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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터 아내의 책장에 새로운 책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페미니즘 혹은 여성을 다룬 책들이 많아졌습니다. 젠더의식이 상당히 부족했던 제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성으로서 탐험해야 할 새로운 세계가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아내의 책장 탐험을 통해 세계를 확장해가려는 의미에서 [아내의 책장탐험]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서평을 써볼까 합니다. - 기자말

# 대화 1.
아내 :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갈 때 무서워. 특히 뒤에서 남자가 걸어올 땐 더."
나 : "너무 예민한 거 아냐? 남자들이 다 성폭행범도 아닌데. 우리나라는 밤에 다녀도 안전하잖아."

# 대화 2.
아내 : "아까(밤 늦은 시간) 집에 오는데 어떤 취객이 치근덕거렸어. 정말 불쾌해."
나 : "그러게 왜 그렇게 늦게 다녀."

아내가 이야기하는 두렵고 불쾌한 경험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 반응에 아내는 얼마나 어이가 없고 열받았을까요.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아내에게 한없이 미안합니다.

남성 중심 사회를 살아왔던 제겐 밤늦은 거리도 꽤 안전하다고 느꼈고 길거리를 다니면서 불쾌한 경험을 할 일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성폭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리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힘으로 맞설 수 있습니다.

여성들의 경험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아내가 실제 경험한 것을 말하는데도 현실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여성이라서 너무나 흔하게 경험하게 되는 일상에서의 언어폭력, 성폭력, 물리적 폭력은 남성인 제가 절대 경험해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성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해도 쉽게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아 그럴수도 있겠네'라고 피상적으로 수긍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공감 능력이 기본적으로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겪는 남성과 여성의 경험이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성폭력은 더욱 그렇습니다. 여성들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성폭력을 공감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책이 있습니다. <악어 프로젝트: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토마 마티외 글/그림)입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폭력을 겪은 여성들의 경험담을 충실하게 그림으로 옮긴 책입니다.

 악어 프로젝트 표지
 악어 프로젝트 표지
ⓒ 푸른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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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토마 마티외는 철저하게 피해자인 여성의 입장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해자는 거의 모두 남성들이기는 하지만 사람으로 그리지 않고 악어로 표현했습니다. 작가는 독자들이 무서운 포식자인 악어보다는 사람의 모습을 한 여성들의 입장에 보다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물론 가해자인 남성을 악어로 표현해서 불쾌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성공적인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엔 책을 보면서 피해자인 여성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어 프로젝트는 남성을 악어로 그림으로써 일반적인 이야기와 차별성을 갖는다. 여성은 사람으로 그려지고 남성만 동물로 표현되었으므로, 독자는 여성에게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사실 남성은 자신을 여성과 동일시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기회가 거의 없기도 하거니와 공감 능력은 남자답지 않은 영역으로 간주하고, 소년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은 중요하며 근본적인 일이다. 만약 '악어'들이 잠깐만 멈춰 2분 동안만 자신이 성희롱 또는 성폭력을 가하려는 입장이 되어본다면 절대 악어들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이 남성의 공감 능력 향상을 방해하는 것 같다." (159쪽) (로랑 플륌)

성폭력의 원인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있다

책에는 남성의 시선을 두려워하게 되는 여성, 피해자인 상황에서도 옷차림과 처신에 대해 추궁당하는 여성, 실제로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거리에서 마주친 남성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여성 등 여성이기 때문에 겪게되는 너무나 많은 폭력적 상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양성평등 사회라 생각했던 프랑스에서조차 여성들에게 이렇게 공공연한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제가 남성이기에 놀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영장에서 여성들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 거리를 지나는 여성들에게 찝쩍대는 남성들, 버스, 지하철, 공원에서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프랑스 여성들은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언어적, 신체적 성폭력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아내나 주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피해자임에도 이상한 말들을 듣습니다.

"그때 뭘 입었는데?", "그때가 몇 시였어?", "예쁘지도 않은 게", "옷을 그 따위로 입어놓고 딴소리하네?", "이런! 그냥 농담인데! 유머도 모르니?",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될텐데", "남자들이 쳐다봐 주는데 행복해 하시는 게 맞죠"...

실제로 제가 했던 말들도 있고, 말하지는 않았어도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말들도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피해자가 들어야 할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잘못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있는 것임에도 우리는 종종 성폭력의 원인을 여성에게서 찾곤 합니다.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성폭력의 책임은 여성이 아니라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있다"는 사실을요.

