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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김진언 할머니
 고(故) 김진언 할머니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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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죽을지, 네가 먼저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부락보다 산이 안전하니까..."

- 제주도 조천면 북촌리 마을에서 사셨는데, 북촌리는 장수마을로 꼽히는 곳입니다. 
"우리 부락은 토지가 박해서 노력을 안 하면 살 수가 없는 곳이지. 나는 어릴 때 별명이 '들우송애기'였어. '들에 사는 송아지'라고 동네 어른들이 별명을 붙여준 거라. 예닐곱 살부터 소 촐(꼴) 베러 다니고 죽도록 일만, 일만 했지." 

- 물질(해녀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아홉 살부터 했지. 우리 부락에서는 시집 가기 전까지는 누구나 물질하고 남은 시간에는 망건을 만들었지."

- 망건 만들 때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있나요?
"망건 만들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면 일도 덜 지치고 흥도 나지.

우리어멍 맹긴 폴앙         우리 어머니 망건 팔아서
시집가렌 촐려주난          시집가라고 차려주니
한산모시 열두 폭 치매      한산모시 열두 폭 치마
살레발에 걸어둠서          부엌 찬장에 걸어두면서
호여준 치마                 해 준 치마
오멍가멍 눈물씌난          오며가며 눈물 닦으니
다 썩어서라                 다 썩었더라
이어이어 이어도 허라       이어이어 이어도 하라
이년 맹긴 몾아나지라       이 망건 결어나지라


그날도 이런 노래 부르며 동무들과 망건 짜는데 누가 와서 날 불렀어. 그이는 부병준(독립운동가, 1906-1952)이란 사람이었지. 부병준은 서울서 학교 다니다 광주학생사건으로 옥살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을 때라. 우리 해녀들에게 야학을 가르쳐 주셨는데 내가 3일 만에 한글을 뗀 사람이라. 공부할 때 쓰는 기름도 다 그 집에서 마련한 것 같아. 북촌에서 함덕까지 쪽지 심부름을 다녔는데 그 쪽지를 중간에 펴보거나 잃어버리거나 한 적이 없이 정확히 본인에게 전달했지. 그때 인정받은 것이 후에 나를 지도자로 만들어버린 거 같아. 그때 연락했던 분들이 나중에 소비조합사건으로 구속이 되었어." 

-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그때는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얼굴도 안 보고 시집갈 때라. 시집은 열여덟에 갔는데 신랑은 14살이라. 그런 신랑에게 시집가면 한 5년은 있어야 부부가 되는 거지. 왜 그랬을꼬. 아마 여자를 데려다 일 시키려고 그런 것 같아. 시집가서도 2~3년은 친정에 살면서 제사, 명절 때만 가서 일하고 그랬지. 친정집에 와 있으니 남편에게 가고픈 생각이 없었어. 해녀로 물질 나가면 돈 벌 텐데 하는 생각이 더 컸어. 궁리하다가 어린 남편에게 명주옷 한 벌 해주며 물질 허락받아 일본으로 물질 떠났어."

- 일본에서는 얼마동안 사셨나요? 
"22세에 주인양반이 불러서 갔는데 동경에서 3년 살았어. 두 번째 남편 직업이 선장이여. 청진에 가서 그물배로 정어리를 싣고 왔다 갔다 하며 장사했지. 내가 선장 노릇도 했어. 나침반을 잘 보니까. 그렇게 같이 돌아다니다 부산으로 가서 몇 년 살다가 해방을 맞았어." 

- 남편은 어떤 분이셨나요?
"그때 남편은 대판(오사카)에서 메리아스(속옷) 공장에 다녔는데, 사회주의 운동하느라 머리도 단발로 하고 다니더라고. 남편은 일찍 당 운동을 한 것 같아. 당 운동이란 것은 없는 사람들도 공평하게 살게 하고,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대우받고,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억울한 일 공동으로 막아내자는 거지. 일본을 상대로 하는 운동이라 비밀리에 했지만 겉모습만 봐도 알아져. 오르바쿠머리(당시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올백으로 뒤로 넘긴 머리)한 사람들은 다 사상가들이었지.

