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계패럴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장애인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이종경 선수(가운데).

평창동계패럴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장애인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이종경 선수(가운데). ⓒ 대한장애인체육회


한국 사회에서 시민은 어떻게 해야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걸까? 자원봉사자가 되어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더라도 그냥 거기에 도움이 되는 다른 일을 능동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일까?

민주주의 이전, 정치에 접근하는 방법은 폭력적인 방식들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사회 구조가 수직화 되어있는 사회에서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을 빼앗는 방법은 물리력에 기반을 두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사회적 정치참여의 원리가 된 것은 이전 사회의 구성 방식과 비교했을 때 엄청난 차이점을 갖는다.

여러 차례의 정치적이며 폭력적인 혁명들과 아주 적은 비폭력적인 혁명들,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걸리고, 온전히 시스템에 담을 수 없는 더 많고 더 뿌리 깊은 편견에서 시작하는 사회적 차별들을 놓고 사람들은 싸워 왔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일종의 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과정들은 이전과는 다르게 민주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그 원형적인 논리가 보장되는 상태에서의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이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절차들은 너무 느리고 무겁다. 이전의 계급은 '소수자', '이기주의'의 틀로 변형되고, 새로운 기득권이 된 자본은 다시 계급화를 조장한다. 그 결과, 시스템의 밖으로 나가 저항하는 '시위'의 개념이 생겼다. 이 개념들은 시스템을 흐트러뜨리는 것이지만 그 역시 법적 권리로 민주주의의 틀 안에 들어있기도 하다. 그래서 시위마저 '법적절차를 지키는' 형태로 권장된다.

홈페이지에서 찾았는데 "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냐"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언제든 조직위 관련 연락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전화를 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냐"는 것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언제든 조직위 관련 연락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전화를 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냐"는 것이었다. ⓒ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조직위원회 홈페이지


그런데 우리 사회에 시민들이 절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로 있긴 한 것일까? 올바른 참여의 시작은 지식의 습득과 이를 기반에 둔 이해일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정책에 대한 문의와 항의는 참여의 첫걸음이 된다. 그러나 정책에 대해서 문의하거나, 항의하기 위해 정부 각 부처 혹은 유관 기관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볼 때 이 부분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평창동계올림픽이 마무리된 지금,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평창동계올림픽의 경우, 개막 전에는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정치적 공세는 사람들을 지치게 만드는 데 성공했고, 급박한 남북 단일팀의 결성은 '평등'과 '공정'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기도 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평양올림픽'이니 하며 잡음을 양산하는 데 집중하였다.

"'영미!'와 함께 아주 많은 감동과 아주 많은 즐거움, 그리고 체육계의 어두운 단면과 비합리성까지 이번 평창올림픽은 그 자체로 많은 성과를 얻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아직 동계올림픽은 끝나지 않았다. 평창동계패럴림픽(3.9~18)은 시작도 안 했으니까.

나는 사람들이 패럴림픽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혼자서 스스로 온라인상에서 홍보를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정보나 자료가 너무 없었다. 결과적으로 올림픽·패럴림픽조직위원회측에 패럴림픽 관련 문의를 했을 때 다시 '현실의 벽'에 맞딱드리게 됐다.

올림픽이 한창이던 지난 2월 19일, 공식 문의 창구가 어딘지 몰라 홈페이지를 통해 찾은 전화번호로 문의했고, 거기에서도 여러 부서를 거치고 거쳤다. 홍보국과 미디어운영국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결국 대변인실에 전화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전화를 해서 물어보는데 대뜸 수화기 너머 사람은 "누구냐"고 물어봤다. 늘 이야기하듯 "그냥 시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도대체 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었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번호로 다른 부서에 전화했었고, 그 부서에선 본인들의 권한이 아니니 이 프레스팀에 전화해 물어보라고 해서 전화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번호 역시 공식 홈페이지에서 봤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랬더니 역시나 늘 그렇듯, 강압적인 목소리가 이어졌고 나의 이름을 물어보는 절차가 따라왔다. 보통은 문의가 다 끝나면 문의 내용에 대한 추후 답변을 위해 이름과 연락처를 묻지만, 간혹 이번과 같이 '강압적인 힘'을 행사하기 위해 이름을 묻는 경우가 있다.