성폭력 대응 전략과 '악어'들에게 하는 조언

책에는 일상에 만연한 성폭력 사례들 뿐만 아니라 성폭력 상황 대응 전략, 사건 이후의 행동, 목격자의 대응법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실제 성폭력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연습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성들의 경우 성폭력인지 알지만 실제로는 여러 이유로 아무런 대응을 못하고 넘어간 후 나중에 분통을 터트리는 때가 종종 있으므로 책의 안내에 따라 상황을 그려보며 연습하면 좋을 듯 합니다.

"사소한 성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경험이 더 큰 위험이 닥쳤을 때 잘 극복할 수 있는 거름이 될 수 있지요."(138쪽)

"가해자와 말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성폭력을 중단시키는 거예요.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한다면 가해자는 당연히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할 것입니다. 얼마 안 가서 대화는 결론없는 말싸움이 됩니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제 생각에는 단호한 거절이 최고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잘 안 통할 때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효과적이에요."(140쪽)

남성 독자로서 여성의 입장이 되어 공감 훈련을 하는 것 이외에 가장 유용한 부분은 '악어들에게 하는 조언'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이 책을 보고 "다들 그런 건 아니야. 어쨌든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 남성 독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이들에게 여자 친구들에게 이 책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권합니다. 이를테면 지하철을 자주 타는 여자친구들에게요. 저는 아래 조언들을 귀담아 들으려고 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면서 바로 연애, 섹스 상대로 보지 마세요."
"상대방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자기 마음 대로 접근할 권리는 없습니다."
"대답없음이나 마지못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더 강하게 표현해주세요가 아닙니다."
"'아니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미친년, 네가 예쁜 줄 알아? 돼지 같은 게 등의 말은 하지 마시길."

이 책이 불편한 남성들에게

물론 모든 남성을 성적 약탈자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이것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이 모든 남성이 실제로 성적 포식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성의 관점에서는 남성이 좋은 남자와 공격자, 이렇게 두 가지 범주로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남성에 대한 이런 묘사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반영일 뿐이다.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모든 남성을 강력한 성적 포식자로 간주하는 게 사실이다(그래서 그들은 여성에게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짧은 치마를 입지 말라고 한다). 그리하여 남성이 성적 포식자로서 행동하도록 그냥 둔다. 그게 정상이니까. 그 결과 남자아이들도 그런 방식으로 교육을 받는다. 악어 프로젝트의 주제는 남성이 악어의 모습으로 태어났다가 아니라 악어가 되어간다는 것이다."(161쪽, 로랑 플륌)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면 좋겠습니다. 특히 모든 남성들의 손에 한권씩 들려 있으면 좋겠습니다. 남성이 악어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불편한 느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엔 불편했습니다. 여성의 입장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희생자들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렇지 않은데'라며 변명하는 것은 뭔가 빗나간 반응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성폭력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제 시선이 책에 그려진 어떤 악어의 눈빛과는 매우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래 로랑 플륌의 말에 '아닌데?'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악어'가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폭력에 대한 일화를 접할 때 남성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들이 조금은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강간, 폭력 그리고 아주 심각한 것을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무언가를 느끼기는커녕 자신들의 에고를 보호하느라 바쁘다. 그 심리는 무엇일까? 그런 일이 자신들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혹은 단순히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하려는 걸까? 하지만 바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악어의 모습인 것이다. 말하자면 타인의 필수적인 요구(특히 여성의 육체적 안전)보다도 남성이 자신의 요구와 욕망(예를 들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을 독단적으로 상대방에게 들이미는 행동은 악어의 그것이다."(161쪽, 로랑 플륌)

마지막으로 작가가 이 책을 낸 목적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남성은 자신이 잘 몰랐던 남성의 일상적 성폭력과 피해자 여성의 심리를 느껴보고, 여성은 자신도 모르게 덮어 놓았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화해와 공존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 책의 진정한 목표는 대립이 아닌 통합이다. 여성과 남성 독자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를 인지하고 진정 남성과 여성이 공존할 방법을 제안하는 책이다."(책소개)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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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지치지 말기를. 제발 그러하기를.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무의미 또한 끝이 있을 터이니. -마르틴 발저, 호수와 바다 이야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출판 담당 기자로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ohmybook201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