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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신이시여, 이제부터 제가 이야기하려는 이 도시, 피렌체의 영광에 필적할 만한 웅변력을 제게 주소서. (중략) 어느 누구도 이 도시보다 더욱 빛나고 영광스러운 곳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피렌체는 이처럼 위대하고 장엄한 도시입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 지음, <피렌체 찬가>, 임병철 옮김, 책세상, 13쪽)

피렌체는 아름다운 도시다.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 1370-1444)는 자연환경과 건축물 뿐 아니라 정치제도와 시민정신에 이르기까지 피렌체를 완벽한 도시로 칭송했다.

후대에 와서는 1817년 피렌체를 방문한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로 인해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본명은 마리앙리 벨(Marie-Henri Beyle, 1783-1842)이며 스탕달은 필명이다.

스탕달이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의 여러 작품을 보다가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고 어지럼을 느낀다. 이후 스탕달은 그의 책 '나폴리와 피렌체 : 밀라노와 레기오까지의 여행'에 자신의 경험을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탕달의 책을 읽고 자신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후에도 종종 비슷한 증상을 느끼는 관광객들이 산타마리아 누오바 병원을 찾아왔고, 1979년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그라지엘라 마게리니(Graziella Magherini) 이런 증상의 사례를 100건 이상 조사하여 발표했다. 이로 인해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말은 더 유명해졌다.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피렌체에서 감동을 느끼고 돌아간다.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봐도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이 넘쳐난다.

피렌체시는 이런 문화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수시로 곳곳에 보수공사를 진행한다. 그래서 운이 나쁘면 꼭 가고 싶은 곳이 보수공사로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실제 두오모 박물관의 경우 몇 년 동안이나 문을 닫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몰려드는 관광객들에 몸살을 앓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까지도 피렌체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의 돔을 올라가는 벽과 쿠폴라(Cupola, 돔 꼭대기에올려진 장식)에는 온갖 낙서가 가득했다. 세계 각국의 낙서가 난무하는 가운데,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유독 한글 낙서가 눈에 많이 띄었다.

당시에 난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 유산에 낙서를 휘갈기는 일부 관광객들의 몰상식을 비판했다. 그리고 도시를 옛 모습 그대로 지키고 가꾸려는 피렌체 시민들의 노고를 칭찬했다.

빼곡한 낙서들   두오모 성당 돔으로 올라가는 길과 쿠폴라, 2014년 6월과 10월.
▲ 빼곡한 낙서들 두오모 성당 돔으로 올라가는 길과 쿠폴라, 2014년 6월과 10월.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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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피렌체 방문 때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기차 역 앞에서 트램을 타고 남쪽으로 한참 내려갔다. 동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현지인 거주 지역이었다. 마침 지역 축제 중이었는지 넓은 공터에 놀이 공원이 세워져 있었고 각종 공연과 전시회 등이 열리고 있었다. 기업의 홍부 부스들도 많았는데 그 중에는 한국 자동차 회사 중 한 곳도 있었다.

욱일기와 남부연합기, 우리는 경악했다


놀이공원   축제를 위해 큰 공터에 임시로 세워진 곳이다. 2014년 10월
▲ 놀이공원 축제를 위해 큰 공터에 임시로 세워진 곳이다. 2014년 10월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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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지를 벗어난 현지인 거주 지역 답게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특히 동양인은 우리 밖에 없는 듯했다. 놀이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흥미롭게 여기저기 구경하던 중 범퍼카 타는 곳을 발견했다. 어린이들이 즐겁게 범퍼카를 몰고 있었는데, 범퍼카마다 세계 각국의 깃발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눈길을 잡아끄는 범퍼카 한 대가 있었다. 그 범퍼카에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가 걸려 있었다. 또 다른 범퍼카에서는 미국 남북전쟁 시 사용했던 남부연합기도 보였다. 남부연합기는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여겨져 게양이 금지되다가 최근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확산되고 있는 깃발이다.

욱일기와 남부연합기를 본 우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곳에 있는 누구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이들은 범퍼카를 몰며 즐거워하고 부모들과 친구들은 손을 흔들었다.

욱일기를 단 범퍼카  뒤에는 남부연합기도 보인다. 2014년 10월
▲ 욱일기를 단 범퍼카 뒤에는 남부연합기도 보인다. 2014년 10월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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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대성당을 위시한 피렌체 중심가에는 항상 수많은 관광객이 북적인다. 피렌체시는 관광객들에게 자신들의 유적을 아름답게 보여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욱일기를 매달고 즐거워하는 이들이 있다.

욱일기의 의미를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우리 나라의 놀이 공원에서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달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과거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그렇게 찬양해 마지 않던 피렌체의 시민정신이 이런 것인가? 건축물과 예술품들을 과거 모습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애쓰다 시민정신도 과거에 머물러 버린 것인가?

물론 내가 겪은 한 가지 일을 일반화하는 것은 비약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스탕달이 피렌체의 예술 작품에서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피렌체에서 만난 욱일기는 나에게 큰 충격이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내가 아름다운 한 쪽 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깨달음이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어떤 한 도시나 사람이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 일은 피렌체를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삐딱하게 바라보자 피렌체에는 위대한 인문학자들과 천재 예술가 그리고 그들을 후원한 부자들만이 아니라, 착취당하고 억압받던 노동자와 여성들도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관련 기사 : 우아한 건물에 버려진 아이들... 우리가 몰랐던 피렌체)

2017년 말 네 번째로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피렌체 대성당 돔으로 올라가는 길에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벽과 쿠폴라에 빼곡했던 낙서가 깨끗이 지워진 것이다. 그리고 낙서를 하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었다. 낙서가 없어지고 깨끗해진 것처럼 이제 피렌체에서 욱일기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 만큼 시민정신은 성장했는가? 이 질문은 비단 피렌체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될 것이다. 나와 우리는 외적인 성장만큼 내적인 성숙도 함께 발맞추고 있는가? 피렌체의 욱일기와 같은 것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장담하지 못할 것 같다.

깨끗해진 벽   낙서를 하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2017년 12월
▲ 깨끗해진 벽 낙서를 하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2017년 12월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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