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책을 읽다가 이해 못할 말이 나오는 누구 탓을 해야 할까? 대개 독자들은 무지한 자기 탓을 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게 과연 독자 탓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책은 독자가 있어야 책이지 독자가 없다면 종이 뭉텅이일 뿐이다. 그러니 저자는 독자들이 알기 쉽게 풀어쓸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 책이 교과서라면 어떨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한글을 배우지 않은 아이들이 볼 교과서라면 어떨까?

<야! 신나는 1학년> 강원도교육연구원에서 펴낸 초등학교 입학 초기 적응 교육 교재. 초등학교 입학한 아이들은 이 책으로 3월 한 달 정도 공부한다.
▲ <야! 신나는 1학년> 강원도교육연구원에서 펴낸 초등학교 입학 초기 적응 교육 교재. 초등학교 입학한 아이들은 이 책으로 3월 한 달 정도 공부한다.
ⓒ 강원도교육연구원

관련사진보기


1학년 교실에서 쓰는 말

이러한 눈으로 <야! 신나는 1학년>을 펼쳐 보았다. 이 책은 강원도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와 처음 보는 교과서다. 앞표지 왼쪽 머리에 '초등학교 입학 초기 적응 교육 교재'라고 적어놓았다. 말하자면  처음 학교에 온 아이들이 학교에서 잘 지내게 돕고 한편으로는 출발점에서 차이를 줄이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교사용 지도서에는 1학년 아이의 일반 발달 특성을 다음과 같이 들어놓았다.

이 시기의 어린이들은 (……) 교사의 표정과 말 한마디에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12쪽)


이어 지적 특성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글자와 그 의미에 대하여 차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 몇 개의 낱말을 합쳐 숙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기나 논리적 사고력은 미약한 상태이다.(13쪽)


말하자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는 교사가 어떤 말을 쓰느냐에 매우 민감하고 글자에 관심이 높아지는 때라는 말 아닌가. 자연스런 귀결로 교과서에 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럽고 예민해야 한다.

쉬운 말을 두고 어려운 말부터 가르쳐서야

그런데 교과서에 쓴 말을 보면 어려운 글말이 생각보다 많다. 거기에 다른 나라 글말투를 그대로 따라 간 데도 자주 나온다. 이에 책장을 넘기면서 쉬운 말로 고쳤으면 좋았을 데부터 가리켜본다.

교가, 교표, 교목, 교화, 개교기념일(9쪽)


과연 아이들에게 이런 말부터 어떻게 알려주어야 할까 싶다. 모르긴 해도 1학년 선생님이라면 말 그대로 알려주기보다 '우리 학교 노래, 우리 학교 상징(표시), 우리 학교 나무, 우리 학교 꽃, 우리 학교가 처음 문을 연 날(생일)'처럼 쉬운 말로 바꿔 말해줄 것이다. 

다음은 '사용, 이용, 활용' 따위 말이다. 우리 말에 아예 없다면 모를까 '쓴다, 부린다, ∼으로(써)' 따위 말을 버젓이 두고도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사실 '사용, 이용, 활용'은 어슷해보여도 쓰는 자리나 결이 조금씩 다르다. '사용'은 쓰는 사람 뜻대로 쓰거나 부려쓴다는 의미가 강하고, '활용'은 사람이나 물건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서 쓴다는 의미가 강하다. 학교에서 이렇게 배운 아이들은 '쓴다, 부린다, ~으로(써)' 따위 말을 쓸 줄 모를 것이다. 

