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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화 상지대 총장직무대행
 정대화 상지대 총장직무대행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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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대는 수십년 동안 김문기, 사학비리, 분규사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임시이사가 파견되면 안정됐고, 정이사 체제로 전환되면 분규가 시작되는 역설이 거듭됐다. '사학비리의 대명사'로 불렸던 김문기 전 이사장 체제의 구재단이 최대 변수였다. 온갖 비리를 저질러 쫓겨났던 재단을, 사학 정상화라는 미명 아래 학교로 불러들인 건 비상식적인 법 규정과 보수정권의 비호였다.

그랬던 상지대가 달라졌다. 지난해 8월 31일은 상징적인 날이었다. 8년 6개월 동안, 한때 60개가 넘었던 천막농성장이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민주화 투쟁 주역들이 승리를 선언하며 스스로 철거한 것이다. 철옹성 같았던 김문기 체제가 무너졌다. 1993년 김문기의 구속으로 마무리된 '제1 민주화'가 김영삼 정부의 개혁사정 드라이브에 힘입은 것이라면, 지난해 농성천막 철거로 상징되는 '제2 민주화'는 오롯이 상지대 구성원들의 단결된 힘으로 쟁취한 것이었다.

김문기 체제에 맞서며 상지대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섰던 대표적인 인물이 정대화 교수다. 그는 지난해 8월 교육부가 상지대에 임기 1년의 관선 임시이사를 파견한 직후 이사회(이사장 고철환)로부터 총장직무대행 겸 부총장에 임명됐다. 22년 전 법인 사무국장을 맡으며 상지대와 인연을 맺은 그는 교수협의회 대표와 상지대비상대책위원장 위원장 등 궂은 일을 도맡다가 김문기 총장 체제에서 파면당하기도 했다. 비리재단 측에서 보자면 눈엣가시인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였다.

지난 2월 23일 오후 강원도 원주 상지대 총장실에서 정대화 총장직무대행을 만났다. 그는 지난 6개월 동안 총장으로서 가장 주력했던 게 "분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대학으로 탈바꿈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더불어 추진했던 과거의 적폐 청산과 미래의 재정 안정성 확보도 모두 '상지대 정상화'와 맞닿아 있다. 향후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정부가 추진중인 '공영형 사립대(공영사학)' 1호로 선정되는 일이다. 이를 통해 상지대 정상화를 공인받고, 비리재단의 복귀를 원천봉쇄하겠다는 거다.

'유쾌한 달변가'인 그가 2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울컥했던 순간이 있다. 1986년에 벌어졌던 소위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비리재단이 조작된 삐라를 뿌리고, 학생 150명 가량을 간첩으로 둔갑시켰던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학생들은 물론 방관했던 교수와 직원들에게 지금까지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분노가 수십년 동안 상지대 민주화투쟁을 끌고온 힘으로 작용했다고.

정대화 총장대행은 스스로 '넘버3'를 자처한다. 총장은 '넘버2'인 학생들보다 서열이 낮기 때문에 언제든 편하게 총장실로 찾아와 불만이나 고민을 털어놓으라는 거다. 지난 2월 9일 졸업식(학위수여식) 때 교가 대신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 노래를 부르고,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졸업장을 받은 진풍경도 '넘버2'인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수용한 결과다. 김문기 체제에서 무기정학 징계를 받았던 총학생회장에게 공로상을 수여한 장면은 상지대 민주주의를 복원한 상징이었다.

올해는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염형철 환경운동연합 전 사무총장,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을 초빙교수로 모셨다. 그리고 친일파, 환경, 시민사회 등을 주제로 일회성 특강이 아닌 정규 강좌를 개설했다. '한국 사회,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대형 릴레이 특강도 성적을 매기지는 않지만 학점을 인정하는 새로운 시도다. 상지대이기에 가능한 일이란다.

