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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기슭에 피어 있는 봄의 전령사 복수초. 눈과 얼음 사이를 뚫고 꽃이 핀다 하여 ‘얼음새 꽃’이라고도 한다
 무등산 기슭에 피어 있는 봄의 전령사 복수초. 눈과 얼음 사이를 뚫고 꽃이 핀다 하여 ‘얼음새 꽃’이라고도 한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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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알리는 첫 번째 절기인 입춘(立春)과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雨水)가 지나자 얼굴에 와 닿는 바람결이 확 달라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뾰족했던 바람 끝이 한결 둥글어졌다. 여기저기서 봄소식이 들려온다. 방송에서는 무등산에 북방산개구리가 산란했고 봄의 전령사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귀밑 머리를 간지럽히고, 따스한 햇볕은 머리를 애무하며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 시킨다. 풍문으로만 가끔씩 전해 듣던 첫사랑을 만나는 설렘으로 길을 나선다. '광주의 어머니' 무등산 옛길 따라 봄 마중을 나간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흥얼거리는 콧노래와 함께 봄은 이미 와있다.

무등산 옛길 1구간 입구 산수동. 좁은 골목길의 벽화가 정겹다
 무등산 옛길 1구간 입구 산수동. 좁은 골목길의 벽화가 정겹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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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무등산 옛길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길이 있다. 그 길은 삶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이야기가 된다. 무등산에도 수많은 길들이 있다. 무등산 옛길은 무등산 아래 광주· 화순· 담양 사람들이 신작로 길이 생기기 전에 광주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질박하게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왕래하고 소통하던 길이다.

광주의 도심에서 무등산 정상까지 옛 조상들이 걸었던 길이다. 무등산이 간직하고 있는 수천 년의 역사를 녹여내고 있다. 광주의 '정사와 야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이다.

무등산 옛길은 3개의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광주의 도심 산수동 오거리에서 충장사~원효사에 이르는 7.75km가 1구간이다. 2구간은 원효사에서 제철유적지~무등산 정상 서석대까지 4.12km 구간이다. 총연장 11.87km다.

이 거리는 공교롭게도 무등산 정상의 높이 1,187m와 숫자가 겹친다. 3구간은 장원봉~덕봉으로 이어지는 나무꾼 길과 풍암정~호수 생태공원~환벽당(가사문화권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길로 나누어져 있다. 총연장 11.3km다.

무등산 옛길에는 황소걸음 길, 소금장수 길, 연인의 길, 김삿갓 길, 장 보러 가는 길, 산장 가는 길 등 발자국수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다. 봄처녀 오시는 길을 따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견훤이 말타기 연습을 했던 무진고성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4호
 견훤이 말타기 연습을 했던 무진고성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4호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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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이 말 달리던 곳, '무진고성지'

옛길 1구간은 광주의 도심 산수동에서 시작된다. 광주의 명소인 무등산의 출입 관문으로 무등산 장원봉의 산기슭에 위치해 '산자수려한 동네'라 하여 '산수동'이라 하였다. 옛길로 들어서는 좁은 골목 담벼락에 그려진 아기자기한 벽화들이 정겹다. 동네를 빠져나와 싸목싸목 오감 열고 '황소 걸음길'을 지나 잣고개에 도착한다.

잣고개는 땔감을 구하러 지게를 진 나무꾼과 등짐을 진 상인, 봇짐을 인 아낙네들이 넘던 고개이다. 잣나무가 많이 있어서 잣고개라고 불렀다 한다. '성을 넘어가는 고개'라는 의미로 '잣고개'라는 얘기도 있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잣'은 성(城)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고, 바로 이곳에 '무진고성지'가 있기 때문이다.

무진고성은 통일 신라 시기의 유적이다. 무등산의 지맥, 장원봉을 중심으로 상태봉과 제4수원지 안쪽 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장타원형의 산성이다. 성의 바깥쪽은 돌로 쌓았고 안쪽은 돌과 흙으로 채웠다. 광주의 옛 이름 무진주(武珍州)를 따라 무진고성이라 했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견훤이 말타기 연습을 했던 곳'이라는 말이 구전되고 있다.

한 때 이곳을 호령했지만 '왕건(王建)'에게 패퇴한 견훤의 말발굽 소리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 않았던가. 성의 일부가 복원되어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개울가 버들강아지는 햐얀 솜털을 보송보송 피워내고 있다
 개울가 버들강아지는 햐얀 솜털을 보송보송 피워내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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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도 쉬어가는 '청풍쉼터'

무진고성을 휘돌아 '소금장수 길'로 접어든다. 영산강 따라 광주로 들어온 소금을 지고 무등산 골골마다 팔러 다녔던 소금장수의 땀내 나는 삶이 녹아 있는 길이다. 소금장수 묘비와 북돌이 놓여 있다. 북돌을 두드리며 세 번 절을 하고 가면 가파른 산길도  잘 갈 수 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소금장수는 물론 나무꾼과 보따리를 인 아낙네 나그네까지 힘겨운 산행길에 목을 축였던 샘터를 지나고 실개천을 건너 숲길로 접어든다. 개울가 버들강아지는 벌써 솜털이 보송보송 탐스럽게 돋아나고 있다. 이른 봄바람에 서걱거리는 신우대의 초록이 싱그럽다. 발아래 신작로에서는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다. '길 위의 길'을 따라 제4수원지 청암교를 건너 청풍 쉼터를 만난다.

