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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 명절을 보낸 뒤, 남편과 상의하여 더 이상 명절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명절에 남편의 큰집에 가면 여자들은 부엌에서 설음식을 만들고 남자들은 술을 마시며 고기를 구웠다. 전형적인 명절 풍경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한쪽 귀퉁이에 앉아 있던 내게 시아버지가 슬쩍 말했다.

"며느리가 배울 건 배워야지, 제삿상 차리는 법 같은 거..."

내가 남편의 집안 조상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며느리라는 존재로서, 그 풍경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 것이다. 그랬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당신이 하신 고생을 물려주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이 생각하시기에 시댁에서 여자가 하는 일은 언젠가 내 일이 될 것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건 여자라서 그리고 며느리라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남편과의 동등한 관계를 원했고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그 명백한 불평등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명절이 아니라도 시부모님에게 효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혼하지 않고도 결혼생활의 부당함에서 벗어나 결혼 그 자체가 두 사람이 꾸려 나가는 독립된 가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의 삶에 증명하고 싶었다.

힘들다면 '그만두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 한 장면
 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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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혼 후 남편 집안의 며느리로 살지 않겠다는 것에 대하여 지금은 남편이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지만, 그도 처음부터 흔쾌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말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해도 결혼 제도 안에서 여성의 역할은 불평등하게 기울어져 있으며, 그는 도리어 연애 때부터 나의 주체적인 모습이 좋았다고 하니까.

하지만 실제로 어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여성의 역할이나 며느리의 도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려웠다. 그 순간 갈등과 분란이 시작되리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하나만 참으면, 일 년에 두어 번만 견디면, 누구도 기분 상할 일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결혼을 한 부부는 배우자로서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다. 각자가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왜 서로에게 '싫은 건 하지 말라'고 흔쾌히 말해줄 수 없을까? 많은 남편들이 평소에는 얼마든지 배려하고 이해하는 사람이었다가, 유교 문화의 잔재처럼 남아 있는 제사나 명절, 시부모님과의 안부 전화 같은 주제에 이르면 '네가 좀 참아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된다.

불평등한 결혼 제도의 불편은 여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는 남자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지우며 원하든 원치 않든 아이보다는 야근을 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명절이 지나면 늘 집안에서의 남녀 불평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이에 대해 '남자도 힘든데 왜 여자들만 피해자인 것처럼 구냐'는 답변도 항상 달린다. 왜 결혼을 통해 우리는 참아야 하고, 견뎌야 하고, 모두가 힘들어지는 방향을 유지해 나가야 할까? 결혼생활에서 불편 혹은 불평등을 느낀다면 서로에게 의논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성숙한 과정을 밟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며느리가, 엄마가 사표를 내면 어떻게 될까 

<며느리 사표> 표지
 <며느리 사표> 표지
ⓒ 사이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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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속에서 숨 막히는 결혼 생활을 23년 동안 지속해 온 <며느리 사표>의 영주 씨는 결국 이 답답한 생활에서 탈출하려면 이혼밖에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실제 이혼은 하지 않았다. 이혼을 하지 않아도 괜찮게 된 것은 그녀가 '나'로서의 삶을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시부모님을, 남편을, 아이들을 등에 업고 살아온 나날을 뒤로하고, 이제 그들을 차례차례 내려놓으며 몸이 홀가분해졌던 것이다. 더 이상 며느리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시부모님에게 사표를 내고, 더 이상 밥을 하지 않겠다고 남편에게 선언하고, 아이들을 독립시키고 나자 그녀는 마침내 일인분의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그러는데 23년이 걸렸다).

그때부터는 오히려 시댁 모임에 나가도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며느리로서의 '서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며느리로 살아가는 것이 버거운 이유는 시댁 모임에서의 끝없는 설거지, 운전하느라 피곤하다고 방에 들어가 버린 남편 대신 들어야 하는 잔소리, 명절 증후군이 생길 정도로 하루 종일 전을 부치고 몸에 밴 기름 냄새... 따위의 것이 전부가 아니다.

