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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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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지 말고, 어렸을 때부터 너를 무척 귀여워하셨고 네가 중학교 입학하는 날 중학생에게는 과분한 고급 시계를 선물해주셨던 천일사 복덕방 할아버지가 기어코 돌아가셨구나.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너는 너대로 천일사 할아버지와 많은 추억이 있겠지만 아버지는 천일사 할아버지를 보며 가끔 이런 생각을 해왔다.

"나도 저렇게 곱게 늙어갔으면……."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동네 사람들, 특히 어린아이들만 보면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젊은 아기 엄마에게 종종 오해를 하기도 했지만 어쩌랴? 천성이 그런걸. 그저께 장례식날 문상 온 시장 사람들과 나눈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 적어본다.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들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시장통 젊은 상인들과 술이라도 한잔할라치면 귀가 먹었는지 아니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지 젊은이들이 얘기하면 귀를 쫑긋 듣기는 듣는데 대꾸도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끄덕 웃기만 해.

자주 있는 일이지만 젊은 상인들하고 무한리필 삼겹살집에서 소주라도 한잔하고 계산할 때면 그렇게 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아도 나이 먹은 내가 돈 쓸 일이 뭐 있겠냐며 굳이 당신이 계산하셨지.

아버지 역시 나이 60이 되어가니 눈이 침침하지만, 이 노인네가 눈이 워낙 어두워 뭔 책을 보더라도 돋보기를 올렸다 내렸다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은지 "책에는 다 좋은 말 쓰여있지 뭐" 책을 내려놓고 먼 산 바라보며 웃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편안한 얼굴을 본 적이 없어.

꽤 오래전 일이지만 평생 어렵게 장만한 집 두 채 중 한 채를 팔더니 시세보다 많이 받았다며 시장 사람들 모아 술을 한 잔 사더구나. 나중에 알았지만 넉넉지 못한 두 동생을 위해서 집을 팔았다는데, 집 판 돈을 똑같이 두 동생에게 나눠주며 "진작에 줬으면 좋을 걸 그놈의 욕심때문에......" 라며 그 명랑한 분이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는 정육점 최씨 아저씨의 이야기다.

할아버지를 시장 사람들 손으로 캐딜락에 태워 장지로 보내면서 다들 짧은 탄식을 담아 하는 말이,

"나도 할아버지처럼 살아야 하는데, 나도 할아버지처럼 곱게 늙어갔으면……."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언젠가 아버지가 지어놓은 시 한 편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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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하얀 보가 덮인 앉은뱅이 책상
살얼음 동동 동치미 한 대접
화로의 다 꺼져가는 재 속에 파묻힌 군고구마
화로에 걸쳐놓은 구멍쇠 위의 된장 뚝배기
윗목에 종이로 꾹, 막아놓은 소주병
할아버지 쇠죽을 끓이러 나가시기 전
소주 한 잔 목으로 넘기는 소리 꿀꺽꿀꺽

눈 덮인 보리밭의 새순처럼
푸르렀던 시절을 함께 동행했던
내 삶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들

아, 텃밭 떠난 배추처럼
언제 시들지 모를 청보리 새순 같던 내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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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아버지와딸, #시집,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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