▶ 어떻게 사용할까요? /교실의 물건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아봅시다.(14쪽)
  →어떻게 쓸까요? /교실에 있는 물건을 어떻게 쓰는지 알아봅시다.
▶ 책상과 의자를 바르게 사용해 봅시다.(18쪽)
 →책상과 걸상을 바르게 봅시다.
( '의자'가 잘못 쓴 말은 아니지만 '책상'과 짝을 이룰 때는 '걸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말 사전에는 '걸상'을 걸터앉는 기구를 이르는 말로, '의자'는 '사람이 걸터앉는 데 쓰는 기구'로 풀어놓았다.)
▶ 화장실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봅시다.(20쪽)
→화장실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봅시다.
▶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해 봅시다.(24쪽)
→곱고 바르게 말해 봅시다.
▶ 학용품 바르게 사용하기(31쪽)
→학용품 바르게 쓰기
▶ 칠교를 이용하여 재미있는 모양을 만들어 봅시다.(82쪽)
칠교로 재미있는 모양을 만들어 봅시다.
▶ 놀이터의 올바른 이용방법을 알아봅시다.(84쪽)
→놀이터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봅시다.
▶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멋진 왕관을 만들어 봅시다.(88쪽)
다양한 재료로 왕관을 멋지게 만들어 봅시다.
▶ ○○쪽의 붙임자료를 활용하세요.
→○○쪽에 있는 붙임자료를 쓰세요.
거듭 나오는 '사용/이용/활용한다'를 '쓴다'는 말로 바꿔서 읽어 보라. 글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살아 있는 말로 느껴질 것이다. 두 가지 말 모두 누구나 다 잘 알지만 우리 말을 살려 쓰면 좋겠다.

이 교과서에서 또 자주 만나는 말이 '생활한다'는 말이다. 이 말도 '지낸다, 산다, 보낸다, 한다' 따위 말로 해도 될 말인데 하나같이 '생활한다'로 써놓았다. 이를테면 '바르게 생활해요'(48쪽), '청결하게 생활하기'(49쪽), '즐겁게 생활하기'(71쪽)는 '바르게 살아요', '깨끗하게 지내요(해요)', '즐겁게 지내기'로 썼더라면 어땠을까. 뭐, 교과 이름이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 바른 생활'이니 더 할 말은 없다. 다음에 든 말들도 뒤에 든 말처럼 바꾸어 쓰면 한결 깨끗하고 쉽겠다.

▶ 등하굣길 안전하게 다니기(49쪽)
→ 안전하게 학교 오가기
▶ 단정한 옷차림(64쪽)/ 단정한 옷차림을 알아봅시다.(64쪽)
올바른 옷차림/ 바른 옷차림을 알아봅시다.
▶ 바른 식사법을 알고 음식을 골고루 먹어봅시다.(16쪽)
밥 먹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봅시다.


처음 글을 읽는 아이에게는 되도록 입말에 가까운 글을 주어야 한다. '등교'나 '하교' 같은 말이 과연 1학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말인가. '학교 오가는 길'이나 '학교에 간다/온다', '집에 간다'고 하면 안될까? '단정하다'는 말도 '바르다, 깨끗하다, 깔끔하다'로 써야 할 것이다.

'식사법'이라는 말도 생각해 본다. '밥 먹는다, 점심 먹는다'는 말과 '식사한다'는 말은 아주 다른가. 우리 말에서 한자말로 쓰면 더 무게 있게 들리고 먹물 티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하지만 바르게 앉아 고마운 마음으로 골고루 밥 먹는 것보다 '식사'라는 말을 가르치는 게 더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면 마땅히 쉬운 말로 해야 한다.

우리 말 질서에 맞게 써야

이제까지는 낱말 차원에서 살펴본 것이라면 지금부터는 다듬었으면 하는 문장을 살펴보겠다. 교과서에서 쓰는 말은 아이들 말은 두말할 것도 없고 교사의 말까지 바꾼다. 그렇기에 교과서 문장은 우리 말뿐만 아니라 말법에도 더욱 세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써서 우리 말을 저버리도록 하는 교육에 앞장설 뿐이다. 불행하게도 이 책에서도 다른 나라 말법을 생각없이 따라간 데가 많다.

