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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오마이뉴스>는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박근혜-최순실게이트 관련 항소심 판결문을 공개했다. 본문만 A4규격 144쪽짜리이고 별지까지 포함하면 166쪽에 달한다.
 <오마이뉴스>는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박근혜-최순실게이트 관련 항소심 판결문을 공개했다. 본문만 A4규격 144쪽짜리이고 별지까지 포함하면 166쪽에 달한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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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마이뉴스> 법조팀장 최지용입니다.

이미 보도가 됐다시피 <오마이뉴스>는 지난 21일 법조기자단으로부터 '출입정지 1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이달 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문 전문을 공개했기 때문입니다. ([전문공개] '공범자' 이재용 vs '피해자' 이재용) 법조기자단에 소속된 일원으로서 징계 자체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펜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한 문제입니다.

헌법 109조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

대한민국 헌법 109조에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안녕질서를 방해할 경우 법원의 결정으로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이 있지만, 그것은 '심리'에만 해당합니다. 즉, 판결은 모두 공개하는 것이 헌법의 취지입니다.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 법원 예규는 그 헌법의 취지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헌법 가치를 완전히 구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가 그렇겠죠. 때문에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한 사회가 헌법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가일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판결문은 일부 공개되고 있습니다. 대법원 홈페이지 '종합법률정보'에 가면 대법원 판례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또 각급 법원의 사이트에서는 해당 법원의 판결을 전자우편 등의 방법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자, 이 정도면 '판결은 공개한다'는 헌법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걸까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여당 간사인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판결문 공개 법안 관련 토론회에서 "종합법률정보시스템에서 검색할 수 있는 대법원 판결은 3.2%, 각급 법원 판결은 0.003%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국민이 확인할 수 있는 판결문은 10만 건 중 3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항소심까지의 판결문을 보기 위해서는 사건번호를 알아야 하고,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면 사건번호와 당사자 이름까지 알아야 판결문을 볼 수 있습니다. 키워드 검색으로는 판결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기자들이야 취재를 통해 사건번호나 당사자 이름을 알아내야 한다고 치고, 일반 시민들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0.003%

서울고등법원에서 제공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문 사본. 이 부회장을 비롯해 박근혜 전 대통령, 안종범 전 정무조정수석 등의 이름이 모두 영문 이니셜로 비실명 처리돼 있다.
 서울고등법원에서 제공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문 사본. 이 부회장을 비롯해 박근혜 전 대통령, 안종범 전 정무조정수석 등의 이름이 모두 영문 이니셜로 비실명 처리돼 있다.
ⓒ 서울고등법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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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뿐이 아닙니다. 설령 공개되는 판결문이라고 해도 1000원을 법원에 내야 합니다.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비실명화 작업'을 하는 비용을 내는 것입니다. 이미 누군가에게 제공돼 비실명화 작업이 완료돼 있는 판결문 사본을 신청할 때도 1000원이 들어갑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2일 서울고등법원에 이재용 부회장의 판결문 사본 열람을 신청했습니다. 이틀 뒤에 비실명화 된 판결문을 전자우편으로 받았습니다. 이후 21일에 한차례 더 신청했습니다. 마찬가지로 1000원을 냈고, 이틀 후에 받았습니다.

'비실명화'도 문제입니다. 큰 사건의 경우 많은 인물 또는 법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법원은 이를 모두 영문이니셜로 처리합니다. 이재용 부회장 판결문에 경우 A, B, C, D뿐 아니라 AU, AE, EV... 같은 두 개 이상의 알파벳 조합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문장으로 된 판결문인데, 모든 이름과 지칭이 다 알파벳으로 돼 있으니 읽다가 길을 잃기 일쑤입니다. 수많은 국민이 '이재용'과 '삼성전자'를 알고 있는데, 법원 판결문만 이를 가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법원은 판결문 공개를 너무 쉽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재용 부회장 1심 판결문의 경우 이 부회장 변호인 측 요구로 열람이 제한돼 있습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 항소심과 최근 있었던 최순실,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1심 판결문 역시 열람이 제한돼 있습니다. 김 전 비서실장은 증인으로 출석했던 강아무개씨의 신청, 최순실과 안 전 수석의 경우는 함께 재판을 받은 신동빈 롯데 회장 측의 신청으로 열람이 안되고 있습니다.(관련기사 : 법원의 '최순실 판결문' 비공개… 이해 안 간다)

종합하면, 현재 한국 법원은 극히 제한된 판결문을, 아주 어려운 방법으로 공개하고 있으며, 실제 공개된 판결문을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돈도 내야 합니다. 금태섭 의원은 위에서 밝힌 토론회에서 "현재 사형수 61명의 판결문을 입수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아직도 다 입수하지 못했다"라며 "국회의원도 판결문을 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토론회에 참석한 법학전문대학원의 교수나 변호사들도 같은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법률 분야 전문직 종사자들도 접근하기 어려운데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요. 자, 어떻습니까. 헌법 109조 '판결 공개' 가치를 법원은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걸까요?

특혜와 권리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구속중이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구속중이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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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기자단이 이번에 <오마이뉴스>에 중징계 결정을 내리게 된 주요 배경에는 향후 법원으로부터 판결문을 제공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판결문 공개를 기자들 스스로 헌법적 가치 또는 국민의 알권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판결문을 공개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언론을 통해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오랫동안 법원에 판결문을 요구해왔고, 법원은 제공해왔습니다. 법원이 기자단에게 판결문 사본을 제공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 등 여러 이유 때문에 국민들에게 판결문 접근이 제한된 상황에서 국민의 알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취지입니다. 법원은 기자들에게 주는 특혜로, 기자들은 법원으로부터 받는 특혜로 인식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법원과 언론은 판결문을 어떻게 하면 국민들에게 더 잘 공개할 수 있을까를 놓고 같이 고민하고, 때론 싸우고, 때론 협력해야 합니다. 국회에는 개정안이 제출돼 있고, 대한변호사협회는 지속적으로 판결문 공개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오마이뉴스> 징계 사건이 그 기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토론회 발언으로 긴 글을 마칩니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법관의 직업적 자긍심은 그 판결문이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을 때 객관적인 의미를 가진다."



태그:#이재용, #판결문, #법조기자단, #법원, #정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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