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조선시대 왕들의 시호에는 조(祖)나 종(宗)이 붙어 있다. 쿠데타를 당해 자격을 상실한 연산군과 광해군만 빼고 다 그렇다. 죽은 뒤에 부여되는 시호 중에서, 왕들한테만 붙는 조와 종은 묘호(廟號)로 불린다. 사당 '묘'자가 들어간 묘호는, 죽은 왕의 신주(위패)를 왕실 사당인 종묘에 모시고자 제정하는 시호다.

'조'와 '종' 중에서 '조'가 더 높다. 건국시조가 아닌 군주의 경우에는, 획기적 업적을 세워 나라를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받아야 '조'가 붙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다분히 상대적이었다.

일례로, 정조는 1800년 사망 직후에 정종(正宗)으로 불렸다. 이때만 해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정조란 묘호가 생긴 것은 고종 때인 1899년이다. '조'로 불릴 만한 군주냐 '종'으로 불릴 만한 군주냐는 시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었다.

'조'가 '종'보다 높다는 전제 하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있다. 세종(世宗)의 아들인 수양대군이 세조(世祖)로 불린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종'으로 불리고 아들은 '조'로 불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부자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똑같이 세(世)란 글자를 쓰면서, 아버지는 '종'이고 아들은 '조'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정치가 아버지보다 획기적이었다면, '세' 말고 다른 글자를 쓰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굳이 같은 글자를 쓰면서 아버지는 '종'으로, 아들은 '조'로 불렀다. 이로써, 아들이 아버지를 억누르는 이미지가 너무도 명확하게 표출된 셈이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차이

 종묘. 서울지하철 종로3가역 옆에 있다.
 종묘. 서울지하철 종로3가역 옆에 있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지난 3일 시작된 TV조선 드라마 <대군-사랑을 그리다>는 세종의 두 아들인 수양대군(주상욱 분)과 안평대군(윤시윤 분)의 경쟁관계를 그린 사극이다. 배우 주상욱이 연기하는 인물이 수양대군이고 윤시윤이 연기하는 인물이 안평대군이라고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두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라는 점은 드라마 내용을 통해 드러난다.

그간의 사극에서는 최후 승자인 수양대군만 비중 있게 묘사하고 안평대군은 낮은 비중으로 다뤘다. 그에 비해 드라마 <대군>은 안평대군한테 적어도 50% 이상의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여타 사극과 차별성을 띠고 있다.

이는 당시 실제 상황에도 부합한다.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만 해도, 동생인 안평대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수양대군보다 강력했다. 그런 면에서, 여타 사극에 비해 이 드라마의 분위기는 역사 속 실제 분위기에 더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 속의 구체적 줄거리는 물론 허구이지만, 안평대군의 비중을 수양대군보다 낮게 처리하지 않은 부분이 역사에 부합한다.

이 드라마 속의 수양대군은, 어려서부터 저돌적이고 야심적인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부모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거역해온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드라마 줄거리는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런 이미지는, 살아생전에 왕실의 피바람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죽은 뒤에는 '세조라는 묘호를 통해 아버지를 억누르는 인상'을 남긴 수양대군의 실제 이미지를 잘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세조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대군-사랑을 그리다>.
 <대군-사랑을 그리다>.
ⓒ TV조선

관련사진보기


수양대군이 왕으로서 죽은 뒤에, 고위급 신하들은 '종'이 붙은 시호를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예종 즉위년 9월 24일자(양력 1468년 10월 9일자) <예종실록>에 따르면, 신하들이 합의한 묘호는 신종(神宗)·예종(睿宗)·성종(聖宗)이었다. 당시 임금인 예종(睿宗)은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예종'이란 묘호가 없었다. 수양대군한테 부여하기로 합의한 묘호 후보 셋 중 하나인 예종이 훗날 그 아들의 묘호가 된 것이다.

갓 즉위한 예종은 18세였다. 이 나이 때의 왕들은 대체로 신하들의 말을 잘 듣는다. 그런데 예종은 실권이 없었다. 왕대비인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통해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희왕후는 수양대군의 부인이다.

