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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인권과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지금도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여성이 오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된 점은 근, 현대사를 통틀어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여성의 지위가 올라갔어도, 우리 사회가 남녀평등의 사회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의 여파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 행태를 보여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능, 지난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대중에 깊이 각인이 되었다.
▲ 선덕여왕릉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능, 지난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대중에 깊이 각인이 되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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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여성의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의 경우 선덕여왕이 대표적인 예인데, 지난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대중에 깊이 각인이 된 경우다.

특이하게 신라에서만 3명의 여왕이 등장할 뿐, 한국사에서 여왕이 등장한 예가 없다는 점은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오늘은 선덕여왕을 통해 당시의 시대를 조명하고, 선덕여왕릉에 관한 일화 등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선덕여왕의 시대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덕여왕이 즉위할 당시 신라 왕실의 가계를 살펴보면, 신라 중흥의 군주였던 진흥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인 동륜 태자와 차남인 금륜(=진지왕)으로 572년 3월, 동륜 태자가 세상을 떠났는데, 동륜 태자에게는 아들인 백정(=진평왕)이 있었다.

진흥왕이 세상을 떠난 뒤 차남인 금륜이 왕위를 이어받으니, 바로 진지왕(재위 576~579)이다. 하지만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황음정란(荒淫政亂)'의 명분으로 폐위되고, 동륜 태자의 아들인 백정이 왕위에 오르니 진평왕(재위 579~632)이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의 능, 진평왕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하는데 있어 그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진평왕릉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의 능, 진평왕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하는데 있어 그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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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은 바로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이 있었는데, 천명 공주와 덕만 공주(=선덕여왕)였다. 여담이지만 <삼국유사> 무왕 조에는 진평왕의 딸로 선화공주의 존재가 나타나는데, 정사인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

또한 선덕여왕은 후대에 붙인 이름일 뿐 기록에는 선덕왕으로 등장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신라에 두 명의 선덕왕이 있는데, 선덕여왕 이외에 또 한 명의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은 혜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김양상이다.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신라의 폐쇄적인 신분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신라의 왕은 성골만이 오를 수 있었는데, 성골의 경우 성골과 성골 사이에서 태어날 때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성골의 신분은 덕만 공주와 함께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의 딸 승만 공주(=진덕여왕)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선덕여왕의 치세는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대외적으로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파상적인 공세를 시작하며 '마두성(馬頭城)'을 포함한 40여 개의 성이 공취했다. 또한 이전까지 앙숙이었던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의 원한을 잊고, 신라를 타도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내부적으로 647년 '비담의 난'이 일어나는데,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분이 '여자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의미의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였다. 여기에 당나라 역시 여자가 왕을 하니 안 된다는 식의 핀잔을 던진 사실에서 당시 선덕여왕의 입지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이한 선덕여왕의 치세지만, 신라 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라는 점은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선덕여왕의 치세 때 만들어진 첨성대, 과거 ‘점성대(占星臺)’로 불리기도 했다.
▲ 첨성대 선덕여왕의 치세 때 만들어진 첨성대, 과거 ‘점성대(占星臺)’로 불리기도 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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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를 비롯해, 분황사와 황룡사 9층 목탑 등 모두 선덕여왕의 재위 기간에 만들어졌으며, 독자적인 연호인 인평(仁平)을 사용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한편 선덕여왕을 떠올리면 결혼은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삼국유사>에는 '음갈문왕(飮葛文王)'과 결혼한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만 아이는 낳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기록에 남겨진 선덕여왕의 모습은 지혜로운 측면이 강조되는데, 대표적으로 모란꽃과 '여근곡(女根谷)', '도리천(忉利天)' 일화를 들 수 있다.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씨앗을 보냈는데, 그림을 본 선덕여왕이 향기가 없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 실제 심어보니 향기가 없었다는 일화와 여근곡에 백제군이 매복했음을 간파하고 격퇴했는데, 그 이유를 개구리가 우는 모습에서 찾았다는 일화는 선덕여왕의 지혜로운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의 능, 이복자매인 진덕여왕을 끝으로 신라의 상대는 종언을 구하게 된다.
▲ 진덕여왕릉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의 능, 이복자매인 진덕여왕을 끝으로 신라의 상대는 종언을 구하게 된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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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의 난이 종결되는 과정에서 선덕여왕은 세상을 떠나고 이후 승만 공주가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진덕여왕(재위 647~654)이다. 법흥왕 이후로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왕의 이름은 불교식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러한 흐름은 진덕여왕을 끝으로 사라지고, 이후부터 중국식 묘호가 자리 잡게 된다. 또한 성골의 단절과 함께 신라의 시대(상대, 중대, 하대) 구분 중 상대가 끝나고, 진골로는 최초로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무열왕이다.

기록을 통해 피장자가 확실한 왕릉으로 여겨지는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은 기록과 왕릉의 위치가 일치하는 능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선덕여왕릉이 '낭산(狼山)'에 있다고 했고,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도리천 일화를 통해 선덕여왕릉의 위치가 비정이 된 경우다.

사천왕사지의 모습, 도리천 일화를 통해 낭산에 자리한 선덕여왕릉의 남쪽에 사천왕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사천왕사지 사천왕사지의 모습, 도리천 일화를 통해 낭산에 자리한 선덕여왕릉의 남쪽에 사천왕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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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천 일화는 선덕여왕이 자신을 도리천에 장사지내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당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도리천의 위치가 어딘지 모르자, 선덕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했다. 뒤에 문무왕이 낭산의 남쪽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자 사람들은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불경의 구절을 생각하며 선덕여왕의 지혜에 탄복했다는 요지의 기록이다.

따라서 위의 두 기록을 교차분석해보면 선덕여왕릉이 낭산에 있고, 그 남쪽에 사천왕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은 현재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지의 위치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으며, 사천왕사지의 발굴 조사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선덕여왕릉은 피장자가 확실한 신라왕릉으로 인정되고 있다.

선덕여왕릉의 호석과 크기, 사람과 비교해보면 크기가 큰 고분인 것을 알 수 있다.
▲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의 호석과 크기, 사람과 비교해보면 크기가 큰 고분인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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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릉은 원형 봉토분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호석으로 쌓은 형태다. 이러한 형태는 경주 무열왕릉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신라왕릉의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데 의미가 있다.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는 여왕의 치세, 이 때문일까?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김부식은 논평을 통해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선덕여왕에 대해 비판을 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는 점과 함께 김부식 자신이 여자가 왕을 하니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태그:#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 #선덕여왕릉, #선덕여왕,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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