▶ 우리 학교에 대해 알아봅시다.(6쪽)
우리 학교를 알아봅시다.
우리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알아봅시다.
▶ 친구에 대해 알아보고 소개해 봅시다.(72쪽)
친구를 알아보고 소개해 봅시다.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소개해 봅시다.
'∼에 대해'라는 말을 아주 안 쓸 수는 없지만 법령에서고 책에서고 방송에서고 아무 생각없이 상투로 쓸 때가 많다. 사실 이 말은 영어와 일본말을 뒤치던 버릇이다. 일본어로 쓴 글에 나온 '∼に 対にし'를 생각없이 베껴 쓰거나 영어 'for, about, concerning, as to, as for, in regard to(of), in respet of……' 따위를 하나같이 '~에 대해, ~에 대해서는, ~에 관해, ~에 관해서는'처럼 배워온 탓이 크다. '∼에 대해'는 '∼을/를'로 바꾸어 쓰는 게 한결 자연스럽고 깔끔하다. 때에 따라선 아예 빼버려도 될 말이다.
▶ 나는 책장 속에 꽂혀 있어요.(15쪽)
→ 나는 책장에 꽂혀 있어요.
→ 나는 책장에 있어요.
우리 말은 알만한 말이거나 안 해도 될 말이면 안 한다. 너나없이 알 만한 상황이라면 빼고 말하는 게 우리 말 성질이다. 앞 문장에서  '속'을 빼버리면 뜻이 흐리멍덩해질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속'을 뺐을 때 거치적거리는 게 없어서 더 깔끔해진다. 가령, '새가 나무 위에 앉았다'와 '새가 나무에 앉았다'와 견주어 보시라. 영어에서는  장소를 나타낼 때 'in, at, on, by, near, over, below, above' 같은 전치사를 꼭 써야 한다. 그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말로는 '새가 나무에 앉았다'고만 해도 '새가 나무 위에 앉았다'고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잘못 쓴 토씨 '~으로부터'는 영어를 뒤치던 버릇이다.
▲ 잘못 쓴 토씨 '~으로부터'는 영어를 뒤치던 버릇이다.
ⓒ 이무완

관련사진보기


다음도 밑금 그은 데가 어색하기 그지 없다.

술래로부터 도망쳐.(57쪽)
술래한테서 도망쳐./ 술래에게서 달아나.


'∼(으)로부터'는 영어 전치사 'from'을 뒤치던 버릇으로 입말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입말 상황이라면 '∼한테서'나 '∼에게서'를 쓴다. 그래야 말맛이 자연스럽다. 우리 말에서 토씨는 낱말과 낱말의 관계를 나타내고 질서를 세우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교과서가 앞장서서 멀쩡히 살아있는 토씨를 두고 죽은 말로 쓰니까 글이 죽고 말이 죽는다.

<야! 신나는 1학년> 교과서 한 부분 <야! 신나는 1학년> 15쪽 모습이다. 우스갯소리로 흔히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는 유치원 아이와 1학년 아이, 2학년 아이가 함께 앉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입학 초기 아이들의 한글 수준이 다르다는 말을 드러낸 말이다. 그런데 90쪽짜리 교과서에서 15쪽이면 매우 앞쪽인데 이렇게 문장으로 쓴 설명을 보인다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야! 신나는 1학년> 교과서 한 부분 <야! 신나는 1학년> 15쪽 모습이다. 우스갯소리로 흔히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는 유치원 아이와 1학년 아이, 2학년 아이가 함께 앉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입학 초기 아이들의 한글 수준이 다르다는 말을 드러낸 말이다. 그런데 90쪽짜리 교과서에서 15쪽이면 매우 앞쪽인데 이렇게 문장으로 쓴 설명을 보인다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이무완

관련사진보기


어떤 말로 가르치냐는 고민이 중요하다!

이쯤에서 어떤 이는 교과서는 '정전'이 아니다, '다만' 많은 예시 자료 가운데 하나이고, 마땅히 실천은 교과서와 다른데 시시콜콜 따지냐고 눈 흘길지 모르겠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교과서는 우리 말을 가르치는 자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학교에서 배운 말은 아이 입에 붙어 평생을 간다. 선생 처지에서도 교과서에서 쓰는 말은 그대로 공부 시간에 쓸 수밖에 없다. 가르치고 배우는 '무엇'이 중요하지 그깟 '말'이 무어 그리 중요하냐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수업 연구란 아침마다 교실에 와서 앉은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 아닌가. 이때 '어떻게'는 '어떤 말로' 풀어놓을 것인가가 중심이 된다. 말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아직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알록달록한 그림과 사진, 붙임자료를 실었다고 해서 훌륭한 교과서, 좋은 교과서가 되는 게 아니다. 교과서 글부터 깨끗하고 부드러운 말을 써야 한다. 더욱이 강원도교육청은 어느 시·도 교육청보다 먼저 한글은 학교에서 책임지고 가르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보면 공연히 헤집고 따지기보다는 보듬고 손뼉 쳐 힘을 북돋워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공교육에서 처음 보는 교과서가 한글교육책임제에 걸맞는지, 우리 말 교육을 제대로 하도록 만들어졌는지도 자세하게 톺아보아야 할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