상지대는 학교운영과 관련한 중요한 사항은 학생과 교직원이 함께 참여하는 위원회나 교무회의에서 결정한다. 총장은 의견을 모으고, 이사회와의 연결고리 역할을 자임한다. 학내 구성원들이 두루 참여하는 위원회만도 100개에 달한다고 한다. 수많은 위원회들은 집단지성을 발현하는 민주주의의 실험 현장인 셈이다.

상지대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정대화 총장대행과 나눈 이야기를 소개한다.

 2018년 2월 9일 상지대 학위수여식이 열렸다.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단상에 올라 졸업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9일 상지대 학위수여식이 열렸다.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단상에 올라 졸업장을 받았다.
ⓒ 상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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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장직무대행을 맡은 지 7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소회는?
"지난 6개월 동안 급한 불을 끄는 소방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허둥대면서 일을 했는데, 지금은 (주요 의사결정기구인) 교무위원회도 틀이 잡혔고 안정감이 있다."

- 지난 6개월 동안 가장 주력했던 것은 무엇인가.
"분규 체제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정상적인 대학으로의 탈바꿈, 그게 첫 번째다. 이를 위해 구성원들의 의사를 모으고, 잘못된 걸 바로잡는 일에 주력했다. 두 번째는 상지대 구성원을 괴롭히고 황폐화시켰던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었다. 그 다음은 재정적자 해소 문제였다."

- 임시이사회와의 소통은 원활한가. 대학운영 체계도 바꿨다고 하는데.
"고철환 이사장이 (총장직대인) 나보다 더 민주적인 것 같다(웃음). 이사회가 대학 구성원들의 의사를 활발하게 수용해준다. 이사회가 민주적으로 구성원들의 생각을 물어보고 결정한다. 굉장히 높은 수준의 민주성과 개방성을 갖추고 있다."

- 교육부에서 파견된 임시이사들의 임기가 1년인데,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임시이사 교체, 임시이사 연임, 정이사 선임. (임시이사회를 포함해) 내부적으로는 정이사를 선임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조만간 교육부에서 (실태 파악을 위해) 실사를 나올 예정이다."

- 그동안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의 심의원칙 때문에 상지대가 임시이사 체제에선 정상화되고, 정이사 체제에선 복귀한 구재단 인사들로 인해 분규와 파행을 거듭해왔는데. 구재단 복귀의 길을 터주는 사분위의 '문제 조항'이 고쳐졌나.
"아직 안 고쳐졌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가 사분위 정상화 심의원칙을 바꾸겠다며 사립학교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입법과 관련된 사항이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기대를 거는 건) 5월이 되면 사분위원들이 1명을 빼고는 모두 바뀐다. 현재 사분위원장도 없고, 사분위원 11명 가운데 3명이 공석이다. 아직 정부에서 임명하지 않았지만, 3월에 5명이 바뀐다. 사분위원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고 있기 때문에, 사분위원장이 선임되고 위원들 다수가 물갈이되면 처음으로 '문재인표 사분위'가 구성된다. 여기서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 '사학비리의 대명사'였던 김문기 전 이사장의 복귀는 불가능한가, 아니면 낮지만 가능성이 남아 있나.
"'김문기의 복귀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시점이 문제다. 김문기가 김영삼 정부 때인 지난 1993년에 퇴출됐다. 그리고 21년만인 지난 2014년에 복귀했다.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로부터 21년 뒤일 것이다. 87살이니 108살에 복귀가 가능할 거다. '김문기 복귀'를 물어보면 지난해까진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물어보면 '김문기 복귀 가능성은 0%'라고 말하겠다. 물론 김문기의 의사를 대변하는 극소수가 정이사로 들어올 수는 있다. 그건 큰 의미가 없다."

