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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에서 호이안 방향의 해안도로 다낭에서 호이안 방향의 해안도로는 호텔과 리조트의 '프라이빗 비치'로 막혀 있다. '나'의 바깥에 서 보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아닐까.
▲ 다낭에서 호이안 방향의 해안도로 다낭에서 호이안 방향의 해안도로는 호텔과 리조트의 '프라이빗 비치'로 막혀 있다. '나'의 바깥에 서 보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아닐까.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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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보다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학살 피해를 입은 하미마을을 찾아가는 길. 다낭에서 호이안 방향으로 가는 해안도로는 바다를 볼 수 없게 막혀 있다. 호텔이나 리조트가 바다를 가로 막고 있고, 이들이 점유한 '프라이빗 비치'는 해당 시설의 고객에게만 허용된다. 바깥에서는 바다에 접근은 물론 조망조차도 불가하다.

내가 놀랐던 건 한번도 '프라이빗 비치' 바깥의 풍경을 상상해 본 적 없다는 점이다. 리조트를 이용해 본 적 없음에도 리조트 '안'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베트남을 상상해왔던 것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현재 조건과 위치에서 베트남을 상상했는데, 그 위치라는 것은 잠정적 '고객'이자, 여행자 그리고 한국의 국민이었다. 그 조건 안에서 조망조차 불가한 해변은 없었으며, 더욱이 '뜨는 여행지' 한켠에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가 살고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나'의 바깥에서 본 베트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시민평화법정을 위한 베트남 현지조사

오는 4월 21~22일 서울에서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아래 시민평화법정)이 열린다.

이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줄곧 부인돼 온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를 공론화하고, 진상규명을 통해 한국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시민들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법정이다. 우선 1968년 베트남 중부 꽝남성에 위치한 퐁니·퐁넛, 하미마을 학살 사건에 한정해 진실을 밝히고, 과오를 인정하며, 국가에 책임을 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법정은 전쟁범죄가 월남전 참전 병사 개인의 문제로 수렴되는 것을 경계하고, 참전 군인의 고통에 관해서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장(場)을 형성하는 것을 지향한다. 2018년 2월 8일에서 13일까지 베트남 현지 조사는 시민평화법정 준비 활동의 일환으로 법률팀 변호사들과 조사팀의 연구자들이 함께했다.

조사팀은 퐁니·퐁넛 마을과 하미마을 조로 각각 나눠 학살 생존자를 만났다. '생존자' '피해자'라는 말로 부르긴 하지만, 그들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부모, 형제, 자식을 한날한시에 앗아간 그 사건을 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삶은 흘러간다. 따라서 그들에게 다시 '그날'의 기억을 묻는 것은 겨우 지탱하고 있는 일상을 파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점을 염두하여 조사팀은 인터뷰를 최소화하려고 했으나 생존자들이 고령인 경우가 많고 언어의 장벽도 있었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미 마을의 경우, '안개가 낀 새벽 무렵, 전에도 본 적이 있던 한국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한 군데 모아놓고 총으로 쏘았다'라는 증언이 공통적으로 나왔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각자 품고 있었던 이야기들도 털어놨다. 한국군이 무섭다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받아오라고 보내는 바람에 자식을 잃었다는 할머니, 전쟁이 무서워 숨어있다가 새벽에 마을이 불타는 소리를 들었다는 할아버지, 학살 당일 오빠에게 피해있으라고 귀띔해준 한국군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아주머니 등... 그날의 기억은 생존자들의 삶을 관통해서 발화되고 있었다.

하미마을 위령비 하미마을 위령비에는 당시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생년이 적혀 있다. 1965~1968년생 아기들도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좌) 뒷면에는 비문을 덮은 연꽃 무늬 그림이 있다.(우)
▲ 하미마을 위령비 하미마을 위령비에는 당시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생년이 적혀 있다. 1965~1968년생 아기들도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좌) 뒷면에는 비문을 덮은 연꽃 무늬 그림이 있다.(우)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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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은 조사팀이 마을로 찾아가 학살 현장을 살폈다. 생존자의 안내에 따라 당시 사건이 일어난 곳, 사람들의 시체가 모여 있던 곳 등을 돌아보고, 위령비에 묵념을 했다. 하미 마을의 위령비는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지원으로 건립된 것으로, 한국-베트남 간의 과거 청산을 위한 민간단체 최초 지원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족 연락반장을 맡은 OO할아버지의 설명에 따르면, 생계가 겨우 안정되기 시작한 1990년부터 1999년까지 공동 제단 마련을 위한 기금 모금운동이 마을 자체적으로 있었다고 한다. 기금 마련이 잘 되지 않던 차에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나섰고, 2000년 5월 위령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이 위령비에는 한국과 베트남 양국 사이에 풀지 못한 이야기가 봉인돼 있다. 본래 위령비 뒷면에는 한국군 청룡부대 병사들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비문이 있었고, 이를 알게 된 한국대사관에서 항의를 했다. 이후 월남참전전우복지회 측도 비문 수정을 요구했다.

