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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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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걱정을 두 주먹에 꼭 쥐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근심과 걱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뭔가 근사한 해결책이 나오리라는 근거 없는 비이성적인 믿음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 대개 이런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은 쓸데없는 망상이 십중팔구다.

여름이면 더워 죽겠다. 겨울이면 추워 죽겠다, 여름이니까 당연히 덥고 겨울이니까 당연히 추울 텐데 도대체 봄부터 가을까지 끊임없이 걱정이다. 불완전한 세상에 사는 완벽주의자다. 행복을 손에 쥐고서도 산을 넘고 내를 건너 발품을 팔고 다니니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매사에 불만이다.

"어쩜 너는 걱정도 안 되니? 참 편하게 세상 사는구나."

아버지가 흔히 듣는 말이다. 아버지라고 왜 근심 걱정이 없겠느냐? 그러나 걱정을 해본들 뾰족한 도리도 없다. 설사 지금의 걱정이 해결된다고 해도 끝없는 욕심 때문에 또 다른 걱정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부정도 긍정을 위한 부정이어야지 부정을 위한 부정은 자신은 물론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까지 우울하게 만든다.

근심·걱정 많은 사랑하는 딸에게 하나만 묻겠다.

"도대체 무엇을 얻으면 너의 그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행복하겠느냐?"

아버지도 요즈음 걱정이 하나 생겼다. 누구에게 터놓기도 부끄러운 그런 걱정이기에 생손 앓듯 혼자 끙끙거리다가 네 생각이 나서 펜을 들었구나. 들어주겠느냐?

아버지가 제법 나이가 들어가니 뭔가 경험도 쌓이고 오라는 곳은 없어도 나름대로 찾아다닐 곳도 생기는구나. 아버지가 잔소리하면 이어령 선생님의 명연설 수준이고 아버지가 글을 쓰면 글이 얼마나 좋은지 사람들이 훔쳐다가 자기가 쓴 글마냥 내세우기도 하더라.

바람결에 실려 온 봄 향기에 취해 마로니에 공원의 벤치에서 졸아도 봤고 주름 많은 잘난 얼굴에는 제법 중년의 중후함도 묻어난다. 첫사랑인 엄마와 아직 잘 살고 있으며 위암 말기라는 의사의 오진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봤고 딸도 둘씩이나 낳아봤으며 든든한 사위도 이제 곧 얻는다.

3년 전에는 비행기와 배도 타 봤고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고 전국여행도 해봤으며 밤하늘 수많은 별도 헤아려 봤고 막장 드라마를 보며 눈가를 적셔도 봤다.

도둑질 빼고 다 해봤는데,
아버지의 침실 겸 식당 겸 서재에는
책이 수천 권 쌓여있는데,

왜?
왜 시가 안 써지느냐!
가슴을 쥐어뜯는 날이 점점 많아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가 그만한 일로 기죽을 사람이 아니다. 시인들과 술자리에서 아버지가 그랬다.

"당신들, 내가 시는 못 쓰지만, 시집을 천 권 이상 가지고 있으며 300여 편의 시를 외워 노래처럼 흥얼거리고 다니는, 시를 읽는 독자로서는 고급독자요. 당신들 까불면 가만 안 둬!"
"아이쿠, 왜 이러십니까? 시인인 저희보다 더 시적인 삶을 살고 계시는 분인 걸 세상이 다 아는데 고정하시고 제 술 한 잔 받으시지요 조시인님."

서로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아버지와 시인들의 대화가 대충 이렇다. 아버지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시인의 시 한 편 소개하마. 사내들이란 그저,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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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겠다, 마량에 가면

좋겠다, 마량에 가면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이재무, <저녁 6시>,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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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아버지와 딸, #시집 ,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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