- 김문기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람이 상지대 이사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분위 정상화 심의원칙에 따르면, 대학 이해관계자 가운데 정이사를 구성하도록 돼있다. 이명박 정부 때 사분위에서는 구재단에 과반의 정이사 선임권을 주도록 했다. 과반은 아니지만, 지금도 구재단 이해관계자에게 이사 몫을 배분할 수 있다. 상지대 구성원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총장직대를 맡고 있는 내게 묻는다면 전체 정이사 9명 가운데 1명은 구재단(김문기) 몫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나 2명 이상은 절대 안된다."

 정대화 상지대 총장직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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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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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된 말로 '김문기가 상지대를 날로 먹었다'는 얘기가 있다.
"김문기가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와 청와대를 동원해서 자기 돈 10원 한 푼 안 들이고 상지대를 가져갔다. 체육계 거물이자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을 지냈던 민관식(1918~2006)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문교부 인맥이 민관식 맨파워로 구성될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했다. 박정희 유신 때인 1971년에 문교부 장관이 됐다. 그때 김문기가 민관식 쪽에 붙어서 상지대를 소유하게 된 거다.

민관식이 서울 동대문구에서 여당 국회의원을 할 때 김문기는 파고다가구공예점을 운영했다. 국회의원 선거 때는 민관식 후보의 재정위원장·선거사무장을 맡았다. 그 후 민관식이 문교부 장관으로 가니까, 책·걸상 납품을 도맡으며 떼돈을 벌었다. 그리고 상지대에 10원 한 푼 출연하지 않고 말 그대로 날로 먹은 거다. 지금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김문기가 20년 동안 상지대 이사장을 하면서 학생들의 등록금의 절반 가량을 가져갔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 아직도 상지대에 '김문기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을텐데.
"김문기가 1974년부터 1993년까지 20년 동안 이사장을 했는데 그때의 적폐는 1차 상지대 민주화 시기에 상당부분 정리됐다. 이후 김문기의 둘째 아들(김길남)이 이사회에 들어오고 김문기가 총장으로 복귀해 또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그 가운데 정관이나 규정 등은 지난 6개월 동안 바로 잡았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건 김문기 체제에 부화뇌동했던 부역자들 문제다. 조사과정을 거쳐 이들에 대한 징계 절차를 밟고 있다."

- 김문기 체제의 부역자들이 반발하지는 않나. 징계 절차는 어느 정도 진행됐나.
"원칙대로 절차를 밟고 있다. 당사자들이 반발할 여지는 없다고 본다. 교직원에 대한 징계 절차는 굉장히 엄격하다. 교수 징계는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거치게 돼 있다. 직원 징계는 지방노동청이나 노동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법률에 정해진 엄격한 규정과 객관적 기준에 따라 징계 수위를 결정한다.

지난해 여름방학 때 행정감사를 진행했고, 내가 총장에 취임한 뒤에는 법인과 협의해서 법인 특별감사를 진행했다. 지난해 10월부터는 교수와 학생 대표들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가동되고 있다. 이 조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다. 징계는 지난해부터 진행됐는데, 올해 상반기에는 완료될 것이다."

- 사학비리만큼이나 구성원들에게 큰 상처를 입힌 게 1986년에 발생했던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이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건가.
"김문기 체제에서 학교측이 조작한 사건이다. 학내에 '가자, 북의 나라로'라는 삐라를 자기들이 뿌린 뒤 경찰에 신고해 학생 150명 가량이 간첩으로 몰렸다. 당시 교수들은 그 상황에서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학생들이 굴비처럼 엮여서 끌려가는데도 지켜주지 못하고 침묵했다는 트라우마가 강했다. 용공조작 사건이 벌어진 건 1986년 10월 14일이었다.

이 날은 유성환 신한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는 소위 '통일 국시' 발언으로 정치권이 들썩였다. (유성환 의원은 다음날 구속됐다.) '통일 국시' 발언이 있던 날 저녁 상지대에는 조작된 삐라가 뿌려진 것이다. 그 시기 전후로 금강산댐 사건, 1290명이 구속된 '건대 사태'가 벌어졌다.