해방 돼서 부산 살다 들어와 보니 남편은 우리부락 당세포위원장이 되어있어. 여성들을 모아놓고 공부도 가르치고 고구마, 무로 엿 만드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어. 어느 날 중앙에서 온 세포가 우리집 밥상을 보고 '제주도는 낭푼이(양푼) 밥을 먹으니 공산주의 운동이 필요없는 곳이다'라고 말한 기억이 나지."

 고(故) 김진언 할머니와 가족들
 고(故) 김진언 할머니와 가족들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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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는 여맹 활동을 하신건가요? 
"난 결혼 전부터 우리 부락 부인회 총무일을 했는데 일본어업조합과 많이 싸웠지. 그때 16살이었어. 우리 뒤에 책임자가 있어서 지시는 그들이 했고. 우린 해녀 물건을 저울로 뜰 때 직인판매, 공동판매를 놓고 공동판매가 되도록 싸웠고, 어떨 때는 직접 상인에게 팔기도 했어. 요즘말로 직거래지. 그때 우리부락이 360호인데 부인회 조원이 360명이야. 해녀 백 명쯤 있으면 한 사람 정도 저울눈을 읽을 수 있는 시절이라. 나는 생긴 것이 그렇게 되놔서 바당(바다)에서 나오면 물옷 입은 채 저울눈 앞에 뛰어 들어가서 부인회 조원들이 다 뜰 때까지 지켜섰다고. 우리는 벌써 고동, 전복이 몇 개면 몇 근이 다 훤한데 어업조합 조사원이 자꾸 저울을 당기면서 속이려 드는거라. 우리도 화나면 구덕을 오래 바닷물에 담갔다가 무게를 늘려 맞서기도 하고.

개인적인 유혹도 많았지. 눈감아 주면 나중에 한 몫 주겠다고. 북촌해녀조합에서 저울눈 볼 줄 아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서 그런 일 맡으면 농사일은 못해. 저울눈 감시해야지, 낮에는 널어 논 미역 돌아다니며 살펴야지, 미역 도난 막으려고 밤에 지켜야지. 그러다가 뒤에서 코치하는 남자들이 징역 가버리면 힘이 없어지고. 우리 부락은 땅이 박해서 공출을 조천면 다른 지역의 1/5로 줄여달라고 진정한 일도 있고, 그때는 북촌 세 살 아이에게 물어도 '김진언'을 모르지 않았어. 우리집은 일제 때도 먹을 식량이 충분했던 걸 보면 살림은 중간 이상이었고, 외가가 다 훌륭해서 우리 위에 사람이 있겠거니 생각 못하고 살았지. 그러다가 46년 가을, 딸 초등학교 운동회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날 조용히 부르는 거라. '○○어머님이 나이도 있고 부락에서 덕망도 있으니 앞으로 일을 좀 해주셔야겠다'고."

- 여맹 활동을 하신 분들은 주로 어떤 분들이었나요?
"초기 여맹위원장은 다 혼자 사는 과부라. 시집을 갔다가 돌아온 나 같은 사람이 제일 많고, 결혼을 안 한 사람도 있었고. 조천면 초기 여맹위원장은 조천면장을 하셨던 김시범씨 딸이었는데 그도 과부였어."

- 할머니는 재혼하신 건가요?
"시집 안 살고 집에 있으니 동네에서 도마에 올린 고기처럼 날 먹지 못해 하는 이들이 많았어. 그러다가 주인 양반을 만나게 된 거야. 첩이 된 거지. 난 큰집(본부인)하고 눈도 한번 삐끗해보지 않고 살았지만 그 삶이란 것이 지긋지긋했어. 밭에 가면 옆 밭에서 두 내외가 오순도순 말하는 소리가 들려. 난 내가 물질해서 산 밭에서 혼자 그 소리 들으며 검질(김) 매고. 첩 노릇도 못하고 큰어멍(본부인) 노릇도 못할 짓이여. 그 때는 내 몸이 철사같이 말랐지." 