제4수원지는 1960년대 축조된 상수원으로 한때 광주시민들의 젖줄이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던 시절 조선대학교 교지 편집장이었던 이철규 열사가 경찰에 쫓기다 의문사 한 곳이다. 또 이곳에는 청풍 쉼터가 있다. 1970~80년대 초·중·고등학교 소풍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넓은 잔디밭과 원두막이 설치돼 지금도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김삿갓도 쉬어가는 청풍쉼터
 김삿갓도 쉬어가는 청풍쉼터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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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인묵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김삿갓, 김병연도 화순 적벽으로 가던 중 시 한수를 남긴다. 그의 시비가 청풍쉼터에 세워져 있다.

"무등산이 높다 하되 소나무 아래 있고/ 적벽강이 깊다하되 모래 위에 흐른다"

말년에 물 맑고 산수 좋은 무등산 자락에 머물며 많은 시를 남긴 '방랑시인 김삿갓'은 1863년 화순의 동복 물염적벽에서 생애를 마쳤다.

싱그런 숲길은 연하여 이어진다. 옛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주막터가 나온다. 인심 좋은 주모가 탁배기와 국밥을 뜸뿍 담아주던 주막은 사라지고 민가가 자리하고 있다.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나그네는 무등산 막걸리 한 사발과 상큼한 봄 미나리 간재미 무침으로 목을 축인다.

내가 전두환의 조상이라고?

허기도 달랬겠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뭔가 끌리는 곳이 있다. 광주 사람들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다. 옛길에서 잠시 빠져나와야 한다. 거기에 '충민사와 충장사'가 있기 때문이다.

'충민사'는 조선시대의 무관 전상의(1575~1627)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전상의 장군은 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청나라의 대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광주 남구 구동에서 태어난 전상의 장군은 고경명· 김덕령 장군과 함께 '광주 3 충신' 중 한 명이다. 외교 수완도 탁월했다. 일본에 회답사로 파견돼 정유재란 당시 끌려간 150여 명의 동포들을 무사히 귀국시킨 업적을 남겼다.

충민사, 전상의 장군의 사당.
 충민사, 전상의 장군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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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 장군을 배향하는 사우 충장사. 광주광역시에 있는 '충장로'는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김덕령 장군을 배향하는 사우 충장사. 광주광역시에 있는 '충장로'는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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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는 '광주의 피'를 먹고 탄생한 전두환 정권 때 지어진 사당이다. 시민들의 오해가 있었다. 전상의 장군이 '전두환의 조상'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 때 광주사람들이 외면했다. 나중에 본관이 천안과 완산으로 확인되면서 전상의 장군은 전두환의 조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시민들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전두환은 "나는 광주사태 치유를 위해 내놓을 씻김굿의 제물"이라는 망언을 계속하고 있다.

'충장사'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1567∼1596) 장군의 사우(祠宇)다. 임진왜란 때 의병 5000여 명을 모아 권율 장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공을 세우고도 반란군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고 모진 고문을 당하다 꽃다운 나이 29세에 옥사했다. 충장사 인근에는 장군에 대한 유적과 이야기가 차고도 넘친다. 기회가 된다면 옛길 2구간 '의병의 길'에서 따로 소개하기로 하겠다.

제행무상의 세월을 견뎌내고 있는 '원효사'

충장사를 빠져나와 '광주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인 원효사로 향한다. 옛길은 신작로를 건너 다시 숲으로 이어진다. '산장 가는 길'이다. 선비와 의병, 어사가 호연지기를 좇아 무등산 정상으로 향하던 길이다.

숲 속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무등산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속세에서 선계'로 들어선 듯 세상과 단절을 느끼게 한다. 원효사가 멀리 있지 않음 이리라. 산모퉁이 돌아 넓디넓은 돌무더기 밭이 펼쳐진다. '원효 너덜겅'이다. 바윗돌마저도 '무등등(無等等)한 세상'을 꿈꾸는 것일까. 거대한 수직의 주상절리가 수평으로 풍화되어 그만그만한 모습으로 서로 평등하게 얽혀 있다.

광주사람들의 마음의 고향 같은 천년 고찰 원효사
 광주사람들의 마음의 고향 같은 천년 고찰 원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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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바위와 관음암을 지나 천년 고찰 원효사에 이른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고승 원효(元曉)가 이곳에 머물며 암자를 개축한 후부터 원효사라 불렀다. 광주사람들이 마음 헛헛할 때 찾는 고향 같은 곳이다.

원효사 절집은 이미 봄으로 가득하다. 명부전 뒤편 생강나무 꽃눈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고, 대웅전 앞 홍매화도 금방 터질 듯 봄바람에 꽃망울을 낭창 거리며 법당 안 부처님을 유혹하고 있다.

겨울을 이겨낸 홍매화가 꽃망울을 가득 머금고 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겨울을 이겨낸 홍매화가 꽃망울을 가득 머금고 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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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무등산 옛길1구간, #무진고성지, #청풍쉼터, #원효사, #길위에 길이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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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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