마을 주민들은 비문 수정에 반대했으나, 베트남 정부마저도 한국으로부터의 민간투자와 원조를 이유로 주민들을 설득하는 데 나서게 됐다. 결국 하미마을 주민들은 비문에 손을 대는 대신 비문을 연꽃무늬로 덮어 버렸다. 연꽃무늬 그림 안에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날의 '진실'이 봉인돼 있는 셈이다.

들을 준비를 한다는 것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곧잘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 비교하곤 한다. 요컨대 '우리가 떳떳하게 일본에 요구하려면 우리의 과오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라는 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야 만고(萬古)의 가치이니 더 말할 것이 있겠냐만, 이때의 '우리'라는 범주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정체성은 아닌지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일본군 '위안부' 운동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다음의 두 가지라 생각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1991년 김학순의 최초 증언 이후다.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피해 사실을 숨기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있었다.

김학순의 목소리는 이를 뚫고 나온 것이기에 그만큼 힘이 있었다. 그러나 최초 증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 있었다는 점이다. '위안부' 운동의 선구자인 여성학자 윤정옥은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을 찾아 나섰다. 윤정옥은 김학순이 나타나기 전에 <정신대 원혼의 발자취>(한겨레, 1990)를 기고하며 한국사회에 문제를 던졌다. 이렇게 들을 준비가 돼 있었기에 김학순의 증언이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지금이야 연구가 집적되고 공문서도 다수 발견됐지만, 운동 초창기만 해도 '사실 입증'이라는 당면 과제가 있었다. 이에 '위안부'의 증언은 '증거'로써의 기능에 초점이 맞춰지고, 따라서 동원된 방식이나 위안소 생활에 집중됐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피해자들에게 위안소에서의 생활이 단절적인 시간이 아니라 피해자의 일생을 거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중에는 말씀을 잘 하시다가도 '사위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줄이시는 경우가 있다. 이 낮아지는 목소리의 의미를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일 걸렸던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교훈을 참조한다면, 먼저 우리는 들을 준비가 돼 있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것처럼 '우리'도 먼저 사과해야 한다는 말 속에는 아직도 '우리'가 주어 자리에 놓여 있다. 이미 체화돼 있는 '우리'의 자리 바깥으로 물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볼 준비가 먼저 돼야 하지 않을까.

둘째는 '시민평화법정'이 '법적 투쟁'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으나, 법정에서 사건화되지 않는 삶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현지조사는 변호사들로 구성된 법률팀과 연구진으로 구성된 조사팀이 함께 참여했다. 법의 힘을 간과하지 않되, 거기서 잘려나가는 삶의 이야기가 보충될 때 우리는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함께 변화하는 '우리'

 1일 오전 구미역 뒷편 광장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1일 오전 구미역 뒷편 광장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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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 정부에 나를 성폭력하고, 내 인생을 유린한 죄에 대해서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베트남에 있는 한국 대사관 앞에 가서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데모를 하세요. 저도 돕겠습니다."(이용수 할머니, <25년간의 수요일> 287쪽)

'위안부' 할머니들은 끝나지 않는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 말은 사는 내내 '피해자'로써만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과의 싸움에서 매일 이겨낸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 힘으로 할머니들은 인권운동가가 되기도 하고, 화가가 되기도 한다. 인권운동가가 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베트남에 찾아갔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나는 매주 한국에 있는 일본대사관에 가서 데모를 할 테니, 당신은 베트남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가서 데모를 하라'라고 했다. 지금의 할머니를 있게 한 강인한 힘은 다시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에게 전달됐다.

2018년 4월 21일과 22일 서울에서 시민평화법정이 열린다. 말하려는 사람이 오고,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모인다. 시민평화법정은 또 하나의 '사건'이 돼 과거의 사건을 지금 - 여기로 끌어오고, 현재화된 사건은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다른 무엇으로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법정이 열리기 전날인 20일에는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 - 베트남 전쟁에 연루된 우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도 열린다. 이것이 법과 학술 언어를 통해서, 삶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된 '응답의 책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 본다. 그날의 기억과 싸우는 피해자의 고통에 응답하면서, 동시에 강인한 힘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들의 힘을 목격하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 그리하여 그 힘이 또 언젠가 새롭게 구성될 '우리'에게 전달되길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지은씨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조사팀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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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을 공부하고, 소설비평을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