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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오스트레일리안 캠프, 줄여서 '오캠'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1930년대 호주 탐험대가 발견하여 이름이 유래되었다. 해발 2천 미터에 있는 오캠은 안나푸르나사우스(7,219m)와 마차푸차레(6,997m)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2017년 1월, 안나푸르나 어라운드 트레킹을 시작하였지만 관절에 무리가 와서 닷새 만에 마낭(3,570m)에서 포기하고 설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포카라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트레커에서 여행자로 바뀐 것이다. 먹고, 자고, 마시며 일주일을 보내니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이때 불현 듯이 생각난 곳이 오캠이었다.

각자의 사연을 품고

숙소가 있는 레이크사이드 숙소에서 택시로 바그룽 버스 터미널로. 베니행 버스를 타고 카레(1,750m)에서 내렸다. 이곳부터 걸어야 한다. 오캠까지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며 고도차는 불과 250미터 남짓.

마을을 지나자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높지 않은 산정이지만 가파른 계단과 쉼터가 있으며 눈길 닿는 곳마다 다랑이 논과 밭이 걸려 있었다. 겨울인데도 온통 노란 유채꽃이 만발하였다. 바구니를 메고 수다를 떨며 걷는 소녀들이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 양지바른 곳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저절로 미소가 피어나는 풍경이었다.

카레에서 본 유채밭 모습
▲ 유채밭 카레에서 본 유채밭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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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면서 만난 네팔 산골 소녀들
▲ 산골 소녀 산을 오르면서 만난 네팔 산골 소녀들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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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쯤 걷자, 멀리 능선 위에 롯지(숙소)와 설산이 걸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캠인 것이다. 마을은 롯지만 몇 채 덩그러니 있었다. 샤워를 하고 옥상에 오르니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사우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오캠은 많은 뷰포인트 중에서 마차푸차레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구름과 조화를 이루며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설산 모습이 신비로웠다.

마을을 산책하였다. 롯지마다 화분으로 돌담을 장식하였고 세인포티아와 장미가 핀 예쁜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설산을 배경으로 텐트에서 보내는 밤은 특별한 추억을 선사하겠지.

숙소 옥상에서 본 안나푸르나사우스
▲ 안나푸르나 사우스 숙소 옥상에서 본 안나푸르나사우스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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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자 오가는 사람 숫자가 증가하였다.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ABC, 4,130m)나 마르디히말(3,900m) 트레킹을 끝내고 하산하는 트레커, 오캠으로 가족 나들이를 온 네팔리, 담푸스(1,650m)에서 시작하여 1박2일의 짧은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까지. 저마다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마을을 지나치거나 배낭을 내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해거름에 건너편 산 중턱에서 스님 한 분이 내려오고 계셨다. 멀리서 보아도 우리나라 스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합장하며 인사를 드렸다. 산 윗자락에 토굴을 짓고 수행하고 계신다고 하였다. 작은 체구지만 매서운 눈매를 지닌 스님. 생각지도 않은 만남이 인연이 되어 다음날 담푸스 나들이를 함께 하기로 하였다.

저녁 무렵, 롯지 식당에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모두 들뜬 모습이었다.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와 마르디히말 트레킹 무용담으로 식당 분위기는 뜨거웠다. 모두 가슴 깊은 곳에 화두 하나씩을 간직하고 히말라야를 걸었나보다.

군대 제대 후 10개월째 네팔과 동남아를 오가고 있다는 젊은이, 호주에서 1년간 워킹 홀리데이를 끝내고 이년째 세계 여행 중이라는 학생,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40살 즈음 사표를 내고 인도 유학을 하였다는 40대, 태국 북부 빠이에 조그마한 터전을 마련하고 여행 중인 50대 등.

새벽, 옥상이 소란하였다. 올라가보니 사람들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히말라야 일출은 어느 장소에서 보든 말을 잊게 한다. 분홍빛 여명 아래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깨어나고 있었다.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포즈를 취하자 오캠의 아침이 밝아왔다. 산 중턱에 주황색 빛을 발하는 작은 점 하나가 보였다. 자세히 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아침 수행을 하고 계셨다.

오캠의 새벽 모습
▲ 일출 오캠의 새벽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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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푸스 나들이

스님의 아침 공양이 끝난 후 담푸스까지 산책을 하였다. 랄리구라스(네팔 국화) 가득한 능선 길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담푸스는 스님의 아침 산책 코스. 매일 걷는 것으로 일상을 시작하신다. 스님이 걸음을 멈춘 곳은 모두가 뷰포인트. 마차푸차레 모습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니! 스님의 조용조용한 말씀을 듣고 있자니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 같았다. 산도 사람도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기에.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라 힘들지 않았고 울창한 랄리구라스 숲이 우거져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림 같은 히말라야 설산을 왼편에 두고 한 적한 산길을 걷는 느낌은 천상으로 가는 길처럼 평화로웠다. 특히 맑은 햇빛과 툭 터진 산 아래 풍경은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열어 주었고,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히말라야 설산 모습이 스님의 말씀과 어우러져 마음에 각인되었다.

오캠에서 담푸스로 향하면서
▲ 마차푸차레 오캠에서 담푸스로 향하면서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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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푸스(1,800m)에 도착하였다. 마을 입구에 설산을 품은 작은 연못이 있었다. 농가와 마차푸차레가 연못에 반영되어 함께 흔들렸다. 히말라야의 장엄한 설산이 한 뼘 연못에 들어오다니!

과거 바그룽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담푸스는 트레킹 요지여서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ABC)에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나야풀까지 도로가 개설되면서 트레일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트레커 숫자보다 많은 롯지가 과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산기슭을 따라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 위에 설산이 우뚝하였다.

설산을 품은 연못
▲ 담푸스 설산을 품은 연못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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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캠으로 돌아오면서 스님께서는 자신의 살아온 인생, 출가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그리고 이곳에서 수행하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스님은 불과 물이 만나는 히말라야가 최고의 도장이라고 하셨다. 무당의 신 내림처럼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 뿐, 끝내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는 말씀을 하면서 허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화를 내는 것은 자기 마음의 복을 태우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남과 비교하는 사람이다."
"단순하게 살아라. 현대인은 쓸데없는 절차와 일 때문에 얼마나 복잡한 삶을 사는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나의 그릇이 작아 마음에 담지 못한 것이 원망스럽다.

해가 질 무렵, 스님의 토굴을 방문하였다. 두 평도 되지 않은 방이지만 정갈하였다. 작은 탁자에 책 몇 권, 침구류, 다기가 전부이다. 방 안에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수도승의 소박한 살림에 고개가 숙여졌다.

창을 통해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토굴! 차를 마시고 법문을 듣자니 송구한 마음만 가득하였다.   

하산 인사를 드리려 토굴에 들렀더니 마을 어귀까지 오셔서 배웅해 주셨다. 스님의 법명을 여쭈어도 웃기만 하셨다. 사진을 같이 찍고 싶었지만 결례가 될 것 같아 돌아서서 가시는 뒷모습만 카메라에 남겼다.

히말라야를 닮은 스님의 법문을 가슴에 품고 세상으로 향했다.


태그:#히말라야, #네팔, #오스트레일리안캠프, #오캠, #담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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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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