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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 이를 처음 세상에 알린 부분은 소설 <순이 삼촌>이란 문학작품이었다. 이후 이 땅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누구보다 앞서 제주4·3의 진상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한편 미해결 과제에 대한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 왔다. 제주4·3 70주년을 맞아 '제주4·3과 문화예술'이라는 제목으로 문화예술의 각 장르별 제주4·3 작품들을 소개하는 장을 마련한다.   - 강정효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제주 민예총 이사장)

그가 관덕정의 정확한 유래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관덕정'이면 충분했고, 공자묘 같은 그 건물이 옛날 세종 때 홍화각(弘化閣) 주인인 제주목사가 '상무정신(尙武精神)'을 함양하기 위해 세운 연무장이고, 또한 큰 문 앞의 돌바닥에 '죄인'을 무릎 꿇려 재판 같은 것도 하고, 위정자에 의한 잔학과 살육이 그 앞에서 벌어진 조선시대의 유물이라는 것도 노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다만 노인의 관심을 끈 것은, 아직도 성내에, 그러니까 제주도 전역에 관덕정만큼 큰 건물이 없으며 또한 관덕정은 '옛날'을 전해주는 유일한 건물이라는 바로 그 점이었다.

- 김석범의 소설 <관덕정> 중에서


 <총파업의 관덕정 광장> 강요배 화백
 <총파업의 관덕정 광장> 강요배 화백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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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광장에서, 1947년 3월 1일 제주4·3의 도화선이 되었던 3·1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의 발포로 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빠져나오던 군중 가운데 6명의 희생자와 8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곳이 바로 관덕정 앞 광장이다.

이 사건에 대한 항의로 1947년 3월 10일부터 제주도 전도에 걸친 민관총파업이 벌어졌다. 미군정 당국은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철도경찰 등 응원대를 제주도에 대규모로 급파했다.  이때 검속된 인원이 2500여 명에 이른다. 

1947년 당시 관덕정 인근에 제주경찰감찰청이, 맞은편 골목 안으로 제주도립병원이 있었다.  3․1절 기념대회가 열렸던 제주북국민학교는 관덕정의 서북쪽 500m 지점에 자리해 있었다. 1949년 6월 6일 교전 중 사망한 무장대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관덕정 앞에 전시됐고, 주민들은 이를 (강제로) 관람해야 했다. 또한 신축년(1901년) 이재수 항쟁 당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살육당한 곳도 바로 이 광장이다. 

관덕정

그대는 아는가
여기 관덕정 앞 광장에서의
1947년 3월을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인한 
무고한 희생과
그에 저항한 전 도민적인 
장기파업을 

그대는 보는가
십자가에 매달려 전시되었던
장두의 시신을 

역사를 함몰시키려는 듯
그 시신에 꽂혀 있었던 
조롱의 숟가락을 (중략)

그대 말하는가
이 관덕정 광장 5백년 치욕과 
통한의 역사를 

바람에도 의연히 펄럭이는 
탐라 자존의 깃발을

이제 다시 노래해야 할 
해방과 통일의 그 4·3의 봄을 

김경훈의 시 '관덕정에서' 부분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강정효씨는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제주 민예총 이사장입니다. 이 글은 제주4.3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에서 발행한 <4.370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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