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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페이지가 점점 줄어드는 게 싫은 책을 만난다는 건 행운이다. 어서 독파하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줘야 독서 좀 한다는 소릴 듣겠지만, 왠지 계속 부여잡고 있게 만든 책, 사회학자 노명우의 <인생극장>을 이제야 다 읽었다. 책과 함께 하며 내가 받은 것들을 음미하고 싶어 이 서평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나와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고 있는 분이다. 읽는 내내 오랜만에 소식이 닿은 동기에게 부모님이 하루 차이로 잇달아 돌아가셔서 결국 한 장례식장에서 같이 모시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아 가게 된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이야기 듣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의 탄생 과정도 흥미롭다. 2015년에 저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불과 1년 2개월 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신다. 1924년생 아버지는 치매가 있었다. 가끔 버럭 하시는 대사들이 있었는데 3개 국어였고 공통점은 욕이었다. 우리 말 욕과 '마더 퍽 유' '바카야로'. 사회학자 아들은 궁금해진다. 아버지가 살아오신 삶은 도대체 어떠했기에 자신의 인생을 단 세 마디, 3개 국어로 그것도 욕으로 정리하실까.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보고 싶어진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가 태어나신 충남 공주군 반포면 송곡리, 청년 시절에 가서 사진을 배운 곳 만주, 징용된 일본군으로서 해방을 맞이했던 나고야 등을 다녔고 가장 핵심 장소인 저자가 태어나고 청소년기를 보냈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의 이른바 '삼거리 마을'을 샅샅이 훑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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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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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여기까지의 구성이었다면 이 책은 아마 범작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살아온 시대를 풍성하면서도 근거가 있는 장치가 있어야 했다. 대중영화라는 매개체로 각 시대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문제가 생긴다. 원래는 아버지의 삶만 추적하는 게 콘셉트였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거다. 저자는 한동안 집필을 할 수가 없었고 그 과정에서 시나리오가 대폭 변경된다. 어머니의 삶도 같이 다루기로. 주연 배우가 '원 톱'에서 '투 톱'으로 캐스팅이 바뀐 거다.

나와 관련 없는 사람의 삶, 그것도 그의 삶이 아닌 그의 부모님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재미있을까. 유명인도 아닌데? 걱정하지 마시라. 재미있다. 흥미진진하다. 저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걸어오신 삶의 흐름은 개인사로서도 재미있고, 각 시기마다 소개하는 당대의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영화를 일일이 찾아보고 싶게 만든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화 <수업료>(최인규·방한준 감독/1940), 일본의 군인이 되는 걸 자랑스러워하자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는 <지원병>(안석영 감독/1941) 등이 그렇고, 참혹한 한국전쟁을 지나 이른바 한국영화의 전성시대라고 하는 1950, 60년대 영화들을 맛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영화, 1958년 작 <지옥화>(신상옥 감독/1958)다.

"요즘 어디 믿음직한 놈팽이가 있는 줄 아니?"
"그래도 언제까지나 코 큰 사람만 상대하고 살겠수? 동족끼리 살아야지."
"정신들 차려서 지금 돈이나 벌 생각들 해라. 미국 놈이나 한국 놈이나 사내는 다 같애. 그저 돈이 제일이다, 얘. 돈이 제일이야."
"그럼 돈 벌어서 뭘 해요. 미국 사람하고도 살 수 없고 우리 동족끼리도 살 수 없으니 우리는 무슨 족속이우?"
"무슨 족속? 양부인이란 족속이지, 아마."
 
어머니의 사진에 압도적인 양을 차지하는 아버지의 사진. 그것도 거의 남자들과 연대하여 전국 곳곳을 다녔던 아버지와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성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음을 밝히며 당시의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의식을 얘기한다. 심지어 남성들이 바람을 피우는 걸 당당하게 생각하고 여자들도 동조하는 의식이 전반적이었다는 대목은 영화 <로맨스그레이>(신상옥 감독/1963년)를 통해 알려 준다.

"(남편이 외도하는) 그 원인은 구 여사 자신에게 있다고 봐요."
"아니, 제가 어때서요?"
"순영인 왜 화장도 못해? 그 머린 언제 미장원에 간 머리지? 그 옷이 그게 뭐야? 그러고도 남편의 매력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해?"
 
누구든 자신의 부모님이 살아오신 삶은 그 자체로 현대사이다. 크든 작든 그들의 생각과 행동들이 모여 시대를 만들어간다. 이 책이 더욱 가치가 있는 건 유명한 사람들의 삶이 아닌 자신의 부모님 같은 '그저 그런' 분들의 이야기로 우리네 삶을 들여다보게 하고 동시대의 어머니 아버지들의 이야기로 확장하고 있다는 거다.

이 책 <인생극장>은 장례식이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부모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다. 마지막 인사는 부모가 살았던 시대를 회고하면서 그들의 시대와 나의 시대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가는 지난한 작업과 함께 마련되었다. 이 작업을 통해 자식 세대가 이전 세대를 감정적으로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그때 비로소 진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 다가오지 않을까.
 
책을 보는 내내 1999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저자의 어머니처럼 아버지도 폐암 진단을 받고 불과 두 달 후에 눈을 감으셨다. 자식으로서 가장 후회되는 건 살아계실 때 이렇다 할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원래 그래, 라는 말은 의미 없다.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다.

말씀이 별로 없었고 큰 소리 한 번 내신 적이 없던 분이었다 하더라도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전역했을 때, 일을 시작했을 때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버지와 마주 앉아 소주잔 기울일 수 있었다. 그걸 하지 못했다.

그저 바쁘다는 이유로 밖으로만 돌았던 나를 원망한다. 그나마 어머니는 인터뷰를 조금이나마 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올해 84세에 멀리 떨어져 살고 계셔서 조금이라도 더 대화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지만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한다.

이 책 <인생극장>을 보고 많은 분들이 부모님을 인터뷰하셨으면 한다. 아직 못하신 분들이라면. 이 책을 계기로 부모님 인터뷰 붐이 일어나길 기대해본다. 이 책은 적어도 나에겐, 그런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인생극장 -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노명우 지음, 사계절(2018)


태그:#인생극장, #노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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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관심이 많습니다. 진심이 담긴 글쓰기를 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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