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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상기기념물>
 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상기기념물>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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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홀로코스트로 가는 길 

개인의 범죄는 우발적일 수 있지만, 국가와 사회의 범죄는 그렇지 않다. 600만 명 이상의 희생을 초래한 독일 국가와 국민의 범죄는 하루아침에 자행되지 않았다. 18세기와 19세기 독일 역사가 홀로코스트로 귀결되는 거대한 일탈의 길이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지나치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극성을 부린 반유대주의, 20세기 초에 횡행한 인종주의적 사이비과학, 1932년 말 총선에서 나타난 절반에 가까운 독일 국민의 나치당 지지가 홀로코스트를 암시하는 불길한 조짐이었다고 말하면,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뉘른베르크법의 통과]

그 뒤에도 한동안 홀로코스트는 막을 수 있는 참사였다. 적어도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 기회는 뉘른베르크법이 발효를 앞둔 1935년에 있었다. 유대교를 믿거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4인 중 2명 이상이 유대 혈통이면 유대인으로 규정한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법의 시행만큼은 막아야했다. 이 법은 평시에는 유대인들의 공직 퇴출과 재산 몰수를 허용하는 근거로 악용되고, 유사시에는 합법적인 살생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압도적 다수의 독일 국민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 기세에 눌린 유대계 주민은 저항하지 못했다. 

[안락사 프로그램 시행]

두 번째 기회는 안락사 프로그램 저지였다. 암호명 'T-4작전'으로 불린 안락사 프로그램은 독일 국민 가운데 정신과 신체상의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삼았다. 나치 지도부의 우려와 달리, 이 계획이 실행 단계에 진입했어도 독일 국민은 공개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이제 히틀러와 나치당은 더 대범한 범죄를 꾸며도 국민적 반대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후 5개의 안락사센터에서 신속한 살인 기술이 연마됐다. 그 과정에서 육성된 전문 인력이 몇 년 후 본격 설립된 살인공장들의 핵심운영진으로 발탁됐다.

홀로코스트 상기기념관 내부 전시
 홀로코스트 상기기념관 내부 전시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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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대량학살의 두 경로

이로써 대량학살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 국가기구를 총동원해서라도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하려는 권력자 집단과 이들의 명령을 즉각 실행에 옮길 살인전문가들이 육성되어 있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대규모 학살의 길이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는 불굴의 살인 의지의 존재, 강력한 반대 의지의 결여, 실행 준비를 마친 조직과 기술이 전쟁 상황과 뒤엉켜 만들어낸 미증유의 결과였다. 2차 대전이 아니었다면 나치 대학살은 아마도 광신주의자들의 몽상 정도로 끝났을지 모른다.  
   
[마을단위 학살 :살인특무부대]

1939년 9월 1일 새벽,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나치 독일은 연대 규모의 살인특무부대(Einsatz -gruppe)를 창설했다. 점령지역 내의 저항가능세력을 발본색원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폴란드 점령 후 해산됐던 이 부대는 1941년 6월 소련침공을 앞두고 전격 재구성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소련 영토로 공격해 들어가는 4개의 집단군 배후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 마을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A·B·C·D로 편성된 4개의 부대는 대대 규모에 불과했지만, 지휘관 계급은 대령이나 준장이었다. 그만큼 나치 독일의 전쟁계획에서 유대인 학살이 갖는 의미가 컸다는 뜻이다.

친위대 내의 보안대와 보안경찰을 주축으로 구성된 살인특무부대는 정규군, 전투경찰, 현지 부역 집단의 협조를 받아 후방 지역의 유대인들을 대면(對面) 학살하였다. 기만과 철저한 공조 속에서 1941년 9월 말 우크라이나 키예프시 외곽의 바비야르(Babij Jar) 골짜기에서는 단 하룻밤 사이에 3만4000명이 학살됐다. 살인특무부대에 의해 직접 살해된 유대인은 총 56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문명화된 학살 : 아우슈비츠와 살인공장들]

그러나 마을 단위의 학살을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시간의 부족과 부대원들의 심적 부담이 문제였다. 나치 독일은 이 문제를 해결할 기술적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군용 트럭 후면에 노획한 소련군 탱크 엔진의 배기가스를 주입하는 방식을 개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 동안 80명씩 살해하는 가스차(Gaswagen)는 완벽한 해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나치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동부 지역에 세워진 5개의 절멸수용소다.

1942년에 설립된 트레블링카(Treblinka), 소비부르(Sobibor), 헤움노(Chelmno), 루블린-마이다네크(Lublin-Majdanek)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가 바로 그것이다. 가스실과 화장장이 완비된 이 절멸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은 모두 300만 명이 넘는다. 아우슈비츠 한 곳에서만 110만 명이 살해됐다. 아우슈비츠가 특히 두려운 이유는 공장화되고 기계화된 살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각 지역에서 아우슈비츠 승강장까지 유대인을 실어 날랐던 철도기관사들,  살해 대상을 선별했던 나치 의사들, 가스실의 버튼을 눌렀던 친위대 장교들은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을 거의 받지 않았다. 손에 총을 들지 않고, 얼굴에 피와 골수가 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전후 법정에 서서도 살인과 전혀 무관하다고 강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문명화된 학살은 마을 단위로 이루어진 대면학살보다 더 현대적이고 묵시적 성격이 강했다. 

1964년 10월 12일 나치 전쟁범죄에 대한 트레블링카 재판에서 열 명의 피고인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
 1964년 10월 12일 나치 전쟁범죄에 대한 트레블링카 재판에서 열 명의 피고인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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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홀로코스트와 과거청산

과거청산의 주된 의미가 가해자에 대한 형사소추와 법적 처벌이라면, 홀로코스트의 과거청산은 아직 충분치 못하다. 대량학살의 기획자와 자발적 집행인들 가운데 법정에서 처벌받은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 국제 전범재판, 울름과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열린 독일의 국내 재판, 아이히만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예루살렘 재판을 비롯한 재판을 통틀어 법적 정의는 결코 온전하게 실현되지 않았다. 독일 내에서 진행된 재판만 925건이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배·보상도 충분치 않았다. 1952년부터 2012년까지 독일 정부가 나치 범죄에 대한 사후 배상과 보상으로 지급한 총액은 890억 달러였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유대인 생존자들의 몫이었다. 이 금액은 독일 정부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을지 모르지만, 파괴된 유대인 공동체와 개인들의 입장에서는 크게 부족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매월 지급받은 연금은 2012년 기준으로 381달러였다. 이렇게 볼 때 독일 정부와 국민이 지금까지 취한 조치를 통해서는 온전한 정의의 실현은 불가능했다.

수도 한복판의 홀로코스트 기념물(Holocaustmahnmal), 기억과 교육의 거점으로 탈바꿈한 강제수용소들, 나치 범죄에 대한 부정을 형사 처벌하는 제도적 강제, 나치 범죄로 얼룩진 현대사 교육에 대한 강조.  지난 반세기동안 독일이 꾸준하게 시행해온 이 모든 조치들은 과거를 다시 돌릴 수 없을 지라도, 인종주의 범죄와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겠다는 국민적 의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베를린 안네 프랑크 센터 (Anne Frank Zentrum) 입구에 모여 있는 독일 초등학생들
 베를린 안네 프랑크 센터 (Anne Frank Zentrum) 입구에 모여 있는 독일 초등학생들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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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사진 최호근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 글은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에서 발행한 <4370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4.3사건, #제주4.3, #제주4.3 범국민위원회, #4370신문, #제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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