6월 28일 학살했다는 것은 6.25 발발과 동시에 강원도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 했다는 말이다. 이는 6월 28일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되어, 보도연맹원 일부가 북한군에 협력했기 때문에 전국 보도연맹원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를 전면 부정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 학계에서는 1950년 7월 1일 경기도 이천에서 최초의 보도연맹 학살이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름이 밝혀졌다. 기자회견 내내 충격적인 증언이 이어졌고, 참석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자회견 말미에 진행자가 "용기 있게 증언을 해주신 김만식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가해 집단의 구성원이었던 김만식 선생과 아버지가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박〇〇 유족회장님과 악수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일어나서 악수를 했다. 하지만 김만식씨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고 어색하기만 했다.

6사단 헌병대의 보도연맹원 처형지도
▲ 처형지도 6사단 헌병대의 보도연맹원 처형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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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고백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기자회견 며칠 후 청주·청원유족회 오성균 총무가 점심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김만식씨가 청주 모충동 성당에 다니고 있었기에, 이수한 신부와 유족 2명이 함께 한 자리였다. 식사자리 초기에는 어색하고 긴장된 분위기였다. 김만식씨가 기자회견 한 것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후회하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수한 신부에게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아왔는데 이번 기자회견으로 마음이 너무 편합니다. 죽기 전에 이런 자리를 가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라고 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지만 수 십 명의 보도연맹원을 학살하는 현장책임자였고, 본인도 확인사살을 한 경험이 평생 동안 정신적 고통을 갖게 한 것이다. 그런데 회개하는 심정으로 공개 기자회견을 한 것이 오히려 마음 편했던 것이다.

이 기자회견 이후 김만식씨에게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각종 언론사 기자들이 취재요청을 해 온 것이다. 충북, 강원, 경북 지역의 언론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외 유수의 언론에서 연락을 해왔다. 결국 그해 여름과 가을에 일본 NHK, 영국 BBC, 미국 <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했다.

딩실화해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김만식
▲ 진실화해위원회에서의 증언 딩실화해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김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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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원회'에서도 국민보도연맹사건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김만식씨의 증언이 시급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2007 유해 발굴 중간보고회'가 있던 2007년 11월 13일 김만식의 공개증언이 다시 열렸다. 2007년 충북 청원군을 포함해 전국에서 발굴된 유해가 진실화해위원회 대회의실에 전시되었다. 유해를 본 김만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료들로부터는 원망을 받았지만...

"원주에서 확인사살을 하는 데, 권총으로 머리를 쏘니까 피가 튀어 내 옷을 흠뻑 적셨어요. 너무나 놀랍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중략) 과정이야 어떻든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57년 전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인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합니다"라며 머리를 숙였다. 충북도청에서의 증언보다 진심어린 고백과 사죄가 눈에 띄었다.

두 번의 기자회견이 김만식씨에게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다. 과거 6사단 헌병대 동료들을 포함한 군(軍) 동지들에게 좋지 못한 소리와 원망의 눈초리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했다. 수십 년 동안 꿈자리를 사납게 했던 '학살 장면'이 기자회견 이후 없어졌기 때문이다. 60년 가까이 시달려 온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김만식씨가 왜 군에 입대해, 이런 끔직한 경험을 하게 되었을까?

도끼로 머리를 맞아 죽은 아버지

'북청물장수'로 유명한 북청 읍내는 해방 후 시끌벅적했다. 이날도 읍사무소 앞에는 수 백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인민재판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친일파 김봉철은 일제강점기에 목재상을 하면서 인민의 피를 빨아 부를 축적했소, 인민의 적 김봉철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사형(死刑)을 내리시오"라고 군중들이 외쳤다.

잠시 후 재판장은 사형을 선고했고, 즉석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인은 칼이나 총을 든 것이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김봉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하늘을 날던 도끼는 김봉철의 머리에 내지 꽂혔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19세 청년 김만식은 아버지의 죽음을 그렇게 맞았다. 1927년 북청군에서 출생한 김만식은 성동심상소학교와 북청중학교를 거쳐 흥남공업대학을 다녔다. 일제강점기에 엘리트코스를 밟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지만 해방과 동시에 나락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 때문에 그가 북한에서 설자리는 넓지 않았다. 그는 금덩이를 품 안에 숨기고 3.8선을 내려왔다. 가옥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일부 부동산이 남아 있어 금으로 바꾼 것이다.

누나 세 명은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고향에 부동산이 남아 있어 마을에 남기로 했다. 그가 갖고 온 금덩이는 주택을 구입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백수생활이 지속되면서 구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물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아버지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물론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6사단 헌병대에 몸을 담았고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그는 전쟁 초기에 상부의 명령으로 보도연맹원 학살에 가담했다. 하지만 헌병은 그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보병으로 전선에 투입되어 싸우는 것이 좋았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다. 1950년 7월 27일 다부동전투에 '육탄결사대' 소대장으로 참전한 것이다. 24명의 결사대원은 인민군 전차 12대를 주저앉혔고, 이는 그 공으로 '금성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헌병대가 창설된 이래 2007년까지 헌병대에서 그만 유일하게 받은 것이다.

그는 1956년 육군 대위로 예편해, '무공수훈자회 충북지부장'과 '재향군인회 충청북도 이사'를 역임했다. 하지만 전쟁 영웅 김만식에게는 '보도연맹원 학살'이라는 트라우마가 항상 있었다.

김만식의 공개증언 이후 아쉽게도 제2의 김만식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한국전쟁기에 상부의 명령으로 집단학살에 가해자로 참여했고, 이를 반성한다는 공개증언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민간인 학살의 가장 큰 책임은 이승만을 포함한 최고 권력층에 있다.

하지만 총살현장 책임자도 그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김만식씨 처럼 용기 있는 고백과 사죄로 역사의 사면장(赦免狀)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의 사면장은 차치하고라도 68년간을 옥죄어 온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되어야 하지 않을까?


태그:#김만식, #6사단 헌병대, #가해자, #트라우마, #보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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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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