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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북한산 비봉을 지키던 비석은 무학대사비로 알려졌지만, 추사 김정희가 이곳에 올라 비석을 판독한 결과 이 비석은 신라 진흥왕 때 세운 순수비로 확인이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포함해 북방영토를 개척한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에 맞서 신라와 백제가 나제동맹을 맺어 이에 대항했던 국제질서는 고구려의 약화와 함께 새로운 변화의 물꼬를 트고 있었다. 오늘은 '천전리각석(川前里刻石)'을 통해 당시 신분질서를 알아보고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백제와의 대립, 마지막으로 진흥왕릉의 위치와 관련한 부분을 중점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신라의 왕은 성골만이 오를 수 있다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으로,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삼촌과 조카 사이니 조카와 결혼한 근친혼이었다. 지금이야 윤리적 관점에서 근친혼이 용납될 수 없지만, 과거에는 혈통을 지키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근친혼이 성행했다.

재미있는 점은 '천전리각석'을 통해 사부지갈문왕이 사랑했던 여인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다. 천전리각석에 새겨진 원명에는 누이인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과 놀러와 새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 옆에 있는 추명에는 사부지갈문왕과 결혼한 상대로 지소부인이 등장하고, 아들인 삼맥종(진흥왕)이 함께 두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천전리각석'에 남겨진 원명과 추명, 당시 신라 사회의 신분질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 천전리각석 '천전리각석'에 남겨진 원명과 추명, 당시 신라 사회의 신분질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 김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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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유추해보면 사부지갈문왕은 사랑보다 왕실의 대를 잇기 위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이유는 당시 신라의 왕은 성골만이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골의 지위는 성골과 성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만이 가질 수 있는 신분이었다. 따라서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과의 결혼을 통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삼맥종은 유력한 왕위 계승의 후보자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훗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여인의 신분임에도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성골의 신분이었다는 점과 함께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신라와 백제와 운명을 건 한판 승부

진흥왕 대에 신라는 외형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는데, 훗날 삼국통일의 근간이 되는 화랑제도가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영토적인 부분에서 신라는 기존의 국경인 계립령과 죽령을 넘어 한강유역과 함경도까지 진출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이 같은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포함해 당대의 기록인 '단양신라적성비'와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 등에 세워진 진흥왕순수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단양신라적성비를 통해 신라 진흥왕 때 기존 국경인 죽령을 넘어 죽령 이북으로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 단양신라적성비 단양신라적성비를 통해 신라 진흥왕 때 기존 국경인 죽령을 넘어 죽령 이북으로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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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같은 영토의 확장이 나제동맹의 파기와 백제와의 대결로 비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힘의 우위에 있던 고구려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는데, 이 같은 사실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 안원왕 때 녹군과 세군으로 갈려 대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신라와 백제는 함께 기존의 정세를 바꾸기 위해 북진을 결의하게 되고, 한강유역을 점령할 경우 한강을 기점으로 남쪽은 백제가 북쪽은 신라가 가지는 것으로 합의했다.

북진의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고구려는 결국 임진강 이북으로 물러나며, 백제는 개로왕 이후 고토인 한강유역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553년 7월, 신라는 돌연 약속을 깨뜨리고 백제의 동북쪽 변경을 빼앗고 신주를 설치했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성왕은 일단 상황을 받아들이고,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사기>는 당시 성왕이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며 화친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상은 물밑에서 전쟁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신라 때 당항성으로, 553년 7월 백제의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축성되었다. 신라에 있어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 화성 당성 신라 때 당항성으로, 553년 7월 백제의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축성되었다. 신라에 있어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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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554년 백제는 신라에 대한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당시 성왕은 왜와 가야를 끌어들이며,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신라 역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에 전쟁은 팽팽한 균형과 함께 장기전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의 성왕은 계속된 전쟁으로 지친 군사와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병 50명을 거느린 채 이동을 하고 있었는데,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던 신라군은 미리 매복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던 백제의 성왕은 포로로 잡히는 초유의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로잡힌 백제의 성왕은 '구천(狗川)'에서 목이 잘려 신라 왕경의 북청 계단에 묻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관산성 전투로 부르는 이때의 패전으로, 백제는 구심점인 성왕이 사라진 데 이어 3만 군대가 신라에 의해 괴멸을 당했다.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에 자리한 구진벼루, 성왕의 패사지로 알려진 곳이다.
▲ 구진벼루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에 자리한 구진벼루, 성왕의 패사지로 알려진 곳이다.
ⓒ 이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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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며, 이후 진흥왕이 가야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만큼 수세적인 상황에 몰렸다. 따라서 관산성 전투는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의 결과물이자 한반도에서 힘의 우위를 보인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선도산 고분군의 진흥왕릉과 서악동 고분군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흥왕릉은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 경주시 서악동에 자리한 선도산 고분군 중 가장 위쪽에 있는 고분이 진흥왕릉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진흥왕릉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왜소하기 때문에 이곳이 정말 진흥왕릉인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경주시 서악동에 자리한 선도산 고분군 중 가장 위쪽에 자리한 진흥왕릉
▲ 진흥왕릉 경주시 서악동에 자리한 선도산 고분군 중 가장 위쪽에 자리한 진흥왕릉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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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 유의건이 남긴 <나릉진안설>을 보면 선도산 고분군을 신라왕릉으로 비정할 때 기록에 근거하지 않고, 촌부의 말에 의존했음을 문제로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최초 황정의 후손이 경주부윤에게 밝히기를 황정의 묘 옆에 있는 고분이 진흥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즉 최초의 진흥왕릉의 위치가 현 위치가 아니었다는 점과 이때까지도 남은 3기의 고분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신라진흥왕릉고>를 통해 경주 무열왕릉의 뒤에 자리한 서악동 고분군 중 하나를 진흥왕릉으로 봤다. 김정희는 진흥왕릉이 서악리에 있다고 했는데, 영경사 북쪽 역시 서악리로 봤다. 따라서 영경사 북쪽에 있는 경주 무열왕릉을 기점으로 뒤에 있는 서악동 고분군 중 하나를 진흥왕릉으로 비정하게 된 것이다. 당시 김정희는 여러 사람과 함께 인근을 살펴봤지만, 진흥왕릉으로 볼 수 있는 다른 능을 찾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무열왕릉의 뒤쪽에 자리한 서악동 고분군,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많은 연구자들이 서악동 고분군 중 하나를 진흥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 서악동 고분군 무열왕릉의 뒤쪽에 자리한 서악동 고분군,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많은 연구자들이 서악동 고분군 중 하나를 진흥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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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의 비정과 관련해 논란이 많은 건 당시의 기록이 명확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해 전해지지 않은 결과 신라가 멸망한 이후 어느 순간부터 신라왕릉의 위치와 피장자에 대한 내용은 실전이 되어버렸는데, 조선 초기의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 경주에 박혁거세의 능과 각간묘(김유신묘)의 위치만 남아 있었다.

지금도 신라왕릉에 대한 연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한 기록과 지리지, 문집 등과 함께 신라왕릉의 외형, 유물 등을 복합적으로 추정해서 찾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도산 고분군의 진흥왕릉과 함께 서악동 고분군 역시 주목해볼 공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태그:#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 #진흥왕릉, #서악동 고분군,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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