당당하게 한 사람의 몫을 해내며 살던 개인이 남자의 집안에 귀속되어 그 집에서 '남을 대접해야 하는 사람',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갑작스러운 서열 하락이 혼란스러운 것에 가깝다.

여자가, 엄마가, 며느리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우리는 심지어 존중하지도 않는다. 직장 생활이 힘드니 집에 와서 소파에 몸을 눕히는 건 당연하다 여기면서, 휴일조차 없는 집안일에 대해서는 '집에서 놀면서' 뭐가 힘드냐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경제적 행위를 가정을 돌보는 집안 살림, 육아와 동등하게 보지 않고, 돈벌이가 더 힘든 일이며 따라서 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폭력적인 논리에 우리는 맞닿아 있다.

물론 맞벌이를 해도 부엌일은 여자가, 아이를 낳았으면 육아는 엄마가 해야 한다. 그렇게 선택한 적 없는 의무를 강요하는 사회임에도 여성의 희생은 아직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우리 엄마가 내게 베푸는 무한한 희생에 몸 둘 바 모르며 감사한 적 없었다.

부부관계에서 누가 돈을 버느냐보다 중요한 건 서로의 노력과 배려를 존중하느냐 하는 점이다. 누가 더 중요한 일을 하느냐를 따지는 시점에서 서열과 권력 구조가 생긴다. 전업주부가 된 여성들 중에는 원해서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경우도 많다.

어쨌든 살아가려면 돈도 필요하지만 집안을 돌보는 역할도 필요하다. 맞벌이를 하면 두 사람이 집안일을 함께 나눠야 하듯이. 한 사람씩 역할을 나누어 맡았다면 서로의 역할을 폄하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원치 않게 사회생활을 포기했다면 그 포기에 대해서 누군가는 존중하고 고맙게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결혼을 했어도 나는 선택하는 사람이다 

'영주 씨'가 이혼을 했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졌을 것이다. 며느리를 옥죄는 부당한 의무에서 벗어나 밥 하고 싶을 때 밥을 하고, 등산을 가고 싶으면 등산을 가고, 나를 위한 휴일 하루를 얻어내기 위해 남편을 상대로 길고긴 투쟁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비혼을 선택하는 데에는 각자의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결혼이 떠미는 불합리한 의무를 피하고 싶어 비혼을 결정하는 이들도 많은 것 같다. 그 결정을 존중하는 한편, 결혼한 사람들의 삶이 때로는 그렇게 답답하고 불평등하게 보인다는 점이 씁쓸하기도 하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의 동의 없이는 그 누구도 당신에게 고통을 가하지 못한다."
결혼해서 힘들었던 것은 그 누구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산 것은 어떤 이유로든 내 선택이었고 내 책임이다. 우리는 어떤 옷을 입든 자유롭게 입고 벗을 수 있어야 한다. (…) 너무 오래 입고 있으면 벗을 수 없는 피부가 되어버린다. 어떤 역할의 옷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하나의 옷일 뿐임을 안다면 한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느낀다. (231p)


결혼 후 주변에서 아무런 악의 없이 건넸던 수많은 조언들이 있었다. '이제 명절은 며느리로서 보내겠네', '시어머니 생신상은?', '남편 아침밥은?', '며느리가 제삿상 차리는 법은 배워야지'... 그들은 나의 삶이 결혼 후 뒤바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만족하고 행복할 수 없다면 결혼은 결국 나를 위한 삶이 아니게 된다. 만약 그로 인한 갈등을 겪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걸 택할 것이다. 결혼은 궁극적으로 희생과 체념이 아니라 각자의 삶과 공동의 삶이 두 사람 모두에게 불편하지 않은 모양으로 공존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며느리 사표 - 며느리 사표를 내고 기적이 찾아왔다

영주 지음, 사이행성(2018)


태그:#며느리사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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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개 고양이 집사입니다 :) sogon_about@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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