나는 패럴림픽을 홍보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쯤 되니 나도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항의를 한 것도 아니고 문의를 한 것인데, 정확히는 아직 문의를 하지도 못했는데 왜 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는 것일까. 문의 내용을 답변할 수 없다면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이다. 게다가 홍보를 하고 기자들을 담당하는 프레스팀이 아닌가? 이름을 말하고 나도 조금 오기가 생겨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국에서는 개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을 상대하는 전담 부서를 만들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콘텐츠 크리에이터나 파워블로거들을 활용한 홍보를 한 것으로 아는데요. 저 또한 어떤 항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패럴림픽 콘텐츠를 만들어 홍보를 하기 위해 문의차 전화한 것인데, 이런 식으로 전화를 받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상대방은 "여기는 기자님들에게 안내하는 곳이지 시민에게 안내하는 곳이 아니다"라며 "여기 전화번호를 도대체 어떻게 알아서 전화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런 걸 할 의무가 없다"라고 답변했다. 이후 "그럼 이런 문의는 어디로 하면 되는 건가"라고 묻자, 그는 대변인실 프레스룸으로 하라고 했다.

전화를 끊었고, 홈페이지에서 다시 대변인실 프레스룸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랬더니 방금 전화한 곳과 같은 곳이었다. 전화를 했고, 그 분을 다시 바꿔달라고 하니 자리를 비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럼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실 수 있는 책임자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팀장이 전화를 받았고, 아까 통화를 한 그 분과 통화하고 싶다고 하니 "그 분은 자원봉사자일 뿐이며 지금은 자리를 비워 전화를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내용을 들었는데 "기자가 아닌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우리에겐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들의 말처럼 시민에게 답변을 할 의무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강압적인 태도로 전화를 받고 이름을 되묻는 것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과연 그때 물어본 내 이름은 어떻게 활용이 되었을까? 그 부서의 일이 아닐 수도 있고 올림픽 기간이라 너무 바빠서 그렇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를 하고 또 해도 역시나 아쉽고 조금의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조직위뿐만이 아니었다

 장애인 바이애슬론 국가대표 신의현 선수의 사격 모습.

장애인 바이애슬론 국가대표 신의현 선수의 사격 모습. ⓒ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지난 5년 동안 관공서 등에 전화로 문의를 할 때마다 비슷한 상황을 겪어왔다.

"어디서 전화 주셨어요? 어디 언론사인가요?"
"아, 아니요. 그냥 시민인데요... 궁금한 게 있어서요."

이런 전화 문의를 하던 초반에는 "시민이 왜 이런 전화를 하냐"부터 "시민에게는 답변할 의무가 없다" 등의 말을 듣고 주눅이 들어서 전화를 끊었다. 전화 문의뿐 아니라 정보공개 요청 절차 역시 크게 다르지 않고 비슷하다.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과연 시민의 자격으로 뭔가를 문의하고 참여하고 항의하고 의견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 걸까. 그 전에는 막연하게라도 민주적 절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요즘에는 '과연 시민의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 그 합법적인 절차가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이 지속적으로 든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시민이 주체가 되는 것'으로 배웠다. 하지만 시민이 알아서 주체가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 역량은 사회 속 개인의 책임일 것이고,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그 사회를 운영하는 쪽에서도 이러한 역량을 개발할 수 있는 주체들을 위해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런 일을 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은 무책임하다. 그들이 아니면 그런 일을 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시민이 사회에 관심을 갖는 방법이 뉴스를 열심히 보고 듣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 시민이 작은 역량으로나마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것 역시 중요한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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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올림픽 패럴림픽 조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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