- 1948년 4·3이 나던 해에는 산에서 사셨나요?
"47년 가을부터는 경찰에 쫓기기 시작한 것 같아. 그전까지 우리마을은 해방구였어. 뭉치자 하면 밥 먹던 숟가락 던지고 나왔어. 바당뿐인 가난한 동네라 그랬을까. 조천은 어렵더라. 소시민적 동네라서 그런지 모임 한번 가지려면 나오는 시간도 늦장을 부리고 집합해도 '나 하나 쯤이야' 하는 생각들이 많고. 정세가 악화되니 사람들 마음이 약해지더라고. 그 좋던 동지들이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느(네)살 내살 없이 살다가 사태가 긴박해져 가니까 없어. 좋을 때는 다 뭉치지. 부락마을이 불타고 젊은이들은 다 산으로 올려 보내고 살길 찾을 때, 큰각시가 나보고 남편을 데려가 살려달라는 거라. '내가 먼저 죽을지, 네가 먼저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부락에 있는 우리보다 산이 안전하니 딸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서 세 살 된 딸도 데려왔어.

식구 6명이 모여 아지트에서 밥 해 먹고 잠도 자고 하다가 야간 습격이 와서 도망가는데, 딸이 총에 맞아 죽고 아버지도 잡혔어. 아버지는 추수한 돈을 수중에 넣고 있어서 총살현장에서 경찰에게 찔러주고 살아났지. 어머니는 평소 성격이 콸콸하고 대쪽같은 어른이었는데, 육지군인 앞에서는 쥐처럼 떨고 다니다가 부락사람들 학살당할 때(1949.1.17) '인민공화국 만세'를 두 번 외치고 총살당했다고 사촌동생이 말하더라고."

- 지금 심정은 어떤가요?
"그때 동지들을 생각하면 살아서 통일을 봐야 할 텐데 지금도 두 주먹이 쥐어질 때가 많지. 그런데 우리 여맹은 당의 심부름꾼이여. 누가 명령하는지도 몰라. 부녀부책이 정해주는 대로 하니까."

- 산에서 언제 내려왔습니까?
"산에서는 49년 1월인가 2월 초에 해산명령이 내려졌어. 각자 살 도리 하라고. 그러나 비겁하게 죽지는 말라고. 우리는 부락사람 6명이 한 조가 되어 움직였는데 무자년 겨울 지나고 뒷 해 보리가 익을 무렵 선흘 밭에서 보리 훑다가 사방이 포위되어 손들고 나왔어. 이미 정보가 들어간 모양이더라." 

- 체포된 후 재판은 받았습니까?
"처음 함덕지서로 잡혀가 장작으로 두들겨 맞아 실신되어 물바가지 뒤집어 쓴 채 있었는데 고모님이 음식 가져 왔다가 지서마당에서 내 꼴 보고 실신하셨지. 며칠 후 제주경찰서로 넘어갔는데 고문을 얼마나 받았는지 거꾸로 달아맬 때 머리는 홀랑 빠져 백대가리가 되고 몸은 퉁퉁 불었는데 9명이 돌아가며 담뱃불로 지져대도 고통이 없어. 들어갈 때는 남자 600명, 여자 200명이 들어갔는데 남자다운 남자는 딸 담임선생님 혼자더라. 대부분 수용소 남자들은 물 한 컵도 나눠먹지 않고 배고픈 것도 못 참고 겁이 많아. 집에서나 우대받을 인물들이지. 그때 여자는 한 명도 안 죽었는데 남자 200명이 죽어나갔어. 그 사람들 다 문서가 없는 죽음들이지.

나는 무기를 받고 전주형무소로 가서 25년으로 감형 되어서 딱 25년 살고 나왔어. 감옥서 나온 후 삶이 더 지긋지긋했어. 감찰대상이 돼서 옆 마을간 것도 보고해야 하고. 자유 찾아 나왔는데 또 감옥이었어. 그때 지장 찍고 죽었으면 좋았을걸.

우리는 부모형제 다 죽이고 부락 다 죽이고 희생을 했지만 너희들 세대에는 통일을 꼭 해야 해. 나는 통일되면 술도 담배도 하겠다고 했는데 못 해보고 죽을 것 같아. 좋은 세상 올 거라고 믿으며 교육시키고 설득하며 일을 돕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보면 정말 그들에게 면목이 없지."

 고(故) 김진언 할머니
 고(故) 김진언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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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양성자 제주4·3 연구소 이사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편집위원장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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