어머니인 정희왕후한테 통치권이 있었기 때문에, 예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처리하기에 앞서 어머니의 의중부터 살펴야 했다. 정희왕후가 안 된다고 했던 모양이다. 예종은 신하들의 제안을 거부했다. '종'이 붙은 묘호를 아버지한테 부여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위의 <예종실록>에 따르면, 예종은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래 인용문 속의 대행대왕(大行大王)은 '죽었지만 아직 시호를 받지 못한 왕'을 지칭한다. 재조(再造)는 '국가를 새로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획기적 발전을 이룩했다는 의미다.

"대행대왕께서 재조하신 공덕이 있다는 사실을 일국의 신민들 중에 누가 모르겠는가? 묘호를 세조로 정할 수는 없는 건가?"

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조'를 붙이자는 예종의 말은 당시 상황 하에서는 꽤 파격적이었다. 474년간의 고려왕조에서 '조'가 붙은 사람은 건국시조인 태조 왕건뿐이다. 왕건 이후의 고려왕들 중에는 '조'가 붙은 임금이 없다. 

이런 관행은 1392년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76년 뒤인 1468년에 제8대 주상 예종이 신하들과 위의 대화를 나누던 시점까지도 이어졌다. 이때까지 조선왕조에서는 태조 이성계 외에는 아무도 '조'를 받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수양대군한테 '조'를 붙이자는 예종의 제안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런데 '조'를 붙이자는 제안도 의외였지만, '세조'로 하자는 제안은 더욱더 의외였다. 세종의 묘호와 글자가 같아서만은 아니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세조'란 묘호가 풍기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서기 8년 왕망에 의해 멸망했다. 한나라를 부활시킨 사람은 유방의 9대손인 광무제 유수다. 역사가들은 광무제가 부활시킨 이후의 한나라를 편의상 후한(後漢)으로 지칭한다. 바로 그 광무제의 묘호도 세조였다. 왕조를 부활시키는 '재조'의 공로를 세웠다는 의미였다.

칭기즈칸이 이룩한 몽골제국을 중국 땅에 정착시킨 군주는 손자 쿠빌라이칸이다. 쿠빌라이는 도읍을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기고 중국식 국호를 원(元)으로 제정했다. 그리고 몽골제국이 농경지대 중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쿠빌라이의 묘호도 세조다. 재조의 공로가 있다고 인정된 것이다.

 <대군-사랑을 그리다>의 수양대군(주상욱 분).
 <대군-사랑을 그리다>의 수양대군(주상욱 분).
ⓒ TV조선

관련사진보기


이런 관행을 감안하면, 수양대군한테 세조란 묘호를 올리자는 제안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가 세운 나라가 수양대군에 의해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수양대군 이전의 세종·문종·단종의 역사를 어느 정도 깎아내리는 의미도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묘호를 세조로 정할 수는 없는 건가?"라는 예종의 제안에 대해 "역대 임금 중에 세종이 있었기 때문에 (세조란 묘호를) 감히 의논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나이가 어려도 공식 석상에서는 임금이 반말을 하고 신하가 존댓말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했다.

신하들의 대답 속에는 '세종을 두고서, 어떻게 그 아들한테 세조를 붙일 수 있는가?'라는 비난의 의미가 살짝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종은 무시했다. 그리고 세조란 묘호를 강행했다. 신하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

실권자는 예종이 아니라 정희왕후였다. 따라서 묘호를 세조로 하자는 예종의 말은 정희왕후의 뜻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수양대군은 가족들의 조치에 의해, 아버지 세종보다 높은 세조란 묘호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불효를 범한 셈이 되고 말았다.

수양대군한테 세조란 묘호를 올린 것은 수양대군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이다. 하지만, 세조가 평소에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 세종에 대한 효심을 진심으로 표출했다면, 수양대군 사후에 가족들이 세조란 묘호를 제정하기가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살아생전의 수양대군이 그런 불효를 할 사람으로 비쳐지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고인의 뜻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라도 그런 시호를 만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수양대군은 형인 문종의 뜻을 어기고 조카 단종을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살육을 저질렀다. 그렇게 해서 형과 조카에 대해 부도덕을 범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결과적으로 아버지에 대해서도 부도덕을 범하고 말았다. 가족들에 의해 세조라는 묘호를 받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아버지마저 억누른 아들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세종(世宗)과 아들  세조(世祖)의 묘호 속에는 그런 잔혹한 가족사가 담겨 있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