교수들이 무엇보다 가슴 아파하는 것은, 조작된 사건인데도 그 이후 강원도 원주 경제단체들이 상지대 졸업생은 취업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결의를 했다는 거다. 한 마디로 취업 블랙리스트지. 상지대를 졸업했다고 하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취직을 안 시켜줬다. 그로 인해 상지대가 받은 타격과 억울함은 말로 하기 어렵다. 학교에서 조작했다는 걸 알아채고 사건 발생 3일만에 치안본부에서 사건을 덮고 학생들을 다 풀어줬는데도 말이다.

용공조작 사건이 벌어지기 1년 전에는, 김문기 체제에 반대하며 항의 농성을 벌인 교수 3명을 특공대가 진압하듯이 끌어내 이천·여주 등에 분리 감금시킨 상태에서 징계위를 열고 파면시킨 강제해직 사태도 벌어졌다. 그때도 교수들은 침묵했다. 그 트라우마의 빚이 1987년 6월항쟁 직후 상지대 교수협의회를 만들게 한 것이다."

 정대화 상지대 총장직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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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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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그 사건을 생각하면 울컥하나 보다. 눈시울이 붉어진 것 같은데.
"내가 교수일 때는 아니지만, 지금도 그 사건을 생각하면 울컥울컥한다. 나는 1996년에 상지대 교수가 됐다. 그 해 가을 우연히 걸어가는데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있더라고. 그때 처음 알았다. 물어봤더니, 어떤 학생이 설명을 해줬다. 그 학생이 89학번인데, 내가 법인국장할 때 나와 같이 활동하며 4년 동안 작업을 해 1999년 김문기를 국회 국정감사장에 끌어냈다. 20년 동안 교수로 지켜봤는데, 학생들이 크게 말하지 않아도 용공조작 사건에 대한 상처가 컸다. 그 사건을 떠올리면 도저히 김문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지."

- 수십 년 전에 벌어진 일인데도 상지대 후배들이 이 사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나.
"아까 말한 그 학생처럼 잊지 않고 이어가겠다는 학생들이 있었다.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기억하면 승계되고, 망각하면 승계되지 않는다. 우리가 임진왜란이나 6·25전쟁도 알고 있듯이 상지대에서는 용공조작 사건이 집단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고 재생산돼 왔다.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선배 때 겪은 사건이 후배들의 DNA로 남는 것 같다.

학생들에겐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상지대 민주화 투쟁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왜 상지대 학생들이 사학비리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설까,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내 생각에는 용공조작 사건에 대한 분노가 가장 큰 에너지였던 것 같다. 학생들을 간첩으로 모는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냐는 거다. 이건 상지대 학생이라면 토론할 것도 없다. 김문기 측근들이 '정대화는 빨갱이고, 너희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얘기를 하면 학생들이 반문한다. '왜 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았어요? 설명해보세요'라고."

- 지난해 8월 31일은 상지대에선 역사적인 날이었다. 학내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던 천막 농성장을 자발적으로 철거했다. 소회가 남달랐을텐데.
"2009년부터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중간에 천막이 부숴진 적은 있었지만, 약간의 공백을 제외하고는 지난해 8월말까지 8년 6개월 동안 천막 투쟁을 한 거다. 천막 농성장은 상지대 분규의 상징이었다. 지난한 싸움 끝에 결국 이사회를 바꾸고 김문기를 우리 힘으로 몰아내니 고진감래, 사필귀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교육적으로도 대단한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의미가 남달랐던 게 이 시기를 상지대에서는 '제2 민주화'라고 부른다. 나는 '제1 민주화' 때는 학교에 없었다. 331일 동안의 투쟁 끝에 1993년 김문기가 구속되면서 끝났던 제1 민주화는 내부 구성원들이 투쟁해서 얻은 결과라기보다는 김영삼 정부의 사정·개혁의 성과였다. 우리가 한 게 있다면 사학비리의 대명사였던 김문기가 사정·개혁 대상이 되도록 불을 지핀 역할이었다. 그에 반해 지난해 마무리된 제2 민주화는 그 과정이 지난하고 처참했는데도, 우리의 힘으로 훨씬 높은 수준의 대학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 8년 6개월 동안 동고동락했던 천막 농성장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니 허전하지 않았나.
"허전했다. 뭔가 하나가 없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어디 와 있는 거지? 여기 상지대가 맞나? 천막이 많았을 때는 60개가 넘었다. 학과당 하나씩, 노조에서 몇 개, 단과대 및 총학생회, 교수협의회 몇 개...  등. 본관을 천막으로 포위한 적이 있었다. 천막이 우리한텐 일상이었는데, 허전하고 아주 이상했다."

