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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가 시집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읽어보기도 전에 이미 그의 시들에 압도되었다. 시인의 삶을 많이 알지 못했기에 그저 짐작으로 가늠하고 있었지만, 그 시집에는 거역할 수 없는 솔직함이, 샛길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직진(直進)의 삶이 들어있으리라 예감했다. 그 진실들을 내가 다 받아낼 수 있을까. 그래서 이미혜의 시집을 펴드는 것은 내게 어느 정도 용기를 필요로 했다.

나는 채식이 싫다
저 푸성귀 가득한 식탁을 보면
맹렬한 허기를 느낀다.
내 송곳니가 으르렁거린다
길들여지지 않은 욕망으로 짐승처럼
포효하고 싶다
나는 아직 충분히 먹지 못했다
저 가난한 풀 따위 걷어치우고
육식의 만찬으로 배를 불리며
기름진 살과 단단한 뼈로 무장하고 싶다
싸워 이기고 싶다
- 육식주의자


시인은 언제나 삶의 경계(境界), 전선(戰線)에 있었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그가 처한 조건이었다. 38따라지였던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유년의 가난과 '도서관 앞 광장에 몇 송이 선혈 떨구고/학생 식당에는 늘 허기진 삐라가 날렸'(추억1)던 군부독재 시절의 청춘이 그랬다. 그 청춘 시절, 그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옳음'을 향해 '거리를 헤맸'고,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기억에 소스라쳐 잠깬다.

2005년 등단해 작품 활동을 해온 이미혜 시인이 드디어 그간의 성과를  모아 낸 첫 시집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 이미혜 시집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2005년 등단해 작품 활동을 해온 이미혜 시인이 드디어 그간의 성과를 모아 낸 첫 시집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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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러한 시절에 '빛남'이 아닌 '옳음'을 따른 것은 그의 의지였고 용기였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시대의 조건이 가파르지 않았다면, 그가 지금까지 자신을 소스라치게 하는 기억을 가질 필요는 없었으리라. 그렇게 시인은 '피가 타들어가던 시절'을 지나 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한 치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끝없이 자신을 그 경계와 전선으로 되돌려 놓는다.

'부양가족이 있으면/용감해지기 어렵다/ 용감한 것도/ 이기적이 된다/ 부양가족이 있으면 함부로 꿈꿀 수 없다/ 푸른빛 악몽은 오래 지속되고//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무릎 꿇어본 기억은 / 더 오래 마음에 딱지를 얹어//나는 착하게 시들어간다 - '부양가족'


'착하게 시들어감'을 인지하는 순간, 그는 결코 시들지 않는다. 아니 시들 수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베란다 문턱이 무너지고, 집에 물이 새는' 삶의 전선이 그를 한 뼘도 비껴 설 수 없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면에서 한국에서 여성으로, 어머니로, 아내로 산다는 것은 '비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 남자의 아내로 남을 수 없는 여자와
한 여자의 남편으로 남을 수 없는 남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그 가정은
누구의 몫인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노동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고
또 누군가는 생활을 꾸리기 위해
일터로 내몰려야 한다
여기 동굴 같은 가정이
허기진 입을 벌리고 있다

한때는 함께 어깨 걸고
폭포 같은 태양 이글거리는 거리에 섰고
쓰러진 술병 사이로 목소리 높여
사회와 역사를 논했다

그러나 이제는
혼자 남아
길고 긴 기다림으로 저녁을 지으며
아이를 어른다

옛 친구들을 만나도
명절이라고 온 가족이 모여도
여자들은 분주하게 들락거리고
남자들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며
더 이상 한자리에 앉지 않는다

한 남자의 아내로 남을 수 없는 여자와
한 여자의 남편으로 남을 수 없는 남자가 만나
여기 가정을 이루었다
한 여자는 그대로 남아 있고
한 남자는 남자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래서 남겨진 자리
멀찌감치 바라다 본다

온 세상 아내의 자리
- 아내의 자리

그는 투덜거리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여성으로서 맞닥뜨리는 일상의 촘촘한 부조리를 온몸으로 견뎌내며 맞서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전선에 있었다. 그냥 전선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예민하고 따뜻한 감수성으로 매일 싸워야 하는 (싸울 수밖에 없는, 때로는 그 싸움에서 무참히 쓰러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시 속으로 불러들인다.

세월호의 슬픔을 끝없는 현재성으로 되살려 내고,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김성윤씨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시로 녹여내어 들려줄 뿐 아니라, 이라크에서 행해진 오폭(誤爆)으로 사망한 목숨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어떻게 싸움과 공감이 동시에 가능할까? 나는 그의 시 '모호한 나무'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의 뿌리에서/ 천 개의 눈동자가 피어올랐다//천 개의 응시/천 개의 두근거림/ 잎이 연주하는 천 개의 음악// …… 어떻게 읽으란 말인가/ 저 나무의 이름을// 너무 많은 의미를 뿜어내느라/ 분주한 잎들은/ 이미 뿌리에서 너무 멀리 걸어와/ 돌아갈 길을 잃었다/ 색과 색이 겹쳐 줄기를 뒤덮고/ 이제 잎들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모호해서/ 모호해서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된/ 저 나무 - '모호한 나무' 중


읽을 수 없다는 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 나무는 '모호한' 나무이다. 나는 이 나무에서 시인을 보았다. 천 개의 세상 하나 하나를, 천 개의 슬픔과 천 개의 아픔, 천 개의 현실을 직면하고,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시인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어찌 말로 다 전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저 '말'이 아니라, 시인의 가슴 밑 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들이었다.

페미니즘과 미투가 키워드로 떠오르는 2018년 한국의 봄, 나는 강인함이 여성성의 본질임을 이미혜의 시들을 통해 깨닫는다. 이 봄, 그의 시를 읽으며, 모든 존귀함과 따뜻함을 먹어치우는 자본의 시대, 차가운 죽음을 이겨낼 어머니 대지의 숨결을 맞이하시길. 독자들에게 권한다.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미혜 지음, 천년의시작(2018)


태그:#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미혜, #신간, #시집,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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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노동 인권, 공교육, 미혼부모,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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