 2017년 8월 31일 민주화 투쟁에 승리한 상지대는 천막 농성장을 철거했다. 8년 6개월만의 일이다.
 2017년 8월 31일 민주화 투쟁에 승리한 상지대는 천막 농성장을 철거했다. 8년 6개월만의 일이다.
ⓒ 상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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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한 투쟁 과정이었는데, 언제 가장 지치고 힘들었나.
"김문기가 총장되기 전에 김문기 둘째 아들이 2014년 3월 31일에 이사장이 됐다. 김문기는 그 해 8월 14일 총장이 되던 날, 나를 징계 대상으로 올렸다. 그 시기가 가장 힘들었다. 김문기 아들이 이사장이 되면서 구재단이 학교를 장악하자 언론에서 전화가 빗발치는데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김문기뿐. 그러다보니 언론이 나한테만 몰렸다. 4월말에 있었던 김문기 고발 재판에도 내가 김문기에 맞서는 검사측 증인으로 나갔다. 돌아오면서 '신세 조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데모도 안 하고, 기자회견도 안 하고 다 빠져나갔다.

김문기가 총장이 되자 내가 징계에 올랐다는 얘기를 듣고 지리산에 갔다. 사흘 후쯤 총학생회장한테 전화가 왔다. '어디 계세요. 저희도 올라갑니다' 그러더라구. 알고보니 본관 2층 총장실로 간다는 거다. 그래서 부랴부랴 짐을 싸서 학교로 왔더니 총장실을 점거했더라구. (몇 개월 간의 침묵을 깨고) 학생들이 먼저 나서서 투쟁이 시작됐다. 주동했던 학생이 무기정학을 당했는데, 그 징계를 받은 것 때문에 올해 졸업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웃음). 학생들이 움직이니까 교수협의회도, 노조도 움직였다. 그 때가 2014년 8월 17일이다.

김길남이 이사장에 취임하고 김문기가 총장이 되기까지 4개월 여 동안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었다. 되돌아보면 큰 태풍이 몰려오는 과정이긴 했지만, 그때는 태풍이 올지 안올지 잘 몰랐다. 내가 지나가면 저쪽에 있던 사람이 흩어졌다. 몇몇 친한 교수들에게 밥 먹자고 하면 '나야 잘려도 되니까 같이 밥 먹어도 되는데, 정 교수하고 밥 먹으면 잘린다는 소문이 돌아'.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 상지대라고 하면, 먼저 두 사람이 떠오른다. '사학비리' 김문기와 '민주화 투쟁' 정대화. 누가 정대화를 투사로 만들었나.
"(웃으면서) 김문기가 만들었지. 안식년도 두 번이나 반납했다. 첫 번째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라서 그랬다. 아내와 안식년이 같은데, 아내만 미국에서 두 달 지내다 돌아왔다. 대신 두 번째는 제대로 하자고 약속했지. 그래서 2010년 말쯤에 뉴욕에 집을 빌렸다. 그런데 그해 12월에 교수협의회 대표로 추천돼, 한참 고민하다가 맡기로 하고 마누라한테 엄청 두드려 맞았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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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